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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양일보]지난 3.1운동 100주년(2019년 3월 1일)을 맞이해 시작한 재일동포 고난의 역사를 격주(월요일)로 연재했습니다. 이 작업을 이제 막을 내리고자 합니다.그동안 관심을 두고 읽어준 독자 여러분들에게 심심한 감사의 뜻을 표합니다.‘재일동포 75년사’를 정리해 동양일보에 기고한 것은 아주 보람된 일이었습니다.그 이유는 재일동포들이 이 정도의 수난사였던 것을 모국의 대부분은 알 수 없는 내용이었습니다. 당시 고난의 현장을 경험하신 분들이 아직 일본에 살고 계십니다. 그래서 그분들이 살아계실 때 이 원고를 공개할 수 있었던
재일조선인의삶75년
동양일보
2022.07.31 15: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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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양일보]●반대 운동의 확산:민족교육에 대한 권리 사상의 정착외국인 학교 법안은 교육입법이라기보다는 ‘국익’론과 간섭의 논리를 축으로 한 치안입법이고, 조선인 학교를 억압하고 재일조선인 청소년의 비 조선인화를 노린 것이었다. 그것은 전후의 재일조선인 교육정책의 기본적인 패턴을 반복한 것이 분명하지만, 단 법제화를 통해 한층 통제의 강제력을 강화할 수 있는 것이었다. 전전, 그리고 1948년부터 한국전쟁기에 이어 세 번째로 동화교육 체제화의 위기가 현재화(現在化)하였다. 법안이 갖는 이같은 교육 침략적 의미가 선전, 폭로됨에 따라
재일조선인의삶75년
동양일보
2022.05.29 15: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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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양일보]이 외국인 학교 법안에서 가장 논란이 많았던 부분은 국익이란 무엇을 의미하는가?반일 교육은 무엇을 가리키는가 하는 민족적·계급적 이해와 관련된 것이었다. 법안 작성의 경과와 그와 관련된 논의를 통해서 말은 외국인학교법안이지만, 본질은 조선인 학교를 규제하고자 하는 치안 입법임에 틀림없다는 것이 새삼 명백해졌다. 이런 정부의 견해를 살펴보기로 한다.아무리 일본 정부라 해도 민족교육 그 자체를 부정하는 것은 할 수 없었다. 교육은 항상 민족교육의 형태를 취하여 행해지고 있고, 말하자면 근대 교육의 공리와 같은 것이기 때문이다
재일조선인의삶75년
동양일보
2022.04.17 19: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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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양일보]교육정책의 차원에서 외국인학교 제도 창설이라는 문제를 살펴보면, 당시의 반대운동에서는 관심을 두기 어려웠겠지만, 오늘날의 시점에서 볼 때 필요한 관점은 이 문제를 전수학교제도의 창설과 관련지어 그 행방을 파악해야 한다는 것이다.문부성 측이 각종 학교 제도 개편을 고집하고, 전수학교 안과 외국인학교 안의 실시를 하나로 보았기 때문이다. 그것은 법안의 추이에서 고찰된다. 주제넘은 기술이 되겠지만, 그 추이를 정리해 보면 다음과 같다.먼저 1966년에는 ‘학교교육법 일부 개정 법안’을 만들고, 전수학교와 외국인학교의 양 제도를
재일조선인의삶75년
동양일보
2022.04.03 2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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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양일보]●1966년 4월 외국인 학교 법안을 둘러싼 대결의 시작일본은 1966년 4월 제51회 통상국회에서 ‘66년도 예산 심의’가 종료됨과 동시에 정부·자민당은 외국인 학교 제도 창설의 구상을 분명히 했다.문부성과 자민당은 한일조약을 교육적인 측면에서의 ‘뒤처리’로 규정하고(나다오(灘尾)문부대신, 1967년), 그 문제점의 조정을 서둘렀다. 그러나 그것이 자민당 문교 조사회 외국인 학교 소위원회(위원장 아라키(荒木萬壽夫 전 문부대신)의 ‘최종요강’으로 정리되고, 동월 8일, 자민당 문교부회·동 조사회 합동회의와 정부·여당 연락
재일조선인의삶75년
동양일보
