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 다리를 건넜던 이들과이 다리를 건너고 있는 이들과이 다리를 건너갈 이들이강가에 함께 모여흘러가는 강물을 바라다보고 있다. 그들이 살았었대그들이 살고 있대그들이 살고 있을까.
아침을여는시
동양일보
2015.06.14 20:15
-
터벅터벅 걱정을 실어 간다가만히 앞섶을 틔워 길을 내어 준다 부르면 대답도 없이 가만히 있다다가서는 발소리도 없는 어린 풀꽃 무덤덤하다 지친 어깨를 들썩이며 숨을 몰아쉰다늙은 소나무가 굽은 등으로 그늘을 펼쳐 준다 열에 들 뜬 몸, 땀 냄새 지독하다계곡이 보내주는 바람이 맑다 제 몸 성치 않은 자리 많으면서이리 저리 길을 틔워 준다 화사한 그 무엇도 없이 담백한시간이 지나도 한결같은 친구
아침을여는시
동양일보
2015.06.11 20:54
-
오랫동안 비어 있던 화분에 괭이밥이 어슬렁거리기 시작했다 허름한 볕이 창가를 불규칙적으로 다녀가고 괭이밥, 습관처럼 정강이를 세웠다 오전 중간쯤이다 집 안의 물기가 마지막으로 머물다 가는 1205호 창가에 별이 뜬다 둥굴린 시간들이 상현 하현을 맴돌았다, 나비 떼처럼 창밖엔 눈 내리고 고양이 밥그릇만 한 화분에 별이 뜬다 겨우내 피고지고 피고, 음악처럼 별빛처럼 튀었다 씨앗들, 규칙은 없지만 규칙 같다 언제부터 이곳에 은하가 생겼을까 1205호 창가, 반짝거리지도 않는 별들이 열렸다 닫혔다 한다 하늘과 땅 사이 이토록 모호한 집착력
아침을여는시
동양일보
2015.06.10 21:02
-
박은영 누가 울음을담아서 들고 가나 이 산에서 저 산으로 건너가는뻐꾸기 울음 뻐국뻐국 문을 열고 내다보던 앞산이울음을 받아들다 그만 왈칵 쏟아져푸른 숲이 온통 출렁출렁 거리나
아침을여는시
동양일보
2015.06.09 21:08
-
옥천군 청산면 백운리와 만월리에 사는 개들은생긴 것은 그놈이 그놈 같지만이 곳에 사는 사람들은 그놈들 족보를 대번에 안다 백운리가 고향인 놈들은 온종일 열두달 내내새털 뭉게 조각 구름 피어오르는 하늘만 보다가낮잠 자는 시간을 놓쳐 밤이면 잠에 빠져 주인과 도둑 구별도 못 한다 만월리가 고향인 놈들은 그믐밤 며칠을 빼고는달뜨고 지는 것에 눈을 팔다가 꼬박 밤샘을 하고는아침부터 잠에 빠져 다가서는 발자국소리가 주인인지 개장사인지도 모른다 옥천을 지나는 사람들은 청산면 백운리와 만월리 개들을 금방 알아낸다백운리 개들과 만월리 개들은 모두
아침을여는시
동양일보
2015.06.08 20:30
-
놀라지 마세요.병은 아니예요.다른 사람 귀에 들리지 않는,혼자만의 비밀이 생겼다고 생각하세요.지금 당신 귀에는 귀뚜라미 한 마리가 살고 있어요.제가 놀라지 말라고 했잖아요.언제, 어떻게, 왜.이런 건 의미 없어요이미 살고 있다는 게 중요하단 말이에요.쉿, 누구에게도 알리지 말아요.어치피 당신 몫이에요.이미 몸 안에서 나는 소리의 근원을몸 밖에서 찾지 말아요.사람들은 그래서 다들 아픈 거예요.이만하면 천만다행이죠.오랫동안 참아온 속 울음이 귀로 옮아갔어요.뒤에서 미는 파도 탓이라는 듯바다 위를 마음대로 출렁이는 배 한 척 같군요.당신
아침을여는시
동양일보
2015.06.07 20:34
-
세상은 잠시 날숨을 쉰다. 아까부터 아내와 사춘기 딸애가 키득거리더니, 이제는 아예 박장대소다. 늘 우울한 세상에 무슨 이야기가 그리도 재미있을까. 가만히 엿들어보니 바로 자기들의 가장인 남편 흉보기요, 아빠 흠집내기다. 실컷 웃어라. 무능한 어른 사내가 조롱거리라고 될 수 있다면, 가사에 조금이라도 보탬이 되겠지. 세상도 가끔은쉼표를 찍는다.
아침을여는시
동양일보
2015.06.04 20:07
-
누가 울음을담아서 들고 가나 이 산에서 저 산으로 건너가는뻐꾸기 울음 뻐국뻐국 문을 열고 내다보던 앞산이울음을 받아들다 그만 왈칵 쏟아져푸른 숲이 온통 출렁출렁 거리나
아침을여는시
동양일보
2015.06.03 20:40
-
나뭇가지 까맣게 앉아재충전 하는 새떼물과 하늘 중심엔 나무노동의 깃 말리는 쉼터생존을 깁는 가마우치주렁주렁 매단 비상飛翔.
