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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은 구두 함기석 공원 벤치 밑에 구두 한 짝새처럼 잠들어 있다벤체 위엔 남자, 신문지를 덮고 잠든 둥근 둥지 죽은 걸까, 꿈꾸는 걸까검은 구두 속에서 하얀 물감 빛깔의 새벽이 흘러나와남자의 몸을 수의처럼 감싸고 바람이 불 때마다나무들 겨드랑이 사이로 샘물이 밀려와한 방울 한 방울 신문지에 떨어지고어린 꽃들이 단발머릴 흔들며 웃는다 누구의 입일까 저 검은 새구두 속에서 흰 말이 날아오르고밤사이 대기가 흘린 꿈이남자의 입술 끝에 투명한 핏방울로 맺혀 있다 △시집 ‘오렌지 기하학’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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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양일보
2016.11.06 18: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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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염을 앓은 딸아이가몇 날을 누에처럼 잠을 자고 일어나서 유기농 콩을 간다 일요일 오후에 몸 부서지는 소리가 아팠던 기억을 불러내고들판 바람이 툭 터진 공중 창문으로 지나다닌 흔적처럼기억이 흘러간다 콩 몸을 품고 나가는 바람을 안다미열처럼 와서 침대 곁에서 마문 흔적이낮과 밤의 공중에 새겨져 있다 처음엔 요란한 기계소리였으나콩 알갱이마다 몰락하는 임계점에서 터져 나오는 소리가웅크린 몸을 잔뜩 끌어당겼다가 바르게 펴는 숨소리였다. △시집 ‘불빛을 말하다’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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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양일보
2016.11.03 17: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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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꽃 박윤배 아랫배에 아이를 잉태한 한 여인출산이 다가오자젖가슴 푸른 힘줄 생겨나듯돌담 타고 오른 넝쿨이 번성하더니마디마디 서리 내리기 직전의 배꼽에꽃이던 시절을 지우고 있다. 자꾸 꽃을 피우는 흰 수줍음치아가 흰 그녀와 한 살림 차리고 싶은 저녁떨어뜨린 잎을 주워 모아 요를 깔고듬성듬성 한 자락 구름을 끌어 덮고올 가을 저녁에는 옥수수를 함께 삶으며굴뚝연기로 타오르는돌담의 마을에 가고 싶다. 땅은 얼어가고 성급함이 피워낸 온기일지라도여름내 감춰온 연한 속살의 그녀가 낳은갓난아이를 안아 보고 싶다. △시집 ‘쑥의 비밀’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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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양일보
2016.11.02 18: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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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밀 김민형 바다 쪽에서 차가 뒤집혔을 때난간 끝에 가까스로 매달린 사연으로도그만하면 꿈 잘 꾼 줄 알라는 위로는복권당첨만큼이나 어려운 일이었다비밀에 부치자는 속셈이었는데사람들이 내륙 쪽에서 전화를 했다부쩍 파도가 치거나 갈매기가 나는안부라도 묻겠다는 것이었다보거나 듣지는 못해도알 만한 영문이라는 듯살아있다는 이 비밀과 놀라움을서로 느끼자는 눈치였다현장을 수습한 나이 어린 동료가망가진 차야 망치로도 고친다며소주 한 잔으로 웃으며 풀자고 한청심환 삼은 첫 잔이 늦도록 이어졌다 △시집 ‘길 위에서 묻는 길’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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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11.01 16: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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늦가을 오후 장문석 상가喪家에서 구두가 뒤바뀌었다그것을 사흘 만에야 알았다 높은 굽에다 모양과 크기도 엇비슷했다심지어 뒤축 바깥이 삐딱하게 닳은 것도 닮았다 누군가 나처럼 키 작고 발 작은세상을 삐딱하게 걸어온 사람이 있었나 보다 그를 위해 술을 한 잔 더 부어 놓고혹시나, 연락을 기다리는 늦가을 오후 △시집 ‘꽃 찾으러 간다’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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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10.31 17: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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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길에 서서 -치매행致梅行·21 홍해리 걸어서 갈 수 없어 아름다운 길눈부터 취해 가슴까지 흔들리고 있었습니다 멀리멀리 돌아서도 갈 수 없는 길안개 속으로 구름 속으로 헤매고 있었습니다 눈으로 입술로 가슴으로도 못 가는 길가까워도 멀기만 해 어둠 속 둥둥 떠 있었습니다 내 생生의 이물과 고물 사이 가지 못할 길 위로그리움은 다리를 절며 돌아가고 있습니다 아내가 가는 길은 가지 말아야 할 길그 길을 아내가 홀로 가고 있습니다. △시집 ‘치매행’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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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10.30 18: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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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심천 권희돈 가만히 들리는 하늘 눈썹입가에 벙그는 금빛 미소 물안 저수지에선가 무너미 고개에서꽃다리를 지나 까치내까지계절은 시궁쥐마냥 달아나고인심은 밀랍같이 굳어가는데 가시는 님이여가시는 님이여 상수리나무 언덕 너머로밤마다 가시는 달님처럼무심히만 가시는 님이여 △시집 ‘하늘 눈썹’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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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10.27 17: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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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밥 한 올 박천호 아침 출근길후즐근한 양복 따라 온자그마한 