염화미소 박재분 미타사 방죽에 갔더니수많은 가섭이 일제히 수문水門을 열고연꽃 들고 서 있는 거예요 삶이 자꾸 무거운 쪽으로만 기울어세상을 등지고 싶었다 해도어찌 그 환한 미소를 외면할 수 있겠어요 마음을 비우면 비로소가벼워진다는 말 떠올리며희미하게나마 미소로 화답 했지요 △시집 ‘즐거운 수다’ 등.
능소화 이무원 살색이 너무 짙으니가까이 가면 물들겠다 돌아보지 마라이미 담을 넘은 것이아랫도리를 벗고 있으니혼절한다 해도네 탓도 아니지만내 탓도 아니다 아곱긴 곱다 △시집 ‘서하일기’ 등.
폐광 한상남 드릴 수 있는 건다 드렸습니다내게서 채굴한 시간들을하룻밤 꿈으로 여기시든평생의 빚으로 묶어 두시든당신 마음대로 하시고더는 들여다보지 마세요드릴 것 없고채울 길은 더욱 없는폐광으로 남겠습니다 △시집 ‘눈물의 혼’ 등.
벌초 신영순 다녀 온 지 꽤 오래 마음 끝 여유를 잘라그대에게 가는 길 떼쓰듯다북쑥 망촛대 억새풀몇 무더기씩 올려 뭉개고 있어 뻐꾸기 울음 한 폭 끊어놓고햇살 날 세워 깎다보면 손끝 떨리게 일어나는회한 △시집 ‘달을 품다’ 등.
수선화 지는 날임성구 참말을 잃어버린 짧은 거짓 고백에가슴팍에 폭 안긴 수선화 달빛 얼굴몇 며칠 마음자리가 사포처럼 거칠다 공갈빵 먹은 듯이 헛배 자꾸 불러서어떤 난타에도 멈추지 않는 딸꾹질첫 봄을 차에 태워 보낸다바람이 참, 먹먹하다 △시집 ‘살구나무죽비’ 등.
우린 한때 강을 사이에 두고 김진영 우리가 등푸른 물고기로 만나홍보석빛 아침 강을 거슬러 오를 수 있다면 가슴에 돌을 키우듯 참으로 아팠던 삶의 응어리하류로 하류로 흘리우고 수초 사이 솜사탕 같은 구름장을 띄워 보거나저문 강에 몸을 누이는 미루나무 가지 끝에초저녁 별 하나 매달아 볼 것을 우리가 아침 강을 여는 등푸른 물고기라면지느러미 끝에 묻어나는 햇살처럼반짝이는 세상 하나 만들 수 있을 것을 △시집 ‘아무 생각 없이’ 등.
그리움 유영삼 염증이다치유해도 다시 덧나는근 박힌 종기종기 속에 그가 있다옛님 내 속에서 곪고 있다온몸에 근으로 박힌다 △시집 ‘흙’ 등.
아내 - 치매행致梅行·14 홍해리 눈을 감아야 보입니다. 눈을 뜨면보이지 않습니다. 한평생 살았다고 보이겠습니까? 눈 감아야, 비로소아내가 보입니다. △시집 ‘금강초롱’ 등.
어떤 시집함기석 첫 장을 열면광활한 설원이 보이고글자들은 모두 검은 새가 되어 날아간다 하늘엔 무늬 잃은 기린의 눈빛으로나를 보는 낮달지상엔 무더운 눈보라 끝 장을 덮으면끝없는 우주가 보이고글자들은 모두 유성이 되어 어둠 속으로 날아간다 △시집 ‘오렌지 기하학’ 등.
연잎 사랑 김효동 이렇게 신비한 만남이물방울은 연잎을 적시지 않으며연잎은 물방울을 깨뜨리지 않는다 진주알 닮은 연잎의 물방울스며들지도 흐트러지지도제 모습 잃지 않고 바라보는 눈길물방울 품어 안은 연잎의 사랑 서로의 마음에 변화의 시작을율법을 완성시키는 사랑나는 누구의 물방울인가나의 연잎은 지금 어디에 있을까 △시집 ‘눈 뜨고 있으면서’ 등.
가만히 들리는 하늘 눈썹입가에 벙그는 금빛 미소 물안 저수지에선가 무너미 고개에서꽃다리를 지나 까치내까지계절은 시궁쥐마냥 달아나고인심은 밀랍같이 굳어가는데 가시는 님이여가시는 님이여 상수리나무 언덕 너머로밤마다 가시는 달님처럼무심히만 가시는 님이여 △시집 ‘하늘눈썹’ 등.