2022.03.20 18: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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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양일보]●비판적 주체의 성장(2)한일회담 반대 투쟁은 일본의 국회 비준을 예견한 1965년 가을에 최고조에 달하였다. 그 와중에 이 운동의 일환으로 재일조선인의 민족교육에 대한 억압에 관심을 두는, 상대적으로 독자적인 운동이 조직되기 시작하였다.정부가 재일 외국인 교육연락회를 설치하고, 일찍이 조선인 학교를 억압하겠다는 태도를 명확히 하였기 때문에 이에 대한 각별한 경계심이 조선총련은 물론, 일본의 조일협회(朝日協會)나 일교조(日敎組) 등의 관계자에게도 생겨났다. 조선인 학교는 새로운 위기를 맞고 있다는 정세 판단이 되었다.이토
재일조선인의삶75년
동양일보
2022.03.06 16: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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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양일보]●재일조선인에 대한 관리와 교육의 구조교육과 법적 지위에서의 분단(2)일본 정부는 재일조선인을 협정 영주권의 취득자와 미취득자로 선별하는 조처를 즉각 취하기 시작했다.그 첫 번째가 ‘국적’에 의한 분단의 제도화다.1965년 10월에 한국은 국적이 있는 것이지만, 조선은 단순한 용어에 불가하다는 ‘정부 통일 견해’를 내고, 그때까지 양자를 모두 용어라고 했던 견해를 부정했다.그것과 동시에 조선국적에서 한국국적으로 변경은 인정하지만, 역으로 한국적에서 조선적으로의 변경은 인정하지 않는다는 방침을 재확인했다. 이것은 곧 국적
재일조선인의삶75년
동양일보
2022.02.20 20: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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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양일보]●한일 조약 재일조선인 교육(4)재일조선인 자녀가 조선인으로 교육받는 것을 부정한 정부의 입장이 여실히 반영되어 있지만, 여기서 말하는 ‘조선인으로서의 국민성의 함양’이라는 것은 명확히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을 염두에 두는 것이었다. 이 통달에 잇달아서 ‘또 이것은 해당 시설의 교육이 우리 일본 사회에 유해한 것이 아닌 한 그것이 사실상 그 시행을 금지하는 취지는 아니다’는 것을 덧붙이고 있다.(밑줄 – 인용자)‘일본 사회에 유해’하지 않는 민족교육이라면 이를 허용할 방침으로 나타내고 있는 이유다. 요컨대 이것은 일본의 ‘
재일조선인의삶75년
동양일보
2022.02.06 16: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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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양일보]●한일 조약 재일조선인 교육(3)-문부차관 통달일본 정부는 한일 조약이 ‘가조인’됨과 동시에 재일조선인 교육의 규제에 나섰다. 이를 위해 일본인 학교로 취학을 제도적으로 보장하는 길을 준비하면서 다른 한편으로 조선인 학교를 억압하는 2개의 방법을 다시 고안해 냈다.이와 같은 방침을 재빠르게 정책으로 집약·정착시킨 것이, 1965년 12월 28일에 나온 2개의 문부차관 통달이었다.이것들은 현재까지 그 효력을 지니고 있다. 그러므로 이 2개의 통달은 1965년 이래의 ‘한일조약 체제’하에 의한 재일조선인 교육정책의 기본 방향
재일조선인의삶75년
동양일보
2022.01.16 16: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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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양일보]●한일조약과 재일조선인 교육(2)일본에 설립된 외국인 학교의 존재 양상을 전체적 재검토한다는 문제의 설정 방식은 지금까지 없었던 것이었다. 이것은 일본의 주권을 강하게 의식하고, 그에 따라 일본 주권과 관련 속에서 외국인 학교를 규정한다는 착상에서 나온 것이었다. 그러나 이와 같은 새로운 외피를 입으면서도 그 목표는 애초부터 명확하였다. 즉 조선인 학교가 주권을 침해하는 반일교육 외국인 학교로 간주하고, 이를 통제하고자 한 것 애초부터 분명했다.‘연락회’의 책임자인 이시가와 지로(石川二郞)는 그 목적을 솔직히 고백하여 ‘
재일조선인의삶75년
동양일보
