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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양일보)아내는 어린애가 되었습니다내가 밖에 나갈라치면어느새 먼저 문밖에 나가 있습니다억지로 떼어놓고 외출을 하면왜 안 와?언제 와?늘 똑같은 두 마디전화기 안에서 계속 울고 있습니다내가 자기를 낳은 어미도 아니고아버지도 아닌데한평생 살 비벼 새끼 낳고 기른죄 많은 지아비라서나는 나이 든 아기의 아빠가 되었습니다오늘도 내 사랑하는 아가는내게 매달려 한마디 말은 없지만그냥, 그냥, 말문을 닫고 웃기만 합니다.
아침을여는시
동양일보
2016.12.04 21: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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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이 거두지 못한 혼을 위하여그가 오시다 한밤내 풀꽃의 어깨를 두드려생시에 가졌던 꿈을 부리게 하고기억의 건반그 중 시린 음계를 눌러화살처럼 빠른 아픔 한 줄기 놓으시는 뜻 불면의 새벽이 잉크빛으로 젖고 있다
아침을여는시
동양일보
2016.12.01 2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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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 삭힌 홍어처럼이나오리알이 푹 삭고 나면제 몸속에 송화를 피운다꾀꼬리 울 때노랗게 날리는 송홧가루그 사이를 날아새는 소나무 속으로 숨고알은 썩어서도꽃을 피워 제 몸을 연다드디어백자 접시에 현현하니천하 진미 따로 없다 *‘피단皮蛋’이라고도 불리는 삭힌 오리알.
아침을여는시
동양일보
2016.11.30 2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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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자 사는 연습을 합니다언젠가 우리는 무엇이 되어 헤어집니다오늘 밤엔 물소리에 마음 빼앗기니 고요합니다불을 끄고 누우니 생각납니다슬픔을 잊으려고 우리는 큰 소리로 노래 불렀습니다우리는 마주보면서 돌아서 있었습니다그동안 우리는 속내를 감추느라 박장대소했습니다수많은 길이 한 곳에 모여 투항합니다망각의 그늘이 없었더라면우리는 혼자인 줄 몰랐습니다가까운 길을 멀리 돌아왔습니다이별이 구원임을 알았을 때우리는 너무 오래 착각하고 있었습니다손을 놓으니 마음이 평화롭습니다집착하지 않으니 세상이 제자리에서 자유스럽습니다우리는 늘 혼자였습니다
아침을여는시
동양일보
2016.11.29 20: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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꼭 함께 있기를 바랐던 사람이 아닌전혀 생각지 않았던 사람과지금 이 모래밭에 함께 있구나생각할 때가 있습니다 꼭 하고 싶었던 그 말가슴속 깊은 우물에 넣어두고전혀 생각지 않았던 말들만빈 두레박에 담아 건네는 때가 있습니다 많은 이들이 그러하겠지만살아 있는 동안 한번은 만나리라 믿으며만나면 별이 지기 전에못다한 그 말 꼭 해야 한다 생각하며 꼭 걷기로 마음먹었던 그 길이 아닌전혀 꿈꾸지 않았던 길 걸어온 지어느새 이리 오래 되었구나생각하는 저녁이 있습니다
아침을여는시
동양일보
2016.11.28 20: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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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가 저뭅니다땅거미가 지고초막마다 등을 밝히면먼 길 갔던 사람도 서둘러 들어설 것인데어찌할거나나는 등 밝힐 생각을 거두고망연히 창밖만 봅니다내 보고픈 사람도 그럴 것이어서말없이 술잔을 비웁니다마시고 남은 잔에 그리움 채워마지막 손을 흔들듯안녕-안녕-어둠의 이불깃을 당깁니다
아침을여는시
동양일보
2016.11.27 20: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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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 독경讀經에덩달아 익은 열매들 가랑잎 사이 곧추서는청설모 꼬리 향해몸 던지자 없다(무無다) 텅 빈 그 자리엔얼굴 수심 찬 동자승이쪼르르 안 보이던 길을 산문山門 밖에내다 걸고 있다
아침을여는시
동양일보
2016.11.24 20: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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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밤 밀물에 두 귀 쫑긋 씻어 놨더니어느 우주를 떠돌던 별이었을까아뜩하니 귀청에 박히는 섬광이여 비로소 부연 끝 풍경은 울어전생인 듯 전생인 듯 인연이라 했더니구르던 돌들도 아미蛾眉를 숙이는가 층층한 돌탑 따라 촛불 마저 밝히면억만 세월도 감로甘露에 명경明鏡이니뭇 바람 거세도 차마 못 흔들러라 사랑도 지극하면 종교가 되리하늘과 땅이 하나로 손잡는 지금, 임이여우리 또한 합장을 할 때러라
아침을여는시
동양일보
2016.11.23 20: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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깊은 산속으로눈멀고 귀멀어 혼자 물들어버린아득한 외길그대가 첩첩씨줄과 날줄 없는 깊이와 높이로 짠울림통으로 끼룩망망한 바다를 쏟아내면수만 마리의 물고기가 날아올라소름 돋는 진동저 울음비늘 가득한 하늘에폭풍의 무리 춤다채로운 무늬에 들어가일생에 단 한 번 잠들다 깨는첩첩 그리운 그대.
