병실이라고병만 있는게 아니다.병실이라고환자만 있는 게 아니다 몇 년 째 화장도 못하고남편 병수발을 들던예쁜 아낙의 머리에하얀 박꽃이 피고 아내 병수발을 위해승진도 마다하고 휴직한젊은 사내의 더운 사랑에고운 쌍무지개가 뜬다 살려고 몸부림치는 이와살리려고 진땀을 빼는 이가외나무다리에서 만나사투를 벌이는 병실에는 오늘도하얀 박꽃이 피고고운 쌍무지개도 뜨고희망풍선도 두둥실 난다
풍성한 잎 떨어내는은행나무앙상한 겨울 맞아도슬퍼하지 않는다 봄 오면 여전히 새순은 돋고무성한 잎 갈아입으면마주 보는 자웅 그러했듯이가을에 다산을 약속 한다
풀벌레 합창에조각달님 서산에 잠재우네.그리운 님앞산에 그려두고 하늘의 별이야기꽃 피우다 잠들고 싶어라 속세를 떠나그림 전념하며대둔산 서대산 벗 삼으려두메산골 찾아왔네만 노후 건강 돌볼 사람 없으니대자연에 맡기고 호연지기의 삶 속세 업보 끊지 못해밤은 깊어라
접시에 모과 세 개 담아놓았다내 치맛자락에 걸려사방으로 흩어졌다 집안에 향이 가득하다잦은 기침소리가 들린다 그 사람 “향이 참 좋은데”
동짓날기별도 없이 배달된 K시인의 택배 두 볼이 미어지도록 빨갛게 부풀어 오른 누르면퐁터질 것 같은홍시 가득 담겨 있다 몇 날 며칠이고 된서리 얻어맞고떫은맛 가시기를 기다려본 적 있는가비로소 툭 터져 쏟아질 단내 흠씬 품었는가 그 흔한 쪽지 한 장, 메모 한 줄 없어도 빛바랜 푸르른 날 붉디붉게 물들이던 쉰 두 살그녀가 묻고 있다떫어도 한 세상 아니냐고
아이들 글을 보다보면고칠 게 참 많구나 싶다내용도 고쳐야하고문장도 고쳐야하고단어도 바꿨으면 싶고띄어 씌기도 엉망인데제목마저 아주 바꿨으면 싶다 내가 꼭 그렇가그 때 안했으면 싶었던 그 말도 고치고그렇게 안했으면 싶었던 그 행동도 고치고아예젊은 시절을 새로 살고 싶고이름마저 아주 바꿔바꿀 수 있다면싸악 바꿔 버리고 싶을 때 있다 아주 아이들 글처럼내 삶도고쳐 쓰고 싶은 게참 많다
차창에 어린 시 한줄이 아내에게 간다 노오란 파아란 잎새들이 범벅되어지하철 창문을 부수고 애끓는 위로의 한 단어가공중분해 되어효심의 노래를 마다한다 거울 앞에 서더니님을 향한 조언을 외면한 채새로운 나의 단어를 만들고횡 하니 지나간다
시원한 동치미 국물이 없었더라면겨울 여신의 희고 몽툭한 종아리가 영감처럼퍼뜩 떠오르지 않었더라면아무 생각 없던 아내를 꼬드겨 육거리 시장에 가서쪽파 갓 마늘 삭힌 고추 무를 사다가영혼을 톡 쏘는 초정약수를 퍼붓지 않았더라면투명하게 익어가던 열망의 시간이 없었더라면마음까지 혹독하게 추웠던 이 겨울을 어떻게 견뎌냈을까새벽공기처럼 청량한 동치미 무를 썰어아삭아삭 소리 내어 씹어 먹지 않았더라면북극 오로라처럼 영롱하게 익은 국물을벌컥벌컥 들이켜지 않았더라면분수처럼 쏟아지는 기쁨의 쪽파를 곁들이지 않았더라면삭힌 고추를 깨물며 속울음을 토해내
5일 장터열무가 식탁에 올라왔다입 속에 놓는 순간어머니 따뜻한 가슴이누렇게 익어 가고아버지 볏짐 지게에 메고논두렁 밭두렁 넘어 갈 때고단한 땀이 아삭아삭 부서진다한 상에 녹아 내리는푸근함으로 썩썩 비벼 내니열무가 살 속 깊은 곳에서고향의 달 냄새로 끓어오른다뭉크러진 아픈 눈물도어머니 손맛이 닿는 순간새로움으로 피어나고그리움이 아물아물 오르면5일 장터가 버무려지면서열무김치 소리로 폴폴 익어간다
솜털 보송하게부풀던 수줍은 날 동여매던그 은밀한 띠 훅 끼치는 지열버겁게 삼킬 때마다 영글던알알은어찌되었는지 염천에 끌어안고애면글면 키운움푹한 자리 훤히 다 내놓고 이제는 숨기고 싶은 일도부끄러운 일도그냥 괜찮다는데 낡은 브래지어속 헤집는 바람제풀에스산하게 운다
