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삶이 맹물같이 간이 맞지 않을 때독하게 술 한 잔 하실래요아니, 아니지 소태같이 쓰디 쓴 날맹물처럼 시원하게 한 잔 하실래요이승인지 저승인지 경과 계를 깨뜨리고오늘을 버무려 우리 함께 간 맞추어 보실래요음식의 맛도 간이 맞아야 제 맛이 나지요 세상파도에 출렁이다 어느새 내 몸고스란히 간물 배어져 나오네요삶의 갈피갈피 간 치느라 쓰라렸던 상처들이제야 알맞게 간이 든나는 간 고등어
아침을여는시
동양일보
2015.03.26 20:36
-
아그야뭐 한다냐봄볕도 이리 환한 날 머우 잎 몇 이파리슬쩍 데쳐 쌈 싸 묵으니 참말로입맛 돈다야막내 니 생각 끈하다.
아침을여는시
동양일보
2015.03.25 20:43
-
부엌 쥐 숨는 소리에야옹 고양이 흉내 내던 어린 날밤길을 혼자 걸을 땐타박타박 발소리더 크게 울리며 걷지긴 그림자 거두어 가로등 아래 서면저어기 사립 앞에 기다리시던 아버지 어둠을 지날 땐그저 타박타박 외롭거나 말거나두렵지 않아 내가 내게 이르며타박타박 다시 걷는 밤날마다 혼자 산에서 주무시는 아버지저 모퉁이 돌아나면 뵈올지 몰라 골목은 언제나 끝나게 마련이지그림자 타박타박 함께 걷는 밤
아침을여는시
동양일보
2015.03.24 20:28
-
언 땅에 뿌리내린 희망과비좁은 어둠에 떨고 있는 고독이여!온화한 봄의 대지로 가자잔인한 발자국 뒤를 따라서푸르게 손잡고 다시 일어서는보리처럼 굽은 등을 펴자. 바람의 문장을 읽고마른 냉이가 새 이파리를 밀듯내 안에서 말라가는 것들과네 안에서 죽어가는 것들을 찾아봄의 아침에 눈뜨게 하자 잿빛 대지를 푸르게 적시고다시 생명의 꽃으로 피자살아오는 저 봄처럼새봄처럼
아침을여는시
동양일보
2015.03.23 20:40
-
옥산의 강모래를 파헤치며동생과 엉겅퀴 뿌리를 캤다 가시뿐인 줄기를 헤치니자주 댕기꽃머리는 보이지 않고까만 홀씨들의 떠날 준비뿐이다 삽질을 할 때마다 엉겅퀴는몸을 깨뜨려 산방 스님보다 더 천천히사랑을 깨뜨려 우리 곁을 벗어난다 통풍에 지친 동생의 머리칼이엉겅퀴 꽃처럼 하얗게 핀다 나도 하늘을 올려다보며몸을 하얗게 깨뜨렸다
아침을여는시
동양일보
2015.03.22 20:23
-
길을 걷다가기댈 곳이 없어서가로수에 기대어 쉬었다.산을 걷다가기댈 곳이 없어서풀숲에 기대어 쉬었다.공원을 걷다가기댈 곳이 없어서벤치에 기대어 쉬었다.살다가기댈 곳이 없어서쓰러질 때삶은 아프다.기댈 수 있는당신이 있기에새삼 행복하다.
