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대 보내고 나서사랑 따윈 다시 하지 않으리라어금니 질끈 깨물었어요. 그대 보내고 나서억장 무너지는 일 없으리라가슴에 못질도 했어요. 하지만 이걸 어떡하나요.겨드랑이 사이 피어오르는그리움 어쩔 수 없네요. 참으로 알 수 없네요그대 아닌 다른 사람 앞에서내가 이토록 웃을 수 있다니요. △시집 ‘이별 없는 이별’ 등.
달도 더웠을 것이다오랜 더위에 지쳤을 것이다여러 날열대야로 잠 못 이루고 뒤척이는 달을보았다는 사람들이 많았다오늘은 더 이상 못 참겠는지남이 보거나 말거나속옷마저 훌훌 벗어던지고호수에 들어앉아 있는희고 풍만한, 알몸의 달을보았다
산동네 돌담길 따라가다꽃보다 먼저 사랑을 꿈꾸었으리뒤척이는 몸 일렁일 때마다사립문 금줄을 타고 달빛에 젖었으리옛날도 그 옛날도 그러했으리 해와 달 바뀌고 별이 바뀌었어도애기똥풀, 노오란 꽃△시집 ‘꽃은 아무말도 하지 않았다’등
천상天上에 오르는길 양편은온통 황홀한 꽃밭이겠다 파아란 하늘흰 조각구름 두어 점 내 나라의봄 또는 가을바람그 맑은 기운도 가득하겠다 천의天衣를 끄는 선녀들이랑그리운 이들모두 모여웃음으로만 맞는 일상日常 △시집 ‘유목민의 아침’등
까마귀는여러 말을 가졌습니다산에 든 사람을 놀려먹는 듯걸걸하니 좌중을웃고 울리는 전기수처럼,‘연애소설 읽는 노인’의 저자 세풀베다나‘책 읽어주는 여자’의 주인공 바리 꽁스땅스처럼,재미삼아 따라 하다 보면 그것이 영락없는 산지기의 말로산에 든 이들을다 고해바치는 것인 줄 모르고
붉은 장미가 담장을 에워싸고 있다횃불 하나씩 들고 성벽을 치고 있다가시를 품은 물방울의 가슴이 아리게 투영하다저 부드러운 향기를 넘기엔 사랑은 아직 부족하다 바람은 엉겅퀴 꽃대를 흔들고클로버잎을 들추고 지나갔다나비의 날갯짓에 장미냄새가 반짝거렸다구름 속에도 정원이 있는지향기는 하늘 깊이 뿌리를 내렸다 소매 사이로 매미 소리가 파고들었다꽃 진 이팝나무가 바람 소리를 내며 가지를 낮추었다비둘기가 하늘로 솟아오르자허공이 파문을 내며 아득히 멀어져 갔다 정물이 된 시간이 조각조각 흩어졌다
속을 비우고마디마디 땀으로 숨어뿌리를 뻗으며세상이 궁금하여 어제의 힘으로하늘로 머리를 든다흔들릴지라도 부러지지 않는곧은 절개의 사시사철 푸르름으로미워하지도 않고 원망도 않는마음을 비운 이웃끼리 옹기종기 모여서로의 살을 부비며사랑으로 트이는 시원한 맑음으로사그락 사그락 살아가는 오늘이 있어푸른 숲에서 행복의 해돋이를 본다.
꽃나무 옆에 쓰지 않은하얀 굽 사발을 소복하게 두셨다 수국 꽃 보면고봉밥 같다 하시던 시어머니 짧은 인연만 남겨놓고 바람처럼 떠나셨다 가끔수국 꽃모종을 손바닥만 한화담에 심어 보지만불효의 마음인지번번히 키워내지 못하고잔걱정만 손등에 머문다 오늘 담장 밑에서 싹이 돋는 수국 꽃 어머니의 아름다운 삶의 향기가말씀처럼 번진다
울어도 웃어도 자연스럽게높은 가지에서 고달파 흔들려도낮은 그늘에서 답답히 비비대도바람 타고 그저 흔들릴 뿐피곤하지 않다는 듯호불호 따위 없다는 듯탓하지 않아, 그저 울고 웃을 뿐좋아서 울고 서글퍼 웃으며호젓한 그늘 부러워 않고볕 쬐는 꼭대기 동경치 않는하나인 채로 나누는 흔들림신나게 울고 지루하게 웃으니웃어서 좋아라, 울어서 더 좋아라훨훨 가벼이 하나의 흔들림이한세상 흔들고
꽃을 그리다꽃이 된 사람이 있다 사진인지 구분이 안가는섬세한 그의 화첩속엔 나비 한 쌍도꽃 속에선 꼼짝 못한다 언뜻 봐도 푸근한이웃집 누이 같은 우리꽃 참나리 이질풀 각시붓꽃인동초와 깽깽이풀까지 양귀비꽃이 아닌데도사람들은 거의 미쳐갔다
