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혼에 집 나서네 먼 길 떠나네보잘것없네 지난날의 모든 것 모았어도작은 보자기 하나도 채우지 못하네이제사 알 듯하네지나온 길 결코 짧지 않았네무성한 숲 그늘 축복의 계절마다황홀함에 취하여 세월은 가고나를 위해 밤잠 설치던 몇 사람그 거룩함으로 예까지 이르렀음을미처 깨닫지 못했네쓸쓸함이 얼마나 빛나는 유업이었는지를먼 길 떠나며 비로소 나를 보네어둠은 큰 거울이었네△시집 ‘다시 바람의 집’ 등
오랜만에 비 내리는 교외에 나와인적 없는 들길을 걸어봅니다함초롬히 비에 젖은 강아지풀도 보이구요예쁜 각시붓꽃도 보송한 민들레 꽃씨도맑은 눈을 글썽이며 젖어 있어요물 불어 오르는 도랑가에는개박두더지도 민달팽이도 분주합니다벌써부터 버들잎들 몰래 숨어서덩달아 속내까지 몸을 적시구요꽃 다 떨군 조팝나무도 빗속에 조금은 처량합니다나도 껑충한 방동사니풀 한 포기 쯤으로 서서종일 빗속에 젖어보고 싶은 날 있습니다젖은 눈으로 세상을 적시는 것들 바라보며대견해서 함께 빗물에 젖어보고 싶은 날 있습니다 △시집 ‘바람연습’ 등
쇠보다 무거운 고요천년을 묻어둔 채 비바람 지는 잎에눈물마저 외면하고 누리의 복판에 앉아맑은 골을 지킨다. 꿋꿋한 황소의 등에호수처럼 실린 하늘 산자락 늘린 폭에상당별 길러내니 낮은 듯 깊은 반석을어느 누가 아는가. △시집 ‘사모곡’ 등
우리가 만난 것은황사 이는 유년의 언덕언제나 혼자였다오래도록 거기 서서돌아서 가는사람들의 무거운 발걸음만가슴 가득 새기고 있다.눈물 한 방울향나무로 자라나고또는 종아리를 감아도는흙탕물의 어리광가시 여린 장미로 피어나고남들은 하염없이 달려가는데때아닌 적단풍 한 잎 손 흔들고우리는 언제나엎디어 혼자 만나야 한다.아아 그 자리에 엎디어오도가도 못하고 꽃피우고 잎 피우고눈물마저 흘리며 △시집 ‘가을사랑’ 등
산처럼 큰 은행나무가사는 중앙공원 노랑 잎들만으로도 숲이 되고계곡 물소리 나고 바람이 한 번 세차게 울면우수수 떨어지는 세월 우주의 나뭇잎들이 다 벗는 듯은행나무 아래서은행비 맞는 오늘은은행 알로 환생하고 싶은 날 △시집 ‘갈대의 잠들이 모여 섬이 된다’ 등
무심천 물길을 따라노을꽃 환히 타오른다억새꽃 흩을 대로 흩고허리 반쯤 굽어서야발부리 돌아나간 도랑물낮은 목소리에 귀를 적시는 봄.불혹 지나 쉰 고개를 넘어이순의 강가 다다르면검디검은 머리카락 반백으로 물들고사랑도 넉넉히 길들어 강줄기로 넘쳐흐를까.고개 숙여 지나온 길 더듬어 볼 수 있을까발자국 어디엔가 가시로 박힌 낭자한 선혈모래톱 맑게 씻기듯 헹궈질 수 있을까.△시조집 ‘그래, 섬이 되어 보면’ 등
봄바람 싹 틔운 무심천변엔벚꽃 사람꽃 흐드러지게 피누나.우암에서 흘러내린 여름속으로잘 익은 열매 하나 지혜롭다.달 여울 길게 늘인 그 하늘가고향이여 청주, 부르는 소리물안개 자욱한 길을 건너서만나는 함박눈 묻어나는 언어여.△시집 ‘풀과 풀잎’ 등