2021.12.19 18: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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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양일보]1966년 6월에 제출 보고된 ‘일본의 안전보장에 관한 중간보고’에서는 이러한 재일조선인=북한 스파이=간접 침략의 담당자=안보체계의 장해라는 도식 안에 조선인 학교도 정확히 들어 있었다.즉 위의 보고서는 ‘간접 침략에 의한 위험은 현상적으로도 이미 존재하고 있다’고 언급한 후, 그 담당자로서 ‘엄중한 경계를 필요가 있는 것은 북한 정권에서의 파괴적·혁명적인 공작이다. 특히 일본에 다수 존재하고 있는 북한계 학교는 일본에서 반일교육·혁명교육을 하고 있다. 그것은 장차 일본에 중대한 위협이 될 것이다’고 기록하고 있다.이들
재일조선인의삶75년
동양일보
2021.12.05 19: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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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양일보]●조선인 학생에 대한 계속적인 인권 침범이처럼 일본 정부가 조선인 학교제도 전체를 법적으로 차별하고, 그 압력을 도모하는 정책 외에도, 조선인 교사·학생에게 개별적 직접 박해를 가하고 그 인권을 침해하여 집요하게 민족교육에 간섭하려 했던 점도 간과해서는 안 된다.그것은 두 개의 방향에서 계획되었다.첫째 방향은 치안 당국에 의한 직접적인 핍박이다. 많은 경우의 내용은 ’외국인 등록 위반‘을 구실로 핍박했다. 구 외국인등록령이 제정된 이래 15년간(1947~1961년) 18만2000명의 재일조선인이 등록법 위반으로 취조받았다
재일조선인의삶75년
동양일보
2021.11.28 18: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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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양일보]●민족교육의 구조(2)교과과정 안이 재일조선인 청년의 현실과 미래에 맞추어 고안되어 있듯이 교과서도 공화국(북한)의 교과서를 그대로 사용할 수는 없었다. 일본 사회의 조건에 맞추고, 일본에서 자라난 조선의 아이들에게 맞도록 대시 편집해야 했다.교과서 편집은 (1)왕래의 자유가 없으므로 편집자 자신이 공화국의 실정을 보지 못한 관계로 그 실정을 반영하기 어렵고 (2)학생 구성이 일률적이지 않고(도중에 편입생, 야간학급의 학생 등), 게다가 공화국의 아이들과 심리적인 발육이나 언어 습득이라는 점에서 현저하게 차이가 나므로 재
재일조선인의삶75년
동양일보
2021.10.31 16: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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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양일보]●민족교육의 구조1955년부터 다시 급속하게 발전하기 시작한 민족교육은 60년대에 들어와서부터 학교의 시설 면․내용 면의 충실을 계속해서 추진하여, 세계에 유례없는 외국에서 민족교육 체계를 완성, 일본 사회 가운데 정착하기에 이르렀다. 그러면서 귀국 운동의 고양이 일 단락짓게 되고, 이 급속한 재성장기에 상대적인 안정․성숙 시기로 옮아가자, 또 다른 커다란 벽에 봉착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조선인 학교의 취학 자의 증가가 줄어지게 되어, 60년대 중반부터 4만 명 전후로 머무는 상태가 계속되었다. 이 벽을 어떻게 돌파해서
재일조선인의삶75년
동양일보
2021.10.17 19: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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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양일보]▷7월 19일자에서 계속●민족교육의 발전(2)학교 만들기 20년간의 상황을 통계로 나타내면 다음 와 같다(일본교육학회편, 자료집Ⅱ, 1972년.).이와 같이 재일조선인의 민족교육의 제도적 중핵인 조선인 각급 학교는 해를 거듭하면서 충실을 더해서 갔고, 1950년대 후반에 취해진 다음 3개의 조치는 그와 같은 발전을 더욱 확고하게 뒷받침하였다.첫째는 조선대학교 창설과 그에 의한 민주주의적 민족교육의 체계적 완성이고, 둘째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으로부터 교육 원조비를 보내기 시작한 것이고, 셋째
재일조선인의삶75년
동양일보
