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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수한 시간들이 밀려와서 부서지고 부서진다.바다가 우는 것이라고 보면 우는 것이고아득하다고 하면 하늘 끝은 아득하기만 할 뿐이다.억새풀아, 억새풀아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바다의 무엇이 그리운 것이냐.밀물로 와서 주는 말썰물로 가면서 남기는 말모래톱은 씻기우면서 살 부비면서 쌓이고지나가면 남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다만 한순간을 보일 뿐인 서해낙일西海落日타는 숯덩이 같은 해를 바다가 삼킬 때세상의 적막이 다시 끓어오르는외로움의 끝, 끝에서 사는 것이다.
아침을여는시
동양일보
2016.04.27 20: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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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을 작고 동그랗게 오므린 채호! 하고강하게 입김을 불 때는마음마저 그늘에 젖는다서늘한 바람을 내며 입을 크고 동그랗게 벌린 채하- 하고천천히 입김을 불 때는얼굴마저 환하게 열린다따뜻한 바람을 내며 (이렇게 말랑말랑한 말이 있다니!)
아침을여는시
동양일보
2016.04.26 21: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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늦봄 지나 샛별 더욱 빛나고청보리 햇볕에 그을려 붉어질 때바람 타고 온 입김하늘목련꽃 향기로 뜰팡에 번지면바쁜 걸음으로 그대 오시는가뻐꾸기 한참이나 늦도록 짖더니만어둠에 놓인 산의 고요함이밤이슬 젖은 손등에 머물고터벅대는 걸음으로 논둑에 서면채워지지 않은 들판은아직 그대로인데이 길로 그대 언제 오시려나언제 오시려나패랭이 꽃망울이 예쁘다
아침을여는시
동양일보
2016.04.13 19: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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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늘져 내리는 맞배지붕이끼 덮인 수수 백년 회환발아래 접히는 장삼자락 밟힌다 미운 벚나무자목련을 앞지르지만은은히 울리는 법고의 타이름이 있다 들녘을 휘모는 마파람의 정기번뇌의 연줄을 흔들며골마다 주름진 하늘을 가른다 잿빛 터는 목탁 소리대웅전 돌계단에 만발한 만수향아저승은 얼마나 찬연하던가
아침을여는시
동양일보
2016.04.12 20: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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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천히 기어 나온다첫 새벽 이슬 길로 이고 진 집 한 채쯤이젠 익숙한 무게 급해도 서둘지 않은유유자적 걸음걸이 들·날숨 가빠오는발자국마저 어수선한 어질어질 돌아치는생의 복판을 지나 한 템포보폭을 고르며느릿느릿 걸어간다.
아침을여는시
동양일보
2016.04.03 2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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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무들 작은 혀를 빼물자온 산이 부처의 귀를 단다강줄기 푸른 산맥 함께 흐르고연한 물빛 산을 순하게 한다화락,초록 물떼가 솟구친다눈 속에 수천 톤의 물 떼가 내리 쏟긴다순간 초록동공을 가진 파충류가 된다 무릎을 세워 일어서다 말고 귀를 세운다 천개의 혀를 달고천개의 귀를 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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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양일보
2016.03.31 19: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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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그대를 잊기 위해지금 화성으로 간다 ‘소저너’ 티켓 한장들고서 순서를 기다리는 동안유성들이 수없이 떨어진다 소유가 없는 우주영혼이 있을 리야그리움이 있을 리야 지금은 그대 잊을 여비 버는 시간화성이 가까워 오는 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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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양일보
2016.03.30 19: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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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문 밖 상수리나무에부러져 죽은 나뭇가지와살아 있는 가지가 얽혀 생긴액틀 하나가 걸려 있다그 액틀을 통해 바라보는 마을이색지를 오려 놓은 듯 작고 선명하여처음 보는 동화의 나라처럼 낯설다기묘한 모양의 지붕과 색깔밭 사이를 뱀처럼 기어가는 길과머리칼을 곤두세워 소리치는 나무들아이들을 위한 무슨 요지경을 만드는지어디 목공소에서 망치 소리 들려오고하늘 거울 속으로 날아가는 새 떼와새들의 흔적을 지우는 흰 솜구름문득 바람이 불자상수리나무가 풍경을 말끔히 지우더니그 큰 액틀의 눈을 뜨고서창밖을 보는 나를 물끄러미 바라본다창문을 벗어나려 안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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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양일보
2016.03.29 20: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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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에서 물비린내가 난다 40kg가 넘던 돌이마른 북어처럼 가볍다 좌대 밑으로 눈물이 고인다요단강 너머 흑해 같다 갑자기 북어가 된 내가그 눈물바다에서윤기 없이 거친 돌을 닦는다 (……) 내 몸에서도 물비린내가 난다 눈에 보이는 모든 게 흑해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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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양일보