아침을여는시
동양일보
2015.06.03 14:09
-
나보다 먼저 도착한 시간이머리에서 하얗게 서성이면조팝처럼 퍼지는 그리움 삶의 무게에 눌린 늙은 욕망이다리 끝에 매달려 절룩거리면정이 그리운 사람들은칼국숫집으로 향한다 지긋한 노인의 등허리에서잃어버린 어머니를 찾아내고구수한 칼국수 대접에서고향들 가득한 추억을 훑는다 칼국수 한 그릇에어머니를 들여놓고고향 집을 들어오면온몸 가득 안개처럼 피어나는 온기 파란 하늘 하얗게 퍼지는 고향들
아침을여는시
동양일보
2015.06.01 20:30
-
시간의 등줄기에 뜸을 놓는다꽃 수천 송이 여름의 몸통에 사지에맥을 짚어 장미 뜸을 뜬다6월이 신음하고 있다 곳곳에 부황단지를 붙인다생존의 빛, 투명 유리 속에서 소릴 지른다연기도 없이 타는 시간의 눈 그 옆으로무릎을 꺽어 쑥뜸을 뜨는오래된 내 얼굴 액자 속에 갇힌다굳어지는 살점마다 불쏘시개 단단히 박던 낯익은 노인뜸 뜬 자리 덧나야 낫는다고 피고름 섞던 살점 위로점점이 박힌 생의 흔적 관이 지운다 물은 서 있는 이의 속내로 차 오르고광란의 불길 멈출 수 없는 피돌기시간의 허기를 빨아내는가6월이 덧나고 있다
아침을여는시
동양일보
2015.05.31 20:22
-
아주 먼 옛날가슴이 너무나 무겁고 답답하여더는 참을 수 없게 된 한 사내가밤낮으로 길을 내달려마침내 더는 나아갈 수 없는길 끝에 이르렀습니다그 길 끝에사내는 무거운 짐을 모두 부렸습니다그 뒤로 사람들은 길 끝에 이르러저마다 지니고 있던 짐을 부리기 시작하고짐은 무겁게 쌓이고 쌓여산이 되었습니다이 세상 모든 길 끝에높고 낮은 산들이 되었습니다.
아침을여는시
동양일보
2015.05.28 20:30
-
골목 안까지 샅샅이 비추는 달빛의담벼락에 기대어 가위바위보 하네금성의 여자와 화성에서 온 남자한 치의 양보 없이 빳빳하게 겨루네세 번 네번 비기고 있네담장 안 꽃가지 더는 못 참아 한 꺼풀또 한 꺼풀 옷을 벗는 봄
아침을여는시
동양일보
2015.05.27 20:42
-
오늘 자동차보험 사인 받으러 조카 미영이가 왔다수박을 먹으며 얘기를 나누는 중조카의 눈 밑 다크써클이 눈에 들어온다내 시선을 의식했던가생리통이 심하다며 어서 끝났으면 좋겠다고 웃는다그래 몇 살이냐고 했더니 마흔 아홉이라며몇 살에 생리가 끊어졌느냐고 되묻는다 내가 쉰 몇 살 때였다고 했더니 자기도 그걸 거란다놀라서 쳐다보았더니 대개 엄마를 닮는데 엄마가 안 계시니 이모를 닮는 거라나순간 정수리를 세게 얻어맞은 듯 했다조카에게 그런 존재였던 걸 모르고 살아왔다고죽은 언니가 한 대 친 거다 이건아니다내 양심의 나에 대한 한방망이다 이건
아침을여는시
동양일보
2015.05.26 20:58
-
하얀민들레 토종 철쭉쥐똥나무꽃싸리꽃울타리꽃 개나리 한참 힘내서성내고 접 붙고 있는벚나무 배나무복숭아나무꽃을 피우고 있는 봄
아침을여는시
동양일보
2015.05.25 20:20
-
입은퍽작아도속은 꽤 깊고 넓어 오지랖은 또 어떻고!팔도를 휘감고도 남을 그 여자쉰여섯 봄을헤벌쭉이 맞고 있네.
아침을여는시
동양일보
2015.05.21 21:00
-
아파트 모퉁이를 돌아서자 쭉 뻗은 가로숫길이다눈발 흩날리듯 꽃가루 날리는 오월,네댓 살 아이가 가로수 그늘 아래서 훌쩍거린다아이 앞에 주저앉아 너 왜 우니 했더니벌레가 날아다녀서요벌레가, 하얀 벌레가 자꾸만 얼굴에 붙으려고 해요 그런 오월이다, 네댓 살 아이 같은
아침을여는시
동양일보
2015.05.20 20:43
-
손에 잡힐 듯 다시 멀어지는그렇게 알 수 없는 거리묘연하다 싶으면 어느새 다가와 사람이었다가찰피나무 그늘 속 꽃분홍 엉겅퀴였다가다시 또 느닷없이 몸을 숨기는 먹구름 가득한 숲 속멀어졌다 다시 다가와 더욱 분명한저 빼곡한 장대 울음
아침을여는시
동양일보
2015.05.19 20:41
-
작은 방에서그가 남기고 간칼자국을 본다 찢어진 풀 냄새가 났다 벽이 흘리는긴 상처 귀가 잘린 나무들이 늘어선다식물은 다친 자리에서가장 향기로운 즙을 뿌린다 몇 차례의 칼날이 들어서고서서히 형체를 얻는 마음 누가 그늘을 오려없는 정원을 이루는지두개골 안쪽이 흐려지기 시작한다 작은 방의 모서리가조금씩 깍여나갔다
아침을여는시
동양일보
2015.05.18 20:51
-
검색창 여는 순간 당신은 거기 없다늘씬한 그녀들이 먹고 입고 마시는 창톡 쏘는 당신 입맛에나는 벌써 길들였다 겹겹의 문지방엔 다녀간 발자국들누군가의 흔적 따라 위치를 추적하고오늘도 낯선 그림자창문 밖에 서성인다
아침을여는시
동양일보
2015.05.17 20:3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