우암의 산허리 서성대던 먹장구름이마침내 내려와 몸을 푸는 강강江이라 불리는 것도 욕심인 듯하여내川로서 흘러 그만인 무욕의 몸짓해오라기 한 마리,에둘러 길 일러주는여기가 거긴가 서원경 옛터동서를 가로질러 남북으로 흐르다세월이 하자는 대로 서쪽으로 휘어진 물길변해도 변치 않는 것이 고향이어서언제고 돌아갈 수 있는 내 사금파리의 유년가진 게 없어 세상살이 갑갑해질 때모서리 진 삶의 부피가 버겁게 느껴질 때언제고 머물 수 있는 내 사유의 냇가오늘, 물 갈대 비에 젖는여기, 무심천 변생의 등짐을 적시며흐린 세상 건너고 있다.△시집 ‘남은 눈
산까치둥지처럼덩그마한 보살사쇠복소리여울과어우러 울음일제수련은속세를 털고노을로 물이 든다△시집 ‘무지개’ 등
저절로 날개 돋쳐어디론가 날 것 같다두텁게껴입은 시름누각 아래 벗어놓고홀연히신선이 되어하늘 높이 솟겠다한 층만올라서도이리 멀리 보이는구나땅에다 눈길을 박고온종일 쥐어짠 날은살며시 까지발 떼고먼 데 한 번 볼 일이다△시집 ‘창공에 걸린 춤사위’ 등
어느 길로 오시렵니까잉잉거리는 내 안의 바람에도시방 삼세 가득한 임이시여어디쯤 가야만 친견할 수 있으리까하얀 그리움만 아스라이 피었다가 질까 봐자꾸만 수줍움이 번집니다임 찾아 나서는 길어디쯤이면 주저하지 않을는지요천지를 가득 메우는 미소를 보며찾아온 얼굴에길을 확인해 주는 오늘잃어버린 꿈 찾아 이 어둠 속에서도앞만 보고 걷느라내 모습 잃었습니다돌아설 수 없는 꼭 이만큼의 거리에서환희 속 부서지는 번뇌를 봅니다여름이 반란하는 이 팔월야윈 비수 한 자루처럼 남게 될지라도바람 불면 구름이 되고비 오면 온몸으로 맞고 기다립니다△시집 ‘산을
고단한 연대 속에사무치는 흐느낌이방아품에 젖은 적삼저리고 시린 상흔傷痕하얗게귓뿔 동여매고걸어온 길 한恨된 시름피맺힌 울음으로가슴치며 난간 비벼고개들어 입 깨물고개천물도 산을 바라긴 세월몸서리 치는눈을 뜨는 저녁노을웅킨주먹 쥐는 소리소달구지 일어선다.군살박힌 여문 바닥굽굽이 혈맥으로긴 탯줄외진 다리길에별을 심는 물소리△시집 ‘나팔꽃’ 등
웅크리고 있던 몸슬픔의눈금을 그린다주체치 못하는 눈물마음의 길을 내고 있을까애절한 뻐꾸기 울음 흐르는이 밤잔물결로 오는 달은온 밤 물속 드나든다숨죽여 지켜보던산도 바람도놀란 가슴이다풍경을 압도하고번뇌 씻어 내는목탁소리는 더 커진다숨어든 생각들은차가운 바람만 감기고문득 고개 드니청빛 밤하늘엔잃어버린 미소 꿈틀댄다 △시집 ‘산을 보다가 길을 잃었다’ 등
세상은어둡고 질퍽이는 것진흙탕 인연 속에 사는 거다부모라는 인연으로양수 속 깊은 곳에서 태어나머리를 내밀며 하늘 꿈을 꾼다수많은 바람먹고 마시는 여정 길에서연 잎 위에 도르르 굴러 내리며속세의 빛을 품는다기린 목을 높이 세워흰 빛 붉은 향을 흔들며나그네들 쉬어 가라 미소 띠운다생의 한 복판에냄새나는 가슴을 활짝 펴 놓고눈물 엉글엉글 걸쳐놓은 살결에평안과 사랑 그리고 자비가 태어났다△‘해정문학회’ 동인
