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몰운대에 앉아 김병기 서풍으로 불겠소여름은 남에 있고지금은 노을도익는 저녁 바람이 불면맑은 눈빛을 내주고밥알 같은 아이를 낳겠소 한철의 슬픈 낙태는사랑을 응고시켰지만이젠 가을이잖소 익지 못한 씨앗은마른침에 불과하오차라리 갈바람으로활짝 마음을 열겠소 △시집 ‘꽃따기’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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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양일보
2016.10.09 18: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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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류장 김민형 지나간 차를 잡기 위해나는 오래도록 길 위에 서 있었다간발, 그 사이로 차들이 지나쳤지만타야 할 차는 오지 않았다 길가에는 작은 감들이 가지마다 가득했다문득 나는 이미 커버린 감과감이 매달린 가지를 생각했다반쯤 떨구어내지 않으면,생각이 종점에 이르는 동안미련의 한 가지가 찢어지고 있었다 매미가 길게 울다 그친늦여름 아침 한순간에감나무 그늘이 좁아졌다 △시집 ‘길 위에서 묻는 길’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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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양일보
2016.10.06 19: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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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의 진화 박윤배 목이 가는 꽃은 눈으로 보거나만지는 것이 아니라 했던가 달팽이관이 불안정해진 남자에게흔들림은 독毒눈과 손이 아닌 귀로, 혀로 아는 것이다목이 가냘프다 해서 심성까지 여릴 거라는지난날 내 생각은 여지없이 빗나갔다오히려 목이 가는 꽃이 바람을 흔든다는 것을중심 잃고서야 알았다 그러나 안다 해서진화 멈춘 내가 어찌 다 알 것인가오랜 오욕의 세월에 꽃은너무 빨리 흔들림에 익숙해졌다 △시집 ‘쑥의 비밀’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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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양일보
2016.10.05 19: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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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행접시 14 정진명 한 시간을 대화해도말귀를 못 알아듣는 사람이 있다.그는 외계의 언어에 감염된 사람이다.자신도 모르는 사이 비행접시에 끌려가광센서 칼로 수술을 받은 사람이다.같은 말을 쓰고 있지만, 형질이 변하여그의 입에서 나오는 말은 전혀 다른 빛깔을 띤다.그의 두개골 깊숙이 자리 잡은 비행접시를 깨지 않으면말은 하루 종일 통하지 않는다.올빼미가 대낮에 사물을 분간하지 못하듯멀쩡한 이목구비와 손발을 지녔으면서도말귀를 전혀 못 알아듣는 사람이 있다.제 안의 빛에만 쪼여 멍해진 채,언어 밖의 날벼락이 아니고는좀처럼 깨어나지 못하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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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양일보
2016.10.04 18: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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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 우은정 심심한 가운데 나를 놓고 보기가그게 어디 그렇게 쉽디? 만나는 사람마다말이 없어 덤덤하게힐끗 보는 게 전부야 길을 물어도 눈앞의 대답만 구구절절인데정작은길을 몰라길을 묻는데속수무책으로 자꾸만 어디서 왔냐고 묻는 말이뜬금도 없어 손가락질만 움켜쥐고 있는저편만 바라볼 수밖에 △시집 ‘바람의 결에 바람으로 서서’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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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양일보
2016.10.03 17: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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폐광 한상남 드릴 수 있는 건다 드렸습니다내게서 채굴한 시간들을하룻밤 꿈으로 여기시든평생의 빚으로 묶어 두시든당신 마음대로 하시고더는 들여다보지 마세요드릴 것 없고채울 길은 더욱 없는폐광으로 남겠습니다 △시집 ‘눈물의 혼’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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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양일보
2016.09.29 19: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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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님전 상서 김효동 가득한 상념 끌어안고살아온 한 많은 세월거친 풍랑 헤쳐여백 메우는 그림자여살포시 당신 다가오네 닳고 찢기운 검정 고무신수많은 애절한 사연흰 머리 지금 어디쯤에서그리움 간직한 사랑이여오래도록 품 속 깊이 간직하리 △시집 ‘은가락지 별곡’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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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양일보