실밥 한 올그럴듯한 족보나든든한 배경도 없는미천한 발자국 따라 온이 놈의 속셈은 무엇일까단추 구멍 감싼 인연에올올이 새긴 미련쯤이야툭 털어 뿌리칠 만도 한데내저을수록 칭칭 조여 오는실밥 한 올의 굴레보잘것없는 내게무슨 미련이라도 남은 것일까매끈한 온기로 부르던 노래는이미 식은 지 오래인데 △시집 ‘강아지풀을 뜯으며’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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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10.26 18: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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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 안미현 어쩌자고하나씩 다 벗어버리는 거니그래도 주요 부위는 가려야 하지 않을까벙어리 장갑이라도 좀 끼워 줄까손가락이 얼면 손톱 같은 새순이 안 나오잖니여우털 귀마개도 하나 해야지야들야들한 귀숨으로땅 속 봄이 물 짚는 소리제일 먼저 들어야 하지 않겠니 이리 둘둘 말고도 옆구리가 시린 늦가을한 점 한 점 비늘을 털어내는 은행나무목 깊은 노란 장화를 신고겨울로 가는 순례를 시작하는너의 누드가 예술이다 △‘새로운 감성과 지성’ 동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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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10.25 13: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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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사랑 우은정 찔레순 꺾어 오물거리다가그 서늘한 뒤꼍 그늘 맛에 놀라눈 동그랗게 뜨자드디어는 떫은 맛으로혓바닥에 감겨드는 촉감이 그래 네 맛도 내 맛도 모르는그 긴 호젓한 햇살에구름구름 넘기면서 진종일을 바라보던 고갯마루그렇게 천천히 걸어서어디론가 점으로 사라진 기억이 있긴 있지 그게안을 수 없는 그림자였지 아마 △시집 ‘바람의 결에 바람으로 서서’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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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양일보
2016.10.24 14: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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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난 정민 삼십 년 넘게 가난한 집에서 뒹굴며가난을 밟아보기도 하고가난을 주물러보기도 하고가난을 씹어보기도 하고가난을 욕하기도 하고생각하다 지쳐서도망치기도 했다. 서른도 한참 넘긴 어느 즈음에사알사알 차오르더니손님처럼 애인처럼가난이 왔다. 가난하게 살아도 좋겠다가난하게 살아도 즐겁겠다어떻게 하면 가난하게 살까가난이 발에서 손에서 입에서 머리에서싹을 내밀고 옹알이한다.삼십 년 넘게 가난한 집에서 뒹굴며가난을 밟아보기도 하고가난을 주물러보기도 하고가난을 씹어보기도 하고가난을 욕하기도 하고생각하다 지쳐서도망치기도 했다. 서른도 한참 넘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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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양일보
2016.10.23 18: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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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위 정진명 어떤 정신의 잇몸이 박혀있기에저리도 단단하나?개울 복판에 돋은 바위부리 하나. 밀려드는 홍수의 하복부에 칼을 들이밀어미처 거둬가지 못한 내장을 붕대처럼 꿰어 걸고한층 낮아진 물 위로 고개를 내민다. 물살이 바닥을 파헤칠수록점점 더 넓고 크게 드러나는 부리. 시간의 물살이 거칠고 거세게 충혈될수록감춰진 몸통을 더더욱 드러내며, 천 년 뒤마침내 물길마저 바꿔놓으리라. 바위가 말을 한다.흐르는 물소리를 숨결 삼아어떤 우람한 정신이 입을 연다. △시집 ‘정신의 뼈’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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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10.20 12: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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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르 강에서 조철호 아무르 강이 비를 맞고 있다구만리 장천 떠돌던 혼백들과 눈물 마른 새들만석양을 비껴가고절룩이며 절룩이며 왼종일 족쇄를 끌어도길은 끝나지 않았다 하바로프스크-아무렇지도 않게 인간을 버리던 곳언제나 축축한 이 도시 한 켠에조선 사내들의 한숨 따라아무르 강이 비를 맞고 있다혁명가의 아내처럼맨살로 비를 맞고 있다 누구를 기다리는가유언도 없이 운명한 쓸쓸한 주검도5월이면 풀꽃 하나 피우려는데시베리아 설한풍만 강가를 서성일 뿐아무도 찾아오지 않을 것을 강물은 알아아무르 강-오늘도 일삼아 비를 맞고 있다발목잡힌 길손의 가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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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양일보
2016.10.19 19: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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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월 포석抱石 생각에 조철호 눈물 마른 자리마다꽃이 피었구나망초 꽃밭시베리아에도 너희들이 있었구나 황토는 차라리 살겨웠거니발은 땅에 있으나 망연함 하늘에 닿아돌아올 길 찾을 수 없었으리 수런수런피 절은 흐느낌에 노을이 지고육신은 사위어 강바람에 떠는데귓전을 치고 오는 저 함성 -조선의 만세소리-조선인의 만세소리 △시집 ‘유목민의 아침’ 등
아침을여는시
동양일보
2016.10.18 19: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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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니 장문석 도토리도 주울 만큼 주웠고꾀꼬리 노래도 들을 만큼 들었고민들레 쓴 즙도 맛볼 만큼 맛보았는데 저무는 고갯길, 그 마지막 굽이에은밀히 매복해 있던! 단칼에 베어 버리라 하는데자칫 화원을 망칠 수도 있으니단숨에 짓치고 들어가아예 뿌리째 뽑아 버리라 하는데 못 들은 척 뒤꼍으로 간다간만에 찌릿, 뼛속까지 찔러오는달콤한 이 통증, 장독대에 앉아양귀비 짓찧어 이마에 붙인다 나, 조금만 더 아파하면 안 되겠니? △시집 ‘아주 오래된 흔적’등.