텃밭 주인 몰래오이 밭 지나는 길푸른 오이꼭지 살짝 비틀었는데손끝에 묻어나는 싱그러운 향기그게 주인 마음인지아니면 오이 마음인지아무도 몰라요
먼발치 빛나던 뭇 별들도간서치 초가창가로 살며시 기우는 밤연두 맑은 찻물을 내리노라면산등성을 따라 참빗 가르마를 탄가지런한 나목들이 가만가만찻잔 속으로 잠겨오고자수정 경천가를 나는기러기 편대가 살촉처럼 추운 밤남쪽 내 고향 부모형제가 그리워고요해진 찻잔에 마음 건네고나 홀로 새벽 뜨락에 내려서면바람결에 서성이는 내 그림자만어른어른 애따롭고 날 밝도록참 애따롭고
멈췄다 다시 오고숨었다 다시 오고머뭇대다 다시 와서닥치는 대로철썩철썩볼기를 치고종아리를 치고뺨을 치고혼절한 듯 잠잠하다일어나우는 것만 한 노래 없고우는 것만 한 명약 없노라목청 높인다
아무도 없는데담 그늘 뽀리뱅이 조용히 와서 포실하게 섰다 가고냉이 마당가에 넓적하게 앉아서 놀다 가고봉당 밑 돌 틈 새콤한 괭이밥 종알종알빈 우편함 느긋하게 늘어진 햇살얼룩진 흙벽엔 산비둘기 그림자 소리 없이 스쳐가고사진액자 걸렸던 바람벽엔 두고두고 떠나지 않던이름 몇 개 얼핏 떠오르고
바람이 유리창을 흔들어대고사나운 기운은 몸을 감싸안는다빗물은 온 거리를 달리며성난 물결로 가로수를 뿌리 채 흔든다폭우 속에 감지되는 불온한 기운날이 밝으면 어디론가 가버리겠지만날카롭게 할퀴어대는 차가운 손가락늘 침울함 속에 불쑥반갑지 않은 소식을 건네준다불현 듯 힘 있게 앞발을 쳐드는길 잃은 사자를 꿈꾼다나무의 가느다란 가지 끝에폭풍의 눈이 감돌고 있는 것을발밑까지 흔들리는 것을 느낀다험한 언덕이 무너지는 것을 본다.
심장이 둘이라서 울며 오는 당신은눈물을 감추려고 샤워기를 비튼다불볕이체취로 따라온다끓어 넘친일몰처럼 당신의 두 가슴은 태양과 달 같아서하루만큼 파인 곳 가만히 손 얹는다말없이불타는 집처럼탄내를견디는 밤 여름밤은 원주율로 오는 거라 들었다고슬픔의 지름은 정확히 하루치였을까우리는다시 안 올 내일처럼 불티같이 울었다
오늘의 일거리가 엄습을 하더니모래시계 방석 위에서 구르고 있다내일은 다가오는데 오늘은 무얼 할꼬다음 생을 위해서 오늘을 유언처럼 살라던 그지금 하는 일지금 만나는 사람을 소중하게 여기라던베이컨이나 톨스토이도오늘을 치열하게 살자고 다짐했지엄습하는 일거리 그냥 즐기자고속담처럼 ‘미루지 말자’고오늘도 ‘어제보다 좀 나아졌지!’모래시계가 돌고 있다
유혹하던 어둠과 시기하던불안한 그림자도아침의 햇살에 걷어 차여버렸다강렬한 아침으로 잠은빛에 모든 것은 둘러싸여 있다황금빛에 둘러싸인 지금평화 속에 누워 있는 대지를 본다절정은 가라앉은 듯이 고요하기만하다시기하는 그림자가 억눌린다면무거운 회색 벽은 웃음이 드리울 것이다
파도에 파랗도록 질려 사는 바다난 서해(西海)가 없었다면무슨 재미로 바다를 믿고 살아왔을까회색 페인트 때 묻은 도시가 싫어서외면하고 사는 보랏빛 습관난 간기 밴 섬이늘 그리워 바다 위에 서서 섬과섬에게 편지를 쓴다답장이 없다그러나 섬엔 진한 그리움이사랑이 자라며 산다
반달 뜨기 전저 서림산 고개 너머까지그댈 맞으러 갈 수 있을까날은 어둡고 손발은 묶여기억의 길 찾아가야 할 텐데자빠져 무릎이 깨인 채기어서라도 마중가야 할 텐데쓰러져 마주 본 달맞이꽃이 서럽다웬간하면 잠시 숨 돌려 걸음을 멈추라던산허리 날던 산새 소리도 무겁다저 고개 너머에그리운 사람이 있다는데비 쏟아지기 전에그댈 맞으러 갈 수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