2016.09.28 17: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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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설 홍해리 너 없이는 한 시도 못 살 줄 알았는데이렇게 멀쩡하게 살아 있다니찔레꽃 피우지 말아라내 생각도 하지 말거라네 하얀 꽃잎 상복 같아서내 가는 길 눈물 젖는다한갓된 세상 모든 것있는 대로 그냥 내버려 두어라아픔도 때로는 얼마나 아름다우랴발자국 남기지 말고 가거라먼 길 갈 때는 빈손이 좋다텅 빈 자리 채우는 게 삶이다한때는 짧아서 아름다운 법이란다. △시집 ‘바람도 구멍이 있어야 운다’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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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양일보
2016.09.27 17: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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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산하다 유영삼 눈, 핏발서게 불경을 외지 않고서야어찌, 산경을 태우고그 딱딱한 물을 녹였다는 용광로 같은동백의 그 붉디 붉다는 눈을 볼 수 있으랴진즉에 내 눈을 읽은 동백이 눈을 감고 있으니먼 바다만 바라볼 뿐바다마저 바다 밖의 바다사람들은 동백의 눈을 보지 못한 앙갚음으로향일암 경전을 듣고 또 들어 속까지 비워내순해진 바다 가슴에 손을 집어넣어장기 하나씩 꺼내 포를 떠 씹고 또 씹었으니눈 꼭 감고 절을 내려올 수밖에 바닷가에 바리케이트를 치고 있다, 동백나무 △시집 ‘돌아보다’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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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양일보
2016.09.26 18: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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는개 조철호 만날 약속 없이 떠났으나보고 싶어 하더라는 바람결 소문 같은 떠남과 반김의 야릇한 심사 가리고바르르 떨리는 입술도 감출 수 있는 면사포 같은 가까이 있어도 멀고멀리 있어도 늘 가슴 채우는 그대 같은 보일 것도 같고보면 아니되는 가슴 속살 같은 한 눈 팔다 놓친그 깊은 눈빛 같은 *는개 : 안개보다 조금 굵고 이슬비보다 조금 가는 비. △시집 ‘유목민의 아침’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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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양일보
2016.09.25 19: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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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밤 이무원 눈 속에서도 잘 참고비, 바람 속에서도 꿋꿋이 견디었으니순하구나 때를 알아아무런 조건 없이 뚝 떨어지니자연스럽구나 속이 꽉 차 단단하고색깔 또한 윤기가 도니보기 좋구나 사람들이 네 몸으로 배를 채워도아무 불평이 없으니비웠구나 △시집 ‘물에 젖는 하늘’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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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양일보
2016.09.22 19: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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벽화壁畵 장문석벽 속의 나무들은오늘도 변함이 없다 처음의그 푸르고 싱그러운 자태를조금도 흩트리지 않는다나무와 나무 사이를 잇고 있는눈 맑은 바람, 숲을 이루어뭇 생명을 부른다 다람쥐를 부르고도라지꽃을 부르고 아, 거기에새도 불렀던가 우듬지 끝파랑새 한 마리하늘 향해 두 눈빛 골똘하다 여전히물은 골골을 돌아 하얀 윗니를 드러내고이만큼 아래쪽에선 물레방아가초록의 햇살을 돌리고 있다 언제부터였던가 사람들이저 숲속에서 사라진 것은 △시집 ‘꽃 찾으러 간다’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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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양일보
2016.09.21 17: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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홀로 앉아 계시는 그분에겐몇천 년이 지나도 바뀌지 않는 버릇이 있으시다공들여 그린, ‘삼천리 금수강산’이라 이름 붙인 초대형 채색화수틀리면 화투판 엎는 인간들처럼겨울 되면 흰 물감 팍 엎어 덮어버리고봄 되면 또 다시 붓을 들어변함없는 순서로 색칠하시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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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양일보
