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새들은 하늘을 날면서, 거북이는 엉금엄금 기어서, 소나무는 모진 비바람 눈보라를 딛고 일어나, 미루나무는 햇살에 서걱이면서, 꽃들은 굳게 다문 옥문을 열면서, 장독대 들숨날숨 장이 익어가면서, 밤하늘 빛나는 별은 달님과 숨바꼭질하면서 서로의 길을 간다. 생명을 찬미하고 희망을 노래한다.어린 아이는 넘어졌다 일어서기를 수없이 반복하면서, 골목길에서 소꿉장난을 하면서, 알밤을 털면서, 대추를 한 입 가득 물면서, 책을 읽으면서 저마다의 풍경을 만든다. 화장을 하면서, 쇼핑을 하면서, 여행을 하면서, 밭을 갈고 씨를 뿌리면서, 단잠을 자
우리동네 숨겨진 이야기
변광섭
2018.10.11 18:55
-
목도나루에 황포돛배가 들어오면 온 동네 사람들이 모였다. 서울 마포나루에서 출발한 소금배가 충주 목계나루를 거쳐 이곳으로 온 것이다. 배에 있던 소금자루는 청년들과 아낙네들이 지게에 싣고, 머리에 이고 제 주인을 찾아 나섰다. 텅 빈 배에는 이 마을의 특산품이 가득 실렸다. 고추와 마늘과 기름진 쌀과 잡곡들이었다.이렇게 목도나루에는 황포돛배가 들어올 때마다 큰 장이 섰다. 그러다가 5일장으로 이름을 날리면서 풍요의 마을이라는 명성이 자자했다. 일제 강점기의 적산가옥도 여러 채 있었다. 목도나루의 달래강 풍경은 얼마나 아름다운지 봄에
우리동네 숨겨진 이야기
변광섭
2018.10.04 20:16
-
눈 내리는 날에는 눈길을 걸어라. 꽁꽁 얼어붙은 어둠의 대지, 두려움 가득했던 내 안을 하얗게 밝히니 눈을 맞으며 눈을 밟으며 눈길을 걸어라. 비 내리는 날에는 비에 젖은 길을 걸어라. 우산을 접어라. 비가 오면 오는대로 온 몸으로 마음으로 젖고 스미며 장작처럼 마른 내 가슴 촉촉이 적시고 새 순 돋게 하라.낙엽지는 날에는 낙엽을 밟으며 걸어라. 그리운 사람이여, 사랑이여, 우정이여.외로움에 치를 떨 때, 가슴 시리고 아플 때, 홀연히 떠난 사람 오지 않을 때 낙엽을 밟으며 노래를 하라.바람 부는 날에는 바람을 맞으며 길을 걸어라.
우리동네 숨겨진 이야기
변광섭
2018.09.27 20:00
-
지난 여름은 폭력적이었다. 온종일 도시는 뜨거웠고, 지칠 줄 모르는 열대야와비 한 방울 없는 지루한 일상은 생지옥이었다. 초목도 그럴 것이고 바짝 타들어가는 논과 밭의 작물들은 더욱 고단했을 것이다. 텃밭에 심은 고추와 가지와 오이와 옥수수는 속절없고 댕댕이덩굴만 무성하니 근본없는 사내의 마음은 정처없고 헛헛했다.여름의 끝자락에 단비가 대지를 적시면서 산과 들의 호흡이 가지런해졌다. 돌아보니 지난날의 가시밭길은 꽃길이었다. 가을의 전령 코스모스가 꽃대를 들어 올리더니 골목길과 들녘 곳곳에 연분홍 물결 가득하다. 고추잠자리 푸른 하늘
우리동네 숨겨진 이야기
변광섭
2018.09.13 19:40
-
(동양일보) 길을 나설 때 기도하라. 내가 내딛는 발걸음과 그 발자국이 헛되지 않기를, 세상의 모든 새로움에 경배를 하고 앙가슴 뛰는 설렘으로, 순수의 마음과 열정으로 희망의 길을 만들 것을.그대를 만날 때 기도하라. 우리의 사랑, 우리의 우정, 우리의 그 언약 영원히 변치 말자고, 기쁘거나 슬플 때 아프거나 방황할 때 서로 보듬고 위로하며 힘이 되자고, 손 내밀어 함께 가자며.일을 할 때 기도하라. 고단하고 팍팍한 삶일지라도 나의 일, 나의 땀과 눈물이 결코 헛되지 않도록 누군가의 희망이 되고 누군가의 빵과 포도주가 되도록 따뜻한
우리동네 숨겨진 이야기
변광섭
2018.09.06 20:36