2016.03.28 21: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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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이 되어서도 놀기 좋아하는 태평양 어느 작은 나라에서는 비를흐르는 햇빛이라 부른다지구름이 무겁게 지고 있는 물덩이를 국수가락 뽑듯실금실금 나눠지고 내리는 빛의 알갱이나빛고물 같은 것이 땅을 적셔 먹을 것을 만드는 놀이로 알고며칠 밤낮을 흔들고 논다지그래서 그곳의 나무와 풀들은 모두 미끄럼틀호텔이라 부른다지내리다 지친 빗방울들은 가지가지 미끄러지고잎잎마다 머물다가는 그 순간을 긴잠이라고 부른다지반짝 물알 전구 켜기도 무섭게 밀려드는 빗방울에 밀려흙으로 적시며 질끈 눈감는 그것이 새로운 시작임을 알기에빗방울 목걸이를 매단 천사의 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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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양일보
2016.03.27 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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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백꽃 보러 갔다가동백꽃은 아직 일러 보지 못하고17번 국도를 타고 올라오는 길우리 동네 조 시인의 야담 속에벗어도 부끄럽지 않은 남녀가 있었으니아이들은 잉태되고 미아로 미아로남겨져 동백 숲을 이루었다명년 봄 그 아이들 동백꽃으로 피어꽃구경 나온 인파 속에 머리 검은 지애비를 찾고눈 붉은 지어미를 찾으려 눈 더욱더 붉어지리라 나, 그 아이들 입양하러고아원에 간다명년 봄
아침을여는시
동양일보
2016.03.24 19: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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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꿀 수 없는 것버려두고나에게는 그냥 오라힘겨운 날에도한 그루 쇠기둥으로뿌리내리고상처 깊은 사람을더 그리워하는 나는 비바람이 두렵지 않은두껍고 어두운 추억 까실한 얼굴물집 잡힌 손바닥에 핀 어둠의 세월 한 잎중앙공원 은행잎으로 물들어가만가만 몸 흔들며 오라
아침을여는시
동양일보
2016.03.23 19: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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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문보다마음이 먼저붉어지는하염없는 꽃첫, 마음자리뉘우침으로받쳐들다
아침을여는시
동양일보
2016.03.22 19: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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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순들은 저희끼리 등을 달아 빛을 만든다 작은 등 수백 개가 모여 서로 빛을 주고받아 이슬등 할 말 해야할 말 왁자지껄 빛들의 수다
아침을여는시
동양일보
2016.03.21 2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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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리가 되는 꿈을 꾸는 날이 있다스스로 다리가 되어많은 사람들이 내 등을 타고 어깨를 밟고강을 건너는 꿈을 꾸는 날이 있다꿈속에서 나는 늘 서럽다왜 스스로 강을 건너지 못하고남만 건네주는 것일까깨고 나면 나는 억울해 지지만 이윽고 꿈에서나마 선선히다리가 되어주지 못한 일이 서글퍼진다
아침을여는시
동양일보
2016.03.20 2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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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운 살 털고 난아지랑이꽃비늘 새순이 비리다 홀몸 가뿐한꽃가지 배 불릴 산허리벙긋대는 봄낯짝 걸직한 육자배기 술꾼이 되고 싶은 날 애열(哀咽)에 가위 눌리던개여울에 좔좔 마음 시리다
아침을여는시
동양일보
2016.03.17 20: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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냉이가 소속소속 솟아나고 있다아들 녀석이 지나가다가 밟아 본다냉이는 비로소 안심한다 올해는 어쩜 꽃을 피울 수 있겠구나올해는 어쩜 열매도 맺을 수 있겠구나올해는 어쩜 씨앗도 날릴 수 있겠구나 밟히지 않은 것들은 늘 미식가들의 식탁에 오르고밟힌 것만이 살아남는다
아침을여는시
동양일보
2016.03.16 2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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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 눈 녹아 똑, 똑 처마 밑으로떨어지는 물소리처럼창문 두드리는 소리아래로, 아래로멀어진다처마 끝에 매달린 마른 옥수수처럼허공에 떠있는 긴 하루중력을 따라 떨어지는숭숭, 알갱이들 내 몸 어딘가에 움푹 상처를 내고잭키의 콩나무처럼쑥 자란 옥수수오르는 밤 저기 누가 낙화의 꿈을 꾸는가.
아침을여는시
동양일보
2016.03.15 21: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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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막 햇사랑을 시작한 사람이마라톤을 달리면겨울도 떠날 때를 알고운동화 뒤축에 매달려히죽히죽 웃는다 딸기밭의 지렁이도이랑이랑 온몸을 간질이면어쩌지 못한 봄도붉은 심장을 통째로 내놓는다 봄에도 심장이 있다면그것은 딸기다
아침을여는시
동양일보
2016.03.14 2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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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너였구나 거기부모님도 가신지 오래 고요만 수북하게 먼지처럼 떠다니는 텅텅빈종택, 섬돌 아래서엎드려 우는 귀뚜라미.
아침을여는시
동양일보
2016.03.13 19:4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