2016.09.20 21: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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섬진강에서 박천호 그대에게속 붉은 울음 내보이고섬진강 물살에 몸 던졌습니다. 목 쉰 산꿩이흐릿한 산자락 베어 물면알몸으로 강물따라 흘렀습니다. 돌아올 수도돌아갈 수도 없는 목메임에하염없이 산수유꽃 흩날리는데 그대에게그리움으로 멍든 속 내보이고섬진강 팔 십리 포구 내달았습니다. △시집 ‘아내와 컴퓨터’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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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양일보
2016.09.19 17: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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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향에 김초혜 열여섯 살 적 얼굴을 하고불혹에 만나러 가는청주의 고샅길에 서리 묻은 옷을 벗어 놓고보리밭 자락을 뒤집어 쓰고주마를 묶어 놓고떠나보는 전조前兆 저승도 불러내어어머니 소식도 물어 보고맨드라미도 찾아내어여학교 적 동무 주름살도 잊어보고사직동 길가 돌멩이에 새겨진서툰 사랑도 선연히 아파 오고희망만 빼 놓고는그대로 숨어 있는 얘깃거리가실타래로 풀려 감기는 곳 골목엔 눈물의 고압선이 걸려 있고나는 바래지지 않은 목청으로부재를 찾아소녀가 된다. △시집 ‘사랑굿’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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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양일보
2016.09.12 17: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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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암 약수터에서 전태익 일찍이 성글은 꿈석간수를 솟게 하여 가지 사이 운무를말없이 흐르게 하고 솔바람 푸른 달밤에산새들을 재운 당신 첫 새벽 지성으로마디마디 배인 혈연 밤마다 영수靈水로 젖는암벽은 생즙을 짜서 산색山色은 마음문 열어저리 불이 붙었다. △시조집 ‘학이여, 학산에는’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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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양일보
2016.09.11 18: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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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린 꽃시절이 없었어야니 할베 얼굴도 쳐다보지 못했으닝께 장독대 옆에서잘 익은 무화과를 따는 날 할머니보드랍고 달짝지근한 과즙을 오물오물 삼키신다 … 그래도 아들 딸 낳고 해로 했으닝께 회혼례 잔칫상도 안 받었냐이 존 세상 너그들은 제발 구순하게 살어라잉 몇 번째인지 모를 할머니 이야기를 듣는다 열매 속에속 꽃 피운 무화과 인생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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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양일보
2016.09.08 20: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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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채 홍해리 한평생바람만 피웠다. 여름내 무더위에몸뚱어리 흔들다 쌓다. 살은 다 찢겨나가고뼈만 남아, 초라한 몰골,아궁일 바라보고 있다. △시집 ‘금강초롱’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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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양일보
2016.09.07 2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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팔월, 하고 싶은 류정환 팔월 산에 드니매미들, 죽겠다고 아우성을 친다.우화한 지 벌써 사나흘남은 소리가 얼마 남지 않았다고다시 침묵의 세월이 닥친다고저 수컷들, 몸이 달아 소리소리 지른다. 여름 숲에 들면 나도무작정 하고 싶다.긴긴 여름날을 지칠 줄 모르고몸으로 팰생의 연서戀書를 써 날리는 매미들. 내게 남은 날은 얼마인가생각이 많을수록 바튼 숨을 다스리기 어려워현기증 나는 몸이라도 일으켜무작정, 무작정 하고 싶다. △시집 ‘검은 밥에 관한 고백’ 등.
아침을여는시
동양일보
2016.09.06 17: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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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허 유기흥 라면을 먹다가 손을 데었다.울고 싶었다.하지만 어른이라는 생각에 울지 않았다.어른도 울고 싶은 때가 있는데울지 않아 아프지 않은 것은 아닌데아픔을 이야기 하려면 울어야 하는데차창 밖 풍경처럼 잊히고 지내는 것이 많다.아픔도 잊고, 슬픔도 잊고, 사랑도 잊고,어른이 우는 그것이 이상하게 보이는그런 것들이 오늘은 싫다. △시집 ‘입춘’ 등.
아침을여는시
동양일보
2016.09.05 17: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