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육십 년 가까이 굳게 닫아 두었던 타임캡슐 문 열어젖히는 소리가 묵직하다. 오밀조밀한 클래식 카 단장이 시선에 빨려들고, 1951년산 폰티악이 굉음과 매연을 내뿜으며 미친 존재감을 드러낸다. 오토바이에 노란 지붕 씌운 꼬꼬 택시가 암탉 뒤쫓듯 달려가는 틈새 비집고 자전거에 지붕 씌운 비씨 택시도 끼어든다. 행선지 제각각인 사람들을 섞어 태웠다가 원하는 곳에 내려주는 마끼나 택시, 트럭 적재함을 고쳐 짐짝인 듯 손님을 실어 나르는 구아구아나 시외버스 대용인 까미용도 느릿느릿 행렬에 끼어든다. 바닷바람 동력 삼은 평등과 자긍심이 소음과
김득진작가와떠나는쿠바여행
김득진 작가
2018.09.19 20:36
-
성 프란시스코 대성당 앞에선 호객꾼 음성마저 성스럽게 들린다. 호화 유람선은 동상이 치켜든 십자가를 깃발 삼아 관광객을 떠민다. 육지 멀미에 시달릴까봐 고급 호텔 몇 개가 입을 벌리고, 뙤약볕에 휘청거리던 관광객을 익숙하고 편리한 세상으로 소리 없이 빨아들인다. 색다른 목소리에 갈증 난 사람만 무리에서 뛰쳐나와 광장을 서성거린다. 낯선 곳의 소리를 연인에게 전하지 않고선 못 배겨 우체국 기웃거리는 사람은 그리웠단 걸 증명하려고 엽서를 사고 침 묻힌 우표를 붙인다. 여행 경비 모자랄까봐 문 활짝 열어 둔 현금인출기에선 마른 논에 물
김득진작가와떠나는쿠바여행
김득진
2018.08.09 21:05
-
(동양일보 박장미 기자) 헤밍웨이 별장인 핑카 비이하, 마다가스카르에 가야 볼 수 있는 바오밥 대신 세이바 나무가 있단 말에 솔깃하다. 아바나에서 그리 멀지 않지만 교통 불편해서 미뤘더니 거길 들를 가족이 있다고 누군가 알려준다. 브라질로 이민 가서 쓰러지지 않을 만큼 뿌리 내렸다는 사실에다 렌트한 승합차 함께 타고 가는 거니 부담 갖지 말란 말에 맘도 가볍다. 까사 입구에서 십분 기다려 올라 탄 승합차, 민폐 끼쳐선 안 된단 생각에 맨 뒷자리로 숨어든다. 가족이 묵고 있는 까사의 비좁은 골목, 주차하고 나니 한 사람 지나치기도 힘
김득진작가와떠나는쿠바여행
김득진 작가
2018.05.31 18:45
-
(동양일보 김득진 기자) 세라믹 아르떼 전시장 레알 뚜에로사에 들렀을 때다. 로비에선 연필 두 자루를 꺾어 피노키오 팔과 다리 삼은 조형물이 반겼다. 거짓말의 상징이랄 수 있는 코는 보일 듯 말 듯 작아서 눈에 띄지 않을 정도였다. 타일 몇 장을 바꿔 붙이면 암탉이 되는 작품에다 황토기와를 물결치는 미니어처로 만든 조형물을 걸음 옮겨가며 감상한 뒤 점토로 만든 사람 흉상 여럿을 철망 속에 가둬둔 것까지 하나하나 살펴나갔다. 그 순간 제복 차림의 흑인 여자가 내게 다가와 물었다, 안내를 해 드려도 되겠느냐고. 그는 입구에 들어설 때부
김득진작가와떠나는쿠바여행
김득진 작가
2018.05.24 18:55
-
(동양일보 김득진 기자) 공산주의 국가 쿠바서 종교 탄압이란 말이 나돌지 않는 건 묘한 일이다. 소박한 침례교회, 예배드리려고 모여 든 신도들 기도하는 모습은 자본주의 국가랑 다를 게 없다. 페리 부두 곁 앙증맞은 이슬람 모스크에서는 아잔이 묵직하게 울려 퍼져 경건함을 자아낸다. 그 중 특이한 건 인구의 10%를 차지하는 산떼리아, 골목 지나칠 때 자주 마주치는 하얀 옷의 성녀들이 바로 그들이다. 모자며 신발에다 핸드백과 양산도 죄다 하얀색으로 갖춰 입고 아이 앞세워 거니는 그들에게서 흰색 아닌 걸 찾아보긴 어렵다. 그을린 살갗 번