아침을여는시
동양일보
2016.11.22 20: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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힘들고 지칠 때 찾아갈 수 있는나만의 숲 하나 간직하고 있는 그 품 잴 수 없고그 깊이 가늠할 수 없는허물이 허물되지 않는 산 같은 사람 하나사람 같은 산 하나
아침을여는시
동양일보
2016.11.21 20: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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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꽃에 햇살을 가두고 있는강가에 한참을 서 있다이 강에 들리던 울음은 몇 번이나강바닥을 뒤집었는지 가늠할 수 없다한 줌의 시간을 조금씩 놓으며 바삭 꿈을풀어내는 음표에는 젖은 소리가 있어한참을 걸어왔다 모래알의 산란에는아직도 추억이 각이 나 있다곤충들은 이곳에 가벼운 무덤을 짓는다아직도 못다 한 노래가 있는지 모른다둥글게 굽어진 물길에가을의 이마에 상처가 깊다함부로 닿을 수 없음이 만든 흔적갈 수는 있는가 아무 대답이 없다가물가물 보이는 빌딩은 단추를 잠그고불을 밝힌다 내 마음의 여울에 싱싱한 젊음이 저만치 흘러가고 있다아무도 나에
아침을여는시
동양일보
2016.11.20 21: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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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복이 할아버지가 위태롭게 타고 가시는 자전거 뒷자리엔말갛게 벼린 낫과 숫돌이 고물줄에 댕댕 매여 반짝거렸다 저리 한 가지 생각으로 환하게 따라 붙는 바람은나보다도 먼저 있었을 것인데나는 늘 보면서도 낯이 설다 천천히 가는 길이 무섭더라빠른 길이야 목적이 없으면 헤매는 길이겠지만서도천천히 가는 길은틀림없이 가는 길일진대 논길 저 끝에점으로 서 있기가힘이 들텐데 △시집 ‘바람의 결에 바람으로 서서’ 등.
아침을여는시
동양일보
2016.11.17 19: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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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물어진 세월 깊숙이 품은지상의 큰 자궁이다 절집 몸체 걷어내며 멀찌감치 떨어져한 시대 무심히 해탈한 듯해도건넌 듯 아니 건넌 듯 엎드린 자리여기저기 웅크린 시간의 이끼 검푸르다 생강나무 사이로 낯익은 바람 굽이치고무성히 품어오며 우거진 세월풀잎 끝 돋을새김으로 휘어지며 앉는데달빛 서늘히 머금고 건너왔는가불룩한 석탑 훑고 가는 천년의 구름느릿느릿 비릿한 몸을 푼다 들러선 침묵의 두께 위로망초꽃 웃음소리 펄럭이고청띠신선나비 한 마리초록 경전 속으로 든다 △시집 ‘창 밖에 그가 있네’ 등.
아침을여는시
동양일보
2016.11.16 17: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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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둘러떠날수록 마음은숨가삐 되돌아와동구 느티나무에소고삐를 매다 어쩔 수 없더라일일변경선 넘나들며시계바늘 돌려대도생각은 마당귀에 서성이는 것을 알라스카 스카이라인도 아스라한빙운 속에서잠을 털며 오늘에사 그리운 이 가슴 데울불씨 사뤄호기있게 보내자는 뜻그대 알려는지 △시집 ‘유목민의 아침’ 등.