2021.09.05 2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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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양일보]● 조선총련의 교육 방침조선총련의 창립은 조선인학교를 다시 부흥하는 조직적이고, 운동적인 토대가 되었다. 조선총련의 지도하에 재일조선인의 민족교육은 일본의 패전 후(1945)에 조선인학교 창설 운동의 고양기에 이어 제2의 고양기를 맞이했다. 그러나 전쟁 이전의 동화교육 체제의 상흔(傷痕)에다 1948년 이래의 동화교육에 대한 공격을 받은 상흔이 중첩되어 깊이 아로새겨졌기 때문에 전체적으로 재일조선인에 대한 동화의 침투는 더욱 심화하였다고 말할 수 있다.이런 악조건을 물리치고 민족교육을 모든 조선인 자녀에게 확대해 간 것은
재일조선인의삶75년
동양일보
2021.07.18 19: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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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양일보]●폐교 반대 투쟁(2)조교조를 중심으로 1954년 가을부터 부모의 생활 실태를 조사한 활동은 조교조 ‘부모의 실태조사·연구자료’로 정리되었다.이에 따라 부모 개개인의 이력을 청취한 기록을 통해 민족 차별에 의한 빈곤한 생활 실태가 분명해졌고, 피차별의 생활을 변경시키지 않는 한 편견도 소멸될 수 없다는 점이 제기되었다.그와 동시에 “(생활고에 시달리는) 사회적 경제적 조건으로 조선인학교의 폐교가 행해진다면 아이들의 행복은 파괴되고”, 민족교육의 기회가 박탈될 것이라는 점, “일본에 영주하기를 원하는 자는 거의 없고, 모두
재일조선인의삶75년
동양일보
2021.07.04 19: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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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양일보]●폐교 반대 투쟁(1)6항목 문제의 강제에서 조선인학교 폐교 처분 결정까지 이르렀던 것은 도교위의 억압 속에서, 도립조선인학교 당사자에게는 1954년이라는 해는 한편으로는 투쟁을 또 한편으로는 교육을 전개했던 그 어느 때보다도 가혹한 1년이 될 수밖에 없었다.도교위를 향한 투쟁은 당초 ‘폐교 반대’ 투쟁이었다. 그러나 폐교 처분이 결정된 이후, 특히 조선인의 생활실태 조사를 거친 1955년 초겨울부터는 “국교가 조정될 때까지 폐교를 연기하라”는 말하자면 조건부 투쟁으로 변경되었다. 조선학교 당사자만의 운동으로는 정책을 저
재일조선인의삶75년
동양일보
2021.06.20 21: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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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양일보]●폐교처분정규 수업 및 학급담임은 일본인 교사에 한정한다고 한 것에 대해서 여러 가지 무리가 발생하였다.예를 들면, 아라카와(荒川)의 조선인학교는 12학급에 일본인 교사가 7명밖에 없어 학급 수보다도 일본인 교사의 수가 적었다. 이는 어느 학교나 마찬가지였다. 민족교육의 현실이라는 취지에서 지금까지 어느 학교에서도 조선인 교사가 학급 담임을 맡았고, 정규 수업의 반 이상을 담당함으로써 비로소 교육다운 교육이 유지되어 왔던 것이다.그런데 완전히 기계적으로 조선인 교사의 담당 시간을 과외만으로 국한시켜 온 것이므로 일본인 교
재일조선인의삶75년
동양일보
2021.06.06 21: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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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양일보]● 세목 협정의 억압그러나 일은 이와 같은 서약서를 취한다는 것에서 끝나지 않았다. 도교위는 숨통을 끊을 듯이 추격을 가해 왔다. 각서와 동시에 도교위와 PTA 대표 사이에서 ‘양해 사항’이 교환되었지만, 여기에서 ‘각서’ 조항의 구체화를 꾀한 ‘세목’을 정하기로 했다. 20일 이내 이 세목을 어떻게 할 것인가를 교섭했지만, 도교위는 그것이 정해진 세목을 전부 인정한다고 할 뿐이고, PTA가 이를 거부하거나 교섭 타절을 선언, 먼저 30일에 신학년의 개교(4월 5일로 예정)를 무기 연기시키기로 각 조선인 학교장 앞으로 통
재일조선인의삶75년
동양일보
2021.05.30 19:5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