아침을여는시
동양일보
2015.03.19 20:08
-
점심 식탁아내는 달려들어푸르름을 담는다입에 가득 저녁 식탁아내는 또 달려들어허기진 그리움을 담는다입 안 가득 아침 식탁아내는 다시운명을 써서 밀어 넣는다내 입안에꽉 차게 우리 가족 입 안에선 상추가 자란다처갓집 텃밭처럼 파랗게
아침을여는시
동양일보
2015.03.18 20:41
-
추운 겨울 지나서야바스락, 한마디 남기고깊은 잠에서 깨어나더니 잘 익은 도토리 몇 알품속에 숨겨 오물거리다가허기진 청설모 넘겨주고는 바스락, 짧은 흔들림으로겸손한 눈빛 땅속에 묻어향기로운 숙성을 하는 그대
아침을여는시
동양일보
2015.03.17 20:36
-
쪽 마늘 반 토막내어씨 마늘 챙기며쪼그리고 도란도란자식걱정 얘기하느라왜 안자뇨 이른 봄날 벼 나락 담그고커다란 옹기 단지에막대 휘휘 저으며 모판에 뿌릴벼의 싹을 티우려고왜 안자뇨 석 잠자고 일어난 누에성장의 기로에서 허물 벗고사각사각 먹어감에때 맞춰 밥줄 생각에뽕잎 따는 힘든 일 걱정에왜 안자뇨왜 식전에 잠을 왜 안자뇨왜 저녁에도 안자고 식전에도 안자뇨
아침을여는시
동양일보
2015.03.16 20:59
-
푸른 명상의 연필을 갈고 다듬어깊어가는 봄밤,저, 검은 허공을 환한 등불로 밝힌그의 희고 정결한 정신을간곡하게 밝힐 수만 있다면
아침을여는시
동양일보
2015.03.15 21:36
-
그 누구도탓하지 말자 언제나 꽃은피고 지는 것을 그 누구도탓하지 말자 바람이 분다고나뭇잎 색깔 변한다탓하지 말자 시간의 뜨락에서우리 모두죄인이니까 그 누구도탓하지 말자
아침을여는시
동양일보
2015.03.12 20:44
-
영화 ‘변호인’을 보고 울컥했다, 마음이어떻게 살고 있는지 지금 어디에 있는지한참 멍하니 눈만 껌뻑이다 한숨만 쉬다찔끔거리는 눈물에 눈가를 짓누르며그래도 잔잔하게 밀려오는 따뜻함을 느끼며 국밥이 나왔다, 하얀 육수에 얇게 썬 수육과 내장을 넣은고춧가루 대충 겉절이한 정구지를 넣고하얗게 염을 한 새우젓으로 간을 맞추고얇게 썬 청양고추로 칼칼하게 맛을 낸경상도 돼지국밥이 어느 시인이 자산의 생일날나 같은 것이 살아서 국밥을 먹는다고 울먹였다는국밥, 잡혀가는 봉준이에게 따뜻한 말아주지 못해 미안해 한국밥, 장꾼들이 먼 길 떠나기 전 배를
아침을여는시
동양일보
2015.03.11 20:37
-
계절의 눅눅한 하늘로물고기 한 마리 간다 숙명은 늘 바람같이 달려와멈추었다 떠난 자리에무엇을 남가는가 사랑은 결국불발이었다 소리없이 꺼져들어화엄의 경계까지 삭아들어전생의 기억은 엄두도 없다 가로등 불빛에 몸을 섞는 나방이같이몸을 태우며 사는 법을 알았으니 겨울의 얼음장 속으로새 한 마리 간다태초의 무늬 없는 형상처럼
아침을여는시
동양일보
2015.03.10 20:45
-
아침이 밝아 오는 뜻은새로운 나의 길밝히기 위함이고 밤이 오는 뜻은삶의 고단한 몸풀어주기 위함이다 겨울이아무 말 없이지나가더니봄이슬그머니 다가와서 새 날의 꿈이저마다 꽃이 되어한 송이 두 송이피어나고 있다고먼 산이 먼저 달려와 알려준다
아침을여는시
동양일보
2015.03.09 20:44
-