노른자위 둥근 달이고명처럼 떠오르는 추석에챙겨준 들기름 한 병 풋나물 겉절이와 시래기 강된장을양푼에 가득 담고뜨거운 보리밥 뒤적일 때한 방울이 아쉽던 기름내 가물어 메마른 냇물이해 떨어지면 젖어 내리듯그리운 고소한 냄새 이제는 산마루에 누워아련한 웃음소리 들릴락 말락나직한 목소리에 눈을 감누나
스님은 목탁을 때려 지우고 꽃은 색으로 지우고 난은 향기로 지우고 빛은 그림자로 지우고 오늘은 내일로 지우고 만남은 이별로 지우고 슬픔은 세월로 지우고
뜨거운 눈물을 준비하겠습니다가장 아름다운 자기 쟁반 위에한참을 구르다가 부서질 내 눈물 한 방울그 위에 당신의 눈물 떨어져 섞이면아 행복해 하얀 영혼 되어서로를 어루만지는 눈물들의숨소리
등이 시려등 하나 내겁니다.세상을 따뜻하게 밝혀주는아주 작은 것,기댈 어깨비벼댈 언덕 있어 행복합니다.우두커니 서 있던시린 마음 하나 덜어내고찬 손으로 막걸리 한 대접대접하고 싶습니다흰 눈이 소복소복 쌓인 들녘가만히 바라다보면, 그냥 가득해집니다.
수수깡 바람에 일렁이는 눈보라 속을들고양이 가족들이 헤맨다발톱을잔뜩 웅크린 채창가 유리창에 목을 매는 사람수없는 공간을 헤집던바람이드디어 창가에 숨결을 내려놓는다창가에 머물던 아이들에게선생님은 알사탕처럼 수수께끼를 던진다“이 세상에 피도 눈물도 없는 사람은 누구일까요”한 아이가 거치없이 “엄마”라고 답하자실내는 허한 웃음꽃이 피어난다아이들의 웃음이 거품처럼 일렁이더니수수께끼속의 정답이었던 “눈사람”이순식간에 사르르 녹아내린다창밖에는 굶주린 고양이 새끼 한 마리바람을 향해 목 놓아 울어댄다
딱딱한 인절미를 구워 먹으면 생각한다말도 구워 먹고 싶다고무심코 던진 말들이뒤통수를 치기도 하고우정의 정강이를 걷어차기도 하는데그 말들을 깨끗이 씻어말랑말랑하게 구워 먹고 싶다고내가 던진 말에 맞아얼굴이 굳어버린 여자와 마주 앉아녹차 한 잔 곁들어따끈하게 구워진 말들을 나누어 먹고 싶다고구수하고 쫄깃쫄깃한 말들오달지게 나누고 싶다고
둘둘 말아 건너뛴 날들언제였을까돌아보고살펴봐도언제였는지사라져버린 그 날들 퇴색된 달력을 되돌려 넘기며사라져버린 기억을 더듬는다숫자 속에서 빙그레그는그대로그 모습 자리하고 있는데나만달음박질쳐온 날보고 또 보고쓴웃음만이눈을 감게 한다
어머니는 오늘도 한 다라이 가득김치를 담그신다말이 필요 없는 배추 소금 고춧가루 등속하물며 한 다라이를 위해 버려진 물은 어쩌겠는가신통치 않은 말만 주머니며 가방,만년필에 채운 나는사무친다밤잠 깰까봐 베란다 창문을 닫고물은 소금과 배추 등속을 참아내며수챗구멍으로 뒷걸음질쳐 갔을,어디 그뿐인가산에서 주워 온 도토리를 빻아 물을 받아내고묵을 쑤어내고는 봉숭아씨처럼달아나려는 뼈마디를 추스르고 아무렇지도 않은 듯식구들의 입맛 바라보고 있지 않은가밑반찬이 그렇고꼬들꼬들 말라가는 묵나물이한 대접 담겨벼 밥상에 올라왔을 때감히 혀 몇 개의 맛으
도토리 한 알툭 떨어진다 차가운 바닥에 홀로 떨어지고도물정 모르고 이마를 반짝이는 녀석 차가운 겨울바람 부는 비탈진 길을언 발로 걷던 아득함이 깨어난다 햇별 좋은 땅에 묻고낙엽을 쓱 끌어다가 푸르게 덮는다
하루해 무거운늙은 골목의 끝자리닻을 갈아 길 내는단풍 한 장쿨럭 돌아서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