김득진작가와떠나는쿠바여행
김득진 작가
2018.05.17 17:30
-
(동양일보 박장미 기자) 비아술 버스는 정류소마다 20분 넘게 쉬었다 출발하곤 했다. 버릇처럼 화장실 들르다가 건너뛰었더니 방광이 터질 것 같았다. 참았던 걸 비우기 바쁘게 허기가 밀려들었고, 두리번거렸지만 근처엔 먹을 걸 파는 가게 하나 보이지 않았다. 손 가리개 하고 살폈더니 길 건너 조그만 가게가 보였다. 먼지 날리는 길가, 좁긴 해도 피자며 주스가 얼핏 보여 허겁지겁 달려갔다. 이르마란 허술한 가게서도 줄을 서야 해서 짜증이 치솟는 순간 그라시아스, 모멘또! 라는 카랑카랑한 목소리가 들렸다. 눌러 쓴 모자 아래로 드러난 아가
김득진작가와떠나는쿠바여행
김득진 작가
2018.04.26 18:50
-
(동양일보 박장미 기자) 시골 맛 쏠쏠한 중부지방, 이름값 할 것 같은 시에고 데 아빌라(CIEGO DE AVILA)에 발 들인다. 터미널에서 물으니 걸어서 둘러봐도 다리 아프진 않을 거라 일러준다. 얘길 듣자마자 눈앞 택시나 마차가 연극 소품처럼 보인다. 어떤 게 아찔하도록 해 줄까 싶어 목을 길게 빼고 시가지를 더듬지만 이십 분 만에 철길이 가로막는다. 말끔하게 정돈된 골목에선 아찔함을 찾기 힘들 것 같아 철길 따라 두 블록 벗어나 본다. 좁은 도로를 건너자마자 말끔하던 길이 울퉁불퉁하게 바뀌면서 샌들이 턱턱 걸린다. 바닥에 시
김득진작가와떠나는쿠바여행
김득진 작가
2018.04.19 16:10
-
(동양일보 박장미 기자) 처음 브리가다 캠프 참가했을 때 몇 번이나 깜짝 놀랐다. 뚜껑 부분 잘라낸 플라스틱 용기를 우유 담는 그릇으로 쓰고 있었고, 고물상에서 내다버린 거울이 세면장에 걸려 있었다. 거기 비친 얼굴은 피카소 그림과도 같아 보였다. 하지만 전 세계 사람들이 모인 캠프여서 절약 정신을 본받으라는 뜻이라 여겼다. 쿠바에서는 누구나 재활용에 길들여져 있다는 걸 뒤늦게 알았다. 과일이나 채소 가게는 물건 담을 비닐봉지 한 장 주지 않는다. 쿠바에서 흔해 빠진 설탕을 사려해도 그걸 사려면 그릇이 필요하고, 모카 포트에서 끓인
김득진작가와떠나는쿠바여행
김득진 작가
2018.04.05 18:30
-
(동양일보 박장미 기자) 쿠바노들 주식에 버금가는 피자는 와플 크기다. 몇몇 고급 호텔을 뺀다면 똑같은 팬으로 구워내는 탓이다. 두께 1㎝쯤 되게 도우를 넣고 케첩에다 피자 조금 흩뿌린 뒤 팬에 올리고, 숯불 담긴 드럼통 위 칸에 넣어 구워내면 인절미와 빈대떡 중간 맛이 난다. 피자가 별 맛 있겠냐고 무시하면 요리사에게 뺨 맞을 지도 모른다. 이름난 가게 앞에는 언제나 손님이 길게 늘어서 있다. 그걸로 봐서 만드는 사람 손에 따라 맛은 제각각인 모양이다. 크기나 생김새는 별다를 게 없지만 값은 천차만별이다. 아바나만 해도 번화가냐
김득진작가와떠나는쿠바여행
김득진 작가
2018.03.29 18:14
-
유기농 천국인 쿠바는 공기질마저 남다르다. 낡은 차만 없다면 바닷가 거닐며 숨 쉬는 거랑 별 차이 없다. 탈 것 중에서도 오토바이가 일으키는 공해는 예사롭지 않다.작은 덩치로 트럭 개조한 버스 까미용보다 매연이나 소음을 더 많이 뿜어낸다. 동선 겹치지 않으려 이리저리 숨지만 사람 가는 곳마다 파고드는 놈을 피하기란 쉽지 않다.골목 어슬렁거리는 순간 어디선가 시끄러운 소리가 들리기 시작하고, 시커먼 오토바이가 옆에 달린 바구니에 사람을 태운 채 달려든다. 뭐길래 이토록 시끄럽나 살피니 소련에서 독일 BMW R75를 카피해 만들었다는
김득진작가와떠나는쿠바여행