아침을여는시
동양일보
2016.10.17 16: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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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지반해一指半解 김영범 아파트 관리실 옆으로 자목련 한 그루 서 있었어요.처음 이사 올 때만해도 앙상한 가지 빛바랜 담처럼 서 있더니짙은 황사 지나고 비 몇 번 내린 뒤 꽃망울 하나 둘 올라오기 시작했어요.꽃망울 점점 커져 아기 머리통 만하게 됐는데무심히 봄이 왔구나 생각했지요.봄이 오면 꽃 피는 것은 인지상정 아닌가요.어느 밤 베란다 창을 열고 내려다보는데자목련 연등, 하늘 향해 합장하고 있는 거예요.희디흰 속살로 배설하기에만 급급한 작은 구멍들을 환희 비추고 있는 거예요.연꽃을 닮아 목련이 되었다지만내 있는 곳이연화대좌인 줄 모
아침을여는시
동양일보
2016.10.16 18: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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색색의 사람들을 한차 풀어다 놓고졸고 있는 관광버스와 고즈넉한 잠에서 깨어놀란 눈을 끈 산사의 부처와 깍아지른 암벽에 기대제 옆구리 적시는 나무들이 산더미 같은번뇌의 사람들 구경에등허리가 다 닳은 능선들빨간 소독약 발라주는 단풍철
아침을여는시
동양일보
2016.10.13 20: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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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석抱石이 남긴 빛 이상범 툭 하는 밤 아람 소리 기별이고하늘이 날 버릴 양이면을 달라시던이 땅의 눈부신 빛 뒤로어두움 속 감긴 눈.나라, 민족, 고향 사랑사람과 문학의 질긴 사랑침 발라 장 넘기는 필적향과 빛의 보석 같아그 빛이 서른 개 보석이라면빛을 본건 여남은 개. △시집 ‘시가 이 지상에 남아’ 등 다수.
아침을여는시
동양일보
2016.10.12 18: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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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가 쓰고 싶은 저녁 김종우 설거지 하는 주방 창문에 어린산속 암자의 불빛아. 미. 타. 불. 반짝인다.어디에서 와서 어디로 가는 말씀이냐고시가 쓰고 싶어지는 저녁밥 한 그릇 씩 잘 모신 식구들이오이 향내 가득한 밥상을 물린 시간산사엔,바구도 저녁 공양을 마치고면벽수행에 들었을라나 달. 그. 락. 달. 그. 락.멀고 먼 밥의 길에 발목을 묻고 있는 내가저문 밥의 말씀을 말갛게 헹구고 있다.밥에 대고 절하다 무릎이 닳아버린 시가통풍을 앓는 저녁밥그릇 잘 씻어 덮어놓고 오늘은산속의 그대 쪽으로 맑은 등 하나 걸어봐야지. △‘풍경’ 동인
아침을여는시
동양일보
2016.10.11 19: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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징그러운, 안녕 안미현 버린다.꽁꽁 싸매 이사를 몇 번 하도록셀 수 없이 많은 봄이 왔다 가도록시들지 않도록, 썩지 않도록냉장에 넣었다냉동에 넣었다, 했던곰팡이 핀 가루를 버린다. 몇 겹씩 싸여진 그것이무엇의 가루인지 알지 못한다.다만, 징그럽다는 것징글징글해서한 톨 미련마저 없어진 내 눈물의 가루였건목마른 영혼의 가루였건덧없는 시간의 가루였건 이젠안녕이다. △월간 ‘문학세계’ 시 천료.
아침을여는시
동양일보
2016.10.10 19:0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