밤 낮 없는탕아의 오색 잡꿈 문득 고향 그리워구두끈을 매는 쇠뜨기 으아리 모란풀 개버무리 노루귀미나리아재비 늪바구지꿩의다리 돌쩌귀 구름꽃다지 바위괭이눈 마름 털이슬… 잊을 수는 없는만학도의 밑줄 친 낱말 △시집 ‘다시 바람의 집’ 등.
달도 더웠을 것이다오랜 더위에 지쳤을 것이다여러 날열대야로 잠 못 이루고 뒤척이는 달을보았다는 사람들이 많았다오늘은 더 이상 못 참겠는지남이 보거나 말거나속옷마저 훌훌 벗어던지고호수에 들어앉아 있는희고 풍만한, 알몸의 달을보았다 △시집 ‘그 방에는 바다가 산다’ 등.
싱싱한 연놈들 떼 지어 지나갔겠다소나기 한 번 시원하게 쏟아졌겠다천둥 번개 골짝마다 짜릿짜릿 넘쳐 흘렀겠다그러고서야 어디 온전할 리 있겠는가곳곳마다 애 배는 소리 울창 하겠다△시집 ‘꽃 찾으러 간다’ 등.
산까치둥지처럼덩그마한 보살사 쇠복소리여울과어우러 울음일제 수련은속세를 털고노을로 물이 든다.
사랑하는 사람이 혼자 떠나려 하거든둘이서 남몰래 처음 만났을 때처럼튀는 눈빛과 설레이는 가슴으로 붙잡아라사랑하는 사람 떠나보내본 이는 안다사랑이 떠난 세상 얼마나 차고 쓸쓸한지를 사랑하는 사람 남겨놓고 혼자 떠나고 싶거든그 때 어둠이 고양이 걸음으로 다가오던 저녁향기로운 술잔에 닿던 입술의 촉감을 기억하라사랑하는 사람 남겨두고 떠나본 이는 안다사랑을 두고 떠나는 길 얼마나 외롭고 헛헛한지를
스치자오래 묵었던 시간의 냄새가 따라붙었다예닐곱 어린 날무거운 외투 안쪽 주머니 속에서주섬주섬 만났던 하얀 덩어리어딘가 숨기고단맛이 그리운 마음을 한 순간에 끌고 갔다덥석 입안에 넣고갈급했던 허전함을 달랬던 혀뿌리구역질나도록 얼얼했던좀 먹어 해진 품속을 헤적이던 사람썩지 않는 바람이 등 뒤에서 질리도록 치근대었다마구 쏟아내며 막지 못한 후회인 듯훼훼
나, 가진 것 없어바람 부는 대로 돌아가려네바람에 초려되는 풀잎의 입술처럼내 해진 옷가지 사이로너풀거리며 세상이 딸려오고 있네슬픔은 넋두리처럼하얀 아카시아 꽃잎으로 지고처연하게 울려오는 내 마음 속 장송곡그래 우리도 언젠가는 저 바람처럼아무런 흔적도 없이 자취를 감추거늘 △시집 ‘혼자 굴러도 좋아라’ 등.
고향의 이름을 저마다앞자락에 하나씩 달고막차는 떠났다 어디로 갈 것인가해 뜨던 쪽 하늘부터어둠은 오는데 백일홍 불빛을 창가로 흘리며다소곳이 앉아 있는 집들이옹기종기 어릴적 고향집 같다 비록 내게는 짧았으나나도 아늑한 불빛을 창밖에 내걸며따스하게 살고 싶던 시절이 있었다 막차 떠나고 난 저녁△시집 ‘접시꽃 당신’ 등.
노자가 알려주는 물의 길이다영혼과 영혼의 기다림을 절반씩 합친 항아리완만한 곡선이 나를 견딜 수 있게 한다마음의 불가마 속에서 더 뜨겁게활활 타던 격정들저 노심초사의 슬픈 무늬들미욱함과 단단함,이제 직선으로 치달아도 어긋남이 아니다다 저문 시간, 나 세상 밖으로 나와어떤 고통은 쇠북소리 내며 얼룩덜룩무늬로 새겨, 떫고 아린 진액몸에 장식처럼 바르고 다니라신다살아 숨쉬는 항아리, 자연으로 거듭나라신다 △시집 ‘첩첩단풍 속’ 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