김득진 작가
2018.03.22 20:06
-
버스로 17시간 반 걸려 도착한 동쪽 끝 도시. 여러 나라서 널리 쓰는 지명이기도 한 산티아고는 매스컴에 단골로 등장해서 귀에 익숙하다.예약한 까사에 택시로 도착한 게 새벽 네 시. 몇 시간 머물면서 하루치 숙박비 줘야 한다는 게 억울한데, 꿈나라 헤맬 시간까지 고함 질러대는 주민들이나 배기통 떼버린 듯 굉음 울려대는 낡은 차들이 원망스럽다. 버스에 오래 시달려 시래기 된 몸이지만 애를 쓸수록 잠은 멀리 달아난다. 긴 여행에 배가 홀쭉해진 것도 잠 쫓는 걸 거든다. 비상식량 꺼내 먹으려다가 식사 시간이 다 되어 가는데 속 더부룩할까
김득진작가와떠나는쿠바여행
김득진 작가
2018.03.15 19:48
-
미국 마피아가 자국 여행객 끌어들이려 1930년 문을 연 나시오날 호텔. 펼쳐진 바다와 딸린 정원이 투숙객 마음을 설레게 해서 이름났다.술 마시는 게 불법이었던 미국과 달리 싼 럼주가 넘쳐나는 쿠바는 천국이나 다름없었다. 대왕야자 두 그루가 아직도 키 겨루는 정원, 오래된 나무 잘려나간 둥치 위에 팻말이 붙어 있다. 카리브 해를 품은 별 다섯 개짜리 호텔은
김득진작가와떠나는쿠바여행
김득진 작가
2018.03.08 20:52
-
무대는 빅톨 위고 동상 앞, 관객은 시간과 돈을 주체 못하는 헤밍웨이 팬이다. 별 다섯 개 호텔 못잖은 유람선이 부려놓은 관광객은 가이드 깃발 따라 퍼포먼스 무대를 찾아든다. 미국에서 아바나까지 직항 노선은 관객 모자랄까봐 생겼다 보는 게 옳다.‘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를 집필한 곳에서 더 편하게 지낼 영감 얻어가는 건 덤이다. 객실 잠깐 들여다보는데 5달러, 그 외에도 돈 버는 수단은 셀 수 없을 만치 많다. 굳이 퍼포먼스가 아니라도 사진 모델이나 라이브 공연을 펼쳐 관객들 주머니를 턴다. 질 낮은 시가를 길에 내놓고 판다든지
김득진작가와떠나는쿠바여행
김득진 작가
2018.03.01 18:05
-
버스 터미널 어슬렁거리면 합승택시 호객꾼이 금세 달려든다. 그게 귀찮다면 한두 시간 마다 떠나는 비아술 버스도 있다. 때 묻지 않은 자연 품에 안겨보겠다고 까사 손님 말을 믿고 합승택시를 탔다. 나 홀로 여행자에겐 비냘레스 만 한 곳이 없다지만 사기꾼에게 주머니 털릴 까봐 전전긍긍한다.40쿡으로 계약한 택시 요금에서 1쿡 더 낸 뜨리니다드 호객꾼의 애교어린 사기를 당한 뒤다. 5쿡 받아야 할 보증금을 6쿡 받아간 활달한 성격의 호벤, 젊은 청년 웃음 값이 1쿡인 셈이다. 택시에서 내리고부터 속지 않으려 눈 부라려도 호객꾼 한 명 보
김득진작가와떠나는쿠바여행
김득진 작가
2018.02.22 17:43
-
쿠바 정부가 주관하는 브리가다 캠프는 패키지 관광이라 보는 게 옳다. 값싼 대신 손수 캠프장 청소며 페인트칠을 해야 한다. 거기다가 농사일도 버젓이 일정에 잡혀 있다. 오십 년 된 트랙터가 식사 끝낸 대원들을 실어 농장에 부려 놓는다. 입 무거운 관리인 손짓 따라 잡초 뽑거나 채소 수확에 내몰리는 데다 씨 뿌리기 좋으라고 밭 일구는 일도 대원들 몫이다. 허드렛일에 지나지 않지만 일정표에는 그럴싸한 이름으로 바뀌어 있다. 말이 체험이지 닷새를 그렇게 흘려보내면 진이 빠진다. 가이드 따라 쇼핑센터 끌려 다니듯 짜증이 날 무렵 유기농으로
김득진작가와떠나는쿠바여행
김득진 작가
2018.02.08 19:58
-