-
(동양일보) 숲은 스스로 그러하다. 사람의 얄팍한 지식이나 인공의 잣대로 잴 수 없는 그들만의 언약이 있다. 나무들의 밑동이 물안개에 잠겨있는 새벽 숲은 비밀이 많다. 그 비밀은 가깝지만 멀리 있어 손에 잡히지 않는다. 스스로가 그 비밀을 말하지 않는데 물안개 사라지고 햇볕 든다고 알 리 없다.마른 숲에 들어가면 제각각의 냄새를 토해낸다. 늙은 숲은 그 냄새가 깊고 젊은 숲은 가볍지만 선명하다. 계곡 깊이 들어갈수록, 숲이 우거질수록 음이온과 테르펜과 피톤치드가 가득하고 징징거린다. 음이온은 폭포나 계곡의 물가에서 분자가 격렬하게
우리동네 숨겨진 이야기
변광섭
2018.08.30 19:35
-
(동양일보) '구름이면 좋겠어. 올 여름은 너무 질기고 뜨거웠어. 도시의 풍경도 숲들도 숨이 막히고 기진해 있으니 보석같은 단비를 몰고 올 구름이면 좋겠어. 산들바람이면 좋겠어. 고단한 하루, 갈피없는 나그네의 진한 땀방울 식혀주는, 사랑하는 내 님과 함께 찾아오는 산들바람이면 좋겠어.꽃이 되면 더욱 좋겠어. 자신의 몸무게보다 몇 백배 더 무거운 흙을 비집고 일어나 옥문을 여는 맑고 향기로운 그 처녀성의 신비가 온 세상에 젖고 스미며 물드니 꽃이 되면 좋겠어. 밤하늘에 빛나는 별, 고향의 뒷산을 지키는 참나무, 늘 푸르고 향
우리동네 숨겨진 이야기
변광섭
2018.08.23 21:42
-
푸른 산에 소나무가 없으면 푸른 산이 아니다. 산이 높아야 골이 깊고, 골이 깊어야 큰 강을 만들 듯이 소나무가 있어야 산이 되고 숲이 된다. 올 여름은 왜 이리 뜨겁고 질긴지, 밤마다 외로움은 헛헛하고 느린지, 그래도 견디며 여기까지 왔는데 견딤이 쓰임을 만든다고 했던가. 골이 되고 숲이 되고 큰 하늘, 큰 강물이 되었다.소나무의 옹이진 아픔, 붉게 빛나는 슬픔과 용기, 이 모든 것을 딛고 진한 향기 푸른산을 지켜왔듯이 이제는 내가 네 곁으로 가야겠다. 한 그루의 소나무, 끝끝내 푸른 산이 되고 푸른 기상이 되어야겠다. 그 맹서를
우리동네 숨겨진 이야기
변광섭
2018.08.16 21:36
-
신선이 노닐던 구곡, 세월도 풍경도 사람의 마음도 한유롭다.(동양일보) 항상 그랬다. 꽃들은 저마다의 방식으로 피고 지는데 그 꽃을 쳐다보는 사람을 향해서 피어있다. 숲속의 성긴 나무들 사이의 꽃들도 언제나 나를 향해 고개를 쳐들고 맑은 미소로 반겼다. 그날도 그랬다. 소나무 숲 가득한 동산에 오르자마자 숨죽이고 있던 진달래가 일제히 나를 향해 기립박수를 쳤다. 화들짝 놀라 멈칫거렸다. 그새를 못 참아 꽃들은 내게 연분홍 물감을 흩뿌렸다. 나는 그곳에서 알 수 없는 황홀감에 온 몸이 감전되었다. 생애 첫 숲속에서의 오르가즘이었다.
우리동네 숨겨진 이야기
변광섭
2018.08.09 21:06
-
동양일보는 3일부터 매주 금요일 변 광섭 작가의 ‘우리동네 숨겨진 이야기’를 연재합니다. 때론 밝고 경쾌한 수채화처럼,때론 그 윽한 여백을 풍기는 수묵화처럼 충북 도 처에 숨겨져 있는 이야기들을 그려내는 변 작가의 경쾌하면서도 그윽한 필치는 사물의 본질을 꿰뚫는 혜안까지 더해 독 자들에게 자연을 읽는 재미를 건네 줄 것입니다.변 작가는 문화기획자 겸 에세이스트 로, 세계일보 기자로 활약한 바 있습니 다. 청주시문화산업진흥재단 부장과 동 아시아문화도시 사무국장을 역임했으며 저서로는 ‘즐거운 소풍길’, ‘우리는 왜 문 화도시를 꿈꾸는가
우리동네 숨겨진 이야기
변광섭
2018.08.02 21:0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