처음으로 한 발자국 내딛으며친구는 말한다그 시절 돌덩이를 옮겨 놓으시던 어르신들도몰아쉬던 숨을 돌리며씻어냈을까 등을 타고 흐르는 강물 같던 땀줄기피멍든 가슴 벗겨져 흐르는 핏줄기그럴수록 짓눌러 파고 드는 무게감한 덩이 겨우 겨우쌓아올리고는 고개 들어 별들을 보았을까까맣게 기다리던 막내딸의 눈빛을 알아챘을까마침내 부서진 어깨 위로 마지막 소망을 올려 놓으며까무룩 멀어져 가는 기억 속으로하늘로 오를듯구름을 향하던 그 목소리아버지 찾는 소리를 들었을까들녘에 물 무지개를 뿌리며천년을 이으리라던 그 소리를 들었을까△ 시집 ‘어머니의 새벽’
늘 가난한 그리움은억새풀 끝에 흔들리지만가을햇살보다 더 고운아버지 말씀은 여귀풀보다 붉고고구려 병사보다 강하구나수업료를 가슴에 넣고막 버스로 산모롱이를 도는데아버지는 넘어진 나락을 세우고서산국화는 철철 소리 내어 우시고나를 떼어놓지 못 하던어머니 목수건이 갈비에 젖는구나그래도 어쩔 수 없었네우리 식솔이 너를 그곳에두고 온 것은△ 시집 ‘태양일기’ 등
어설프게 덤비는 게 아니었다농사 중에 가장 쉬운 게고구마 농사라고 하여이장님의 자문을 받아그럴듯하게 꾸며놓은 밭은바라만 봐도 흐뭇했다주말 아침이면 흥얼거리며밭으로 달려가면서도나눠먹을 친구도 생각하고어릴 적 뒷방에 발을 쳐놓고새 봄까지 깎아먹고 구워먹던 추억에고소한 향수까지 느꼈는데초보농부를 알아보는 지느닷없는 멧돼지 습격으로밭은 초토화 되었다농사는 하늘이 도와야 된다고 했는데이젠 산짐승까지 도와줘야싸값이라도 건지지세상에 만만한 것은 하나도 없다△ 시집 ‘달래강 설화’ 등
꽃잎 떨구지 않는꽃이 어디 있으랴향기 없이 피는꽃이 또한 있을까잠깐의 찬람함으로오만하게 세상 살다가일순 허무하게 등진꽃들이 어디 한둘이랴여름내 온몸 달구어꽃잎 매달고 있다가바람이 떠난 빈자리이승 환히 밝히는 꽃꽃잎 떨구지 말기를석달 열흘 지나도록……△ 시집 ‘이별없는 이별’ 등
나무 향에 가려진 흑심이깎을수록 드러나 가다듬을수록예리한 문자가 되고 무심한 낙서로고전의 아리따운 얼굴을 떠올려운명의 교향곡을 연주합니다 백지에 담아낸 사랑의 줄글을설렘으로 곱게 접어대문 앞에 다가서서 지워도 되는 줄 알지만다시는 새길 수 없는 심정으로그녀의 앞마당을 훔쳐봅니다 △ 시집 ‘네 이름을 부른다’ 등
저희가 고통받는 것은하나님이 저들을 사랑하사……마태복음 펼쳐들고 갔을 때절뚝거리며, 절뚝거리지 않는사람들 사이로 흰 눈이 내리고 그 길을걸어서 네가 왔다. 절뚝거리며눈 내리는 세상을 웃으며너의 불구가 하얗게 하늘을 넓혀갈 때선샌니 … 누 … 누흐흐 … 누으반모음으로 가리키는 네 손끝에서펄펄펄 천국이 흩어지고수북이 쌓이는 점자點字더듬어 확인할 수밖에 없는 세상을눈이 내린다. 내려도 내려도덮을 수 없는 어둠 속을네가 간다. 절뚝거리며절뚝거려도 결코 흔들리지 않는 걸음걸이로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