아침을여는시
동양일보
2016.11.15 17: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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끓다 막힌 가래에봄날 당신 기침 좀 그만하라고 믿을밖에, 별도리 없는처방전 들고약국 가던 그날부터잠시 걸터앉을 곳이문드러지는 몸의 거처인 줄나 알았으니 왜 가냐고, 갔다가 편치 않으면얼른 다시 돌아오라는눈인사는 하지 않았다 당신이 알약 꿀꺽 삼키는 소리에앓던 의심증내 병은 다 나았다 △시집 ‘쑥의 비밀’ 등.
아침을여는시
동양일보
2016.11.14 16: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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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인현 옛 지도에는동헌 옆에 나무가 하나 그려져 있다.방금 전, 내가 그려 넣은 것이다.100살도 더 먹었을 그 은행나무는복개된 망천골 옆에 혼자 남아옛 건물들을 먹어치운 낯선 풍경을 지켜본다.시멘트 벽돌 스레트 지붕 70년대 창고 모서리에 서서뿌리의 절반을 콘트리트 바닥에 묻혀 고문당하는대한제국의 마지막 유민이거나 충신.바로 옆의 동헌 자리에 들어선 교회 지붕 위로간신히 우듬지를 뻗어 올려보지만,첨탑의 십자가는 한참 더 높아서욍이 없는 하늘의 소식을 내려 받는다.광포한 쥐라기의 골짜기에서 건너와하 수상한 시절을 100년 넘게 지켜
아침을여는시
동양일보
2016.11.13 19: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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님 찾아 물길 3만리를 달려온 허황옥은처음 내린 가락국의 바닷가 언덕에서도착 선물로 바지를 벗어 주었다는데, 늦가을 비가 밤새 뿌리고 간 아침,겨울의 뜨락으로 내려선 단풍나무는치마를 벗어 바닥에 곱게 깔아놓았다. 알록달록 수놓은 황후의 비단치마를한 동안 황홀한 마음으로 매만지다가아득한 남쪽 하늘을 돌아다본다. 제왕이 아닌 내게 남은 일이란,치마를 다시 입혀주러 임자가 올 때까지담벼락에 기대 빗자루를 깨우지 않는 것뿐. △시집 ‘정신의 뼈’ 등.
아침을여는시
동양일보
2016.11.10 19: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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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철, 지나갔다하마 입동이 내일 모레다 요염함과 화사함도한때일 뿐 뽑거나 베어 버리는데 담장 구석진 곳때 늦은 장미 한 송이 그냥 놔두기로 한다 그날 저녁, 뒷방에 들어몰래 염색을 한다 △시집 ‘꽃 찾으러 간다’ 등.
아침을여는시
동양일보
2016.11.09 18: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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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귀나무에게 김은숙 사랑하지 않았다네 나는네게 다가서는 만큼 기억은 더 멀어져허공을 가르는 바람소리만바람소리 만큼만 남아 있거나 이해되는 시간폭죽처럼 솟구치는 허공의 네 얼굴이휘어지는 내 손가락 사이 위험하게 파고드네다가서지 않으려네 사랑을 모르는 나는돌아서는 맨발 아래에서 문득 들리는낯익은 음악소리 파고드는 저 낯익은 두려움온몸으로 퍼지기 전에 돌아서야 하네닿을 수 없는 마음이 중심을 통과하는 시간종일 캄캄하게 침묵으로닫힌 침묵의 마음으로 한여름을 봉쇄하네사랑하지 않았다네 나는흐느낌도 없이 △시집 ‘창밖에 그가 있네’ 등.
아침을여는시
동양일보
2016.11.08 19: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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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수유 꽃 우은정 먼 길을 걸어 온 탓도 있을 게야구도자의 남루한 옷을 걸치고햇볕보다 먼저가만히 떠날 길을 엿보는심해 같은 골목의 그 권태의 시간을 두르고학교 마당 같은 이야기 속에 담긴 웃음의 침묵 한 점을이제 막 하늘 속으로노랗게거품처럼게워내고 있는 암송을 보면 △시집 ‘청동기’ 등.
아침을여는시
동양일보
2016.11.07 17: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