관계 속에 참여하는 봄날 바깥에는바람이 풀 사이로 관계처럼 다닌다자기가 자기 밥을 짓느라 봄꽃도 바쁘다 부지런한 놈 지심 메고 게으른 놈 자기 좋고스스로의 한계를 동업중생 속으로만나야 주고받는 참아픔이 유지하고 있다화창해지니 미안한 것은 자식이라몽당연필 된 줄 모르고 그리워한다아픔도 떠나 있으니 들어오라 부른다 지치지 않을 때 서겠다며 자갈길 헤쳐 온인연이 햇빛에 몸 섞으며 흐른다멸하고 일어나는 생각 속으로 단비 내린다
아침을여는시
동양일보
2015.03.08 20:45
-
아파트 베란다 화분에군자란 한 송이 피었습니다작년에 피지 않은 꽃이숨바꼭질하듯 꽃 속에 숨어봄날 아침 활짝 피었습니다오랫동안 인연 끊어진 그대의느닷없이 안부 같아처음에는 데면데면했지만그래도 잊지는 않았구나 싶어반가움 감출 수 없었습니다끝내 보여주지 않고 떠난 그대 마음이저 꽃이었을 것 같아종일 가슴 두근거렸습니다망설이다 쓰지 못한 오랜 편지이제는 다 쓸 것 같습니다그대가 주고 간 화분에 군자란 피었다고그대가 그때 하지 못한 말이군자란처럼 피었다고
아침을여는시
동양일보
2015.03.05 20:12
-
게에게도 입술이 있다면꽃게에게도 붉은 입술이 있다면양쪽 입가에 살래살래 흔드는분홍빛 저것이 혓바닥이라면저 희망의 무게만큼 가벼운 물거품참으로 별 볼일 없는 날들을 살래살래흔드는 게의 견고한 믿음을 위해푸른 물속 게의 견고한 고요를 위해넌지시 말을 주고 노래를 주고 싶은그 붉은 혀와 기쁜 입술을 주고 싶은살래살래, 뽀글뽀글 참 맑은 포말로 목청껏바다 속 게의 붉은 입술의 발성연습해저의 지층을 간질이는 게의 음표들꽃게의 입술로 툭툭 쳐보는물속 같은 세상의 가벼운 평화
아침을여는시
동양일보
2015.03.04 20:25
-
송판에 박힌 못을 뽑는다나뭇결을 꼬옥 쥐고 있는 못오래된 눈물처럼 쉬 뽑히지 않는다장도리 쥔 손에 힘을 주자 툭,못대가리만 부려져나온다슬픔을 잘게 쪼개듯못이 박혔던 결따라 송판을 쪼갰다번데기처럼 드러나는 못못을 감싸고 있던나무 둘레에 녹물이 배어있었다
아침을여는시
동양일보
2015.03.03 21:48
-
어디를 봐도모과나무는 정말 모과나무처럼 생겼다 빨간 눈과 보송보송 하얀 털과급할 때면 용수철처럼 튀어 오르는뒷다리를 가진 (코끼리는 그 펄럭이는 귓속에 별을 넣고 자며)(기린은 장대같이 긴 목을 별에 기대놓고 잔다지) 귀가 긴 토끼처럼 발바닥부터 머리끝까지모과나무는 정말 모과나무처럼 생겼다
아침을여는시
동양일보
2015.03.02 21:17
-
TV에서는 좌파 드라마가 버젓이방영 중이다 주인공은 가난한데예쁘고 밝고 티 하나 구김살 하나 없는데있는 집 자식들은 하나같이 없는 사람들을무시하고 나이 많은 사람들한테까지함부로 하는데 꼬일 대로 꼬여 막장으로막장으로 치닫는데 더군다나 회장님은나쁜 년놈들 꼬임에 빠져 착한 사람가난한 사람들을 오해하고 회장님은원래 편견이 없으신 분인데 회장님이아시면 다들 경을 칠 덴데 없는 사람 착한사람 수수하게 차려입은 평사원 인턴사원 임시 직원은 곤경 속에서도 있는 사람잘 나가는 사람 쫙쫙 빼입은 이사님실장님 본부장님께 휘둘리지 않고 꿋꿋하게또박또
아침을여는시
동양일보
2015.03.01 20:5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