지난해 다녀왔던 캠프, 장기 자랑 시간에 그들 춤과 노래를 멀뚱히 지켜봐야 하는 건 민망스런 일이었다. 어둑한 분위기가 늘 마음에 걸려 분위기 밝게 할 이벤트를 찾아내야겠단 생각에 이르렀고, 풍등을 가져가기로 맘먹으니 가뿐해졌다. 인터넷을 뒤졌더니 그건 점화장치가 달려 폭발물에 가까웠다. 별 탈 없이 검색대 통과할 수 있을까, 사회주의 국가에서 점화 장치 달린 걸 통과시켜 줄까, 걱정이 꼬리를 물었다. 모험할 수밖에 없다며 여덟 개를 주문했고, 배달의 겨레답게 이틀 만에 택배로 왔다. 네 개를 골라 넣었지만 철사 뼈대에다 습자지 붙
김득진작가와떠나는쿠바여행
김득진 작가
2018.02.01 20:23
-
후줄근한 쿠바노 둘과 빨간 원피스 차림 쿠바나가 얘길 나누고 있다. 얼굴색 다르지만 구김살 없는 건 같다. 고개 돌려 바라본 성당 정문, 갑옷 차림 남자가 고개 숙인 채 한쪽 구석에서 있다. 누굴까 싶어 조심스레 다가가 살펴본다. 손은 보이지 않고 음각 글씨 새긴 책 한 권만 허공에 붕 떠 있다. 표정 읽으려고 음영 속을 더듬는 순간, 얼굴 대신 검은 공간이 시선을 훅 빨아들인다. 블랙홀 무섭다는 걸 알고 몸을 뻗대며 주춤 뒤로 물러선다. 거기엔 사람 빠져 나간 청동 갑옷만 덩그러니 놓여 있고, 스테디셀러인 레 미제라블 글씨만 클로
김득진작가와떠나는쿠바여행
김득진 작가
2018.01.25 20:09
-
메이데이 퍼레이드는 브리가다 캠프의 가장 큰 이벤트다. 권력이 되었던 피델 카스트로며 신화로 남은 체 게바라를 지지하는 군중들 열기는 뜨거웠다. 정오의 햇살마저 백오십 만 명이 거쳐 간 혁명 광장 데우는 노동에 뛰어들었다.들뜬 기분을 가라앉히지 못한 채 일본인들과 후끈한 공간으로 발을 들여놓았다. 왕복 10차선 도로에는 쓰레기라곤 눈에 띄지 않았다. 그렇게 많은 퍼레이드 행렬이 지나간 자리가 맞나 싶다. 모르긴 해도 호세 마르티 근엄한 동상 덕분 아닐까 생각할 때, 저만치서 트럭 몇 대가 작업복 입은 남자들을 싣고 달려왔다. 빗자루
김득진작가와떠나는쿠바여행
김득진 작가
2018.01.18 20:34
-
이름을 잘 까먹는단 말에 ‘후아 유?’ 라고 기억하라던 그녀. 먹는 거, 씻는 거, 잠자리까지 불편한 캠프에 딸과 함께 참가했다. 이스라엘과의 다툼을 이겨내려고 세계 각지에서 모여든 팔레스타인 출신은 마흔 명 가량이었다. 브리가다 캠프, 연대의 힘을 빌리려는 그들은 하나같이 띠 모양 국기를 들고 같은 무늬 팔찌까지 찼다. 나라의 표상을 펼쳐 보이는 그들 눈빛이 예사롭지 않은데, 지지해 달라고 보는 사람마다 머릴 조아리는 모습에서 비장함이 드러나기도 했다.허름한 차림으로 딸과 함께 자갈밭에 들어선 후아야는 영판 시골 아낙이었다. 하지
김득진작가와떠나는쿠바여행
김득진 작가
2018.01.11 20:41
-
브리가다 캠프 컨퍼런스 룸, 낯선 화풍의 팝업창이 열린다. 룸 절반을 의자로 칸 지르고, 가운데엔 2미터 길이의 테이프를 걸쳐두었다. 하나 둘 모여드는 대원들 틈으로 훤칠한 키에다 준수하기까지 한 육십 대 남자가 들어선다.그때 귀를 쫑긋하게 하는 낭랑한 사회자 목소리가 막 도착한 남자를 소개하고, 아내로 보이는 여자의 온화한 미소가 따라붙는다. 일본인끼리 그걸 지켜보다가 힐끔 내 눈치를 살핀다. 그 중 친해서 옆에 앉은 마끼꼬가 고개 돌려 그들 얘기를 귓속말로 전해준다.저 사람은 1998년 플로리다에서 간첩 활동을 했다는 혐의로 미
김득진작가와떠나는쿠바여행
김득진 작가
2018.01.04 21:0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