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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칠 안개만 끼더니 한밤을 참지 못하고 비 옵니다 눈이 내린다 해도 이상한 날씨는 아닙니다 더 추워지고 붉다가 나뭇잎은 흩날리겠죠 포기나 버림도 구실을 들어 겨우 치릅니다 사랑이 가는 일도 마지못합니다 겨울만 눈앞입니다 안개가 씻긴 자리에 약속처럼 내일이 드러난다면 아침 인사는 어떻게 드려야 할지 밤새도록 걱정만 팔자입니다
아침을여는시
동양일보
2014.11.26 21: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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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니는 평범하시지만, 국을 끓이면시래기국에도 달이 뜬다콩나물국에도 별이 뜬다내일은 북어국에 초승달을 띄워 달래야지
아침을여는시
동양일보
2014.11.25 20: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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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나가버리는짧은 해후처럼 서늘하다일단 멈춤의 신호처럼낯선 시간위에 선 외출
아침을여는시
동양일보
2014.11.24 20: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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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롭지 않은 사람 어디 있다고외롭다 외롭다고 울고 있느냐서산에 해는 지고 밤이 밀려와새들도 둥지 찾아 돌아가는데가슴속 빈 자리를 채울 길 없어지는 꽃 바라보며 홀로 섰느냐외롭지 않은 사람 어디 있다고외롭다 외롭다고 울고 있느냐.
아침을여는시
동양일보
2014.11.23 20: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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흰구름 좀 보거래이도토리가 ‘툭’ 떨어진다 도토리 줍거들랑공작시간에 만들기 하거래이 나뭇잎 사각이는 거 들리지다람쥐 오르는 거 보이지 남은 도토리는 내놓거래이도토리묵 쳐 먹게시리 교장 선상님할머니 갖다 드렸당게요 허허참 도토리
아침을여는시
동양일보
2014.11.20 2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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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발 소리가 들리지 않았다전쟁터를 떠나 살아본 적이 없어마당엔 창칼이 뒹글고닳은 숫돌만이 이슥하다 둥지에 박힌 새 털이습을 먹어 굳어진 것처럼고된 이불이 널려진최후의 전선 민병이자 농군이 들어왔다철퍼덕잇몸으로 훑고 있는저 한 끼 홍시가 떨어졌다 주변이라곤 아무도 없는진심 한 덩이가주인을 충직하게 받들었다 주고받음에 까다로움이 없어평등한 평화다
아침을여는시
동양일보
2014.11.19 20: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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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풍잎하나 떨어져툭, 치고 가는데 묵묵부답 장독은어린 햇살에눈, 너무 부시다
아침을여는시
동양일보
2014.11.18 20: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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잎새의 길을홀로 건너야 한다 아버지 장례 이후어머니 눈물 잦으시다.수의를 다 지을 때까지는의연하게 앉아서죽음을 입혀 보낼준비를 하고 계셨다 지는 잎들은 제 몸의물기란 물기 다 지우고참로 가볍게 떨어진다.가을 한낮, 나뭇잎들은분분히 떨어져 내리며햇살의 길을환하게 밝힌다잎새의 길에는 아무도 동행일 수 없다다만 공중에서두어 번 몸을 뒤채이며지상에 닿는다 눈물겹다.
아침을여는시
동양일보
2014.11.17 20: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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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도 아버지가 사골을 곤다살점이 허물어지도록뼈 마디마디 바다에 담고 파도로 등대를 키워내며세상 한복판에 불빛을 떠안고수척해가는 당신의 몰골 게거품을 물고 돌아가는자식들의 서운함도언제나 아버지의 몫이다 어둑한 살림 속에서수없이 꼽아보는 주먹구구뼈만 남아 연명하는 당신의 일상 꼭대기에 나무 몇 그루 키우자고앙상한 자신의 골밀도를 모른 채두고두고 우려내는 국물 짙은 해무와 어둠 속에서해풍이 할퀸 자국도 가슴에 숨기며매일매일 아침을 견져오는그래 바로 아버의 섬이다
아침을여는시
동양일보
2014.11.16 20: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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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바람꽝, 꽝헛꿈 꾼 자리 우리는 구름텅, 텅머물다 간 자리 우리는 낙엽쓸, 쓸술 마시는 자리 우리는 사랑와락단풍든 자리
아침을여는시
동양일보
2014.11.13 20: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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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펄 같은 빈 가슴에 난바다를 가둬놓고잉걸빛 해를 길어 물의 뼈를 씻기던 이하 깊어 가늠할 수 없는 눈빛 늘 그윽했네 헛배 부른 달무리가 잠 못 들고 뒤척이면검게 탄 그 이마에 주름살이 일렁였지새도록 맨주먹으로 일어서던 파도소리 그런 날은 잠든 척 몰래 울던 아홉 살이기억의 씨줄 날줄 반백으로 뒤엉켜도코 닳은 장화만 보면 와락, 끌안고 싶은 짜디짠 한 세상을 삽질하던 울 아부지하얀 별을 경작하러 하늘 밭에 가셨는지설 잠근 소금창고 문, 이 밤 또 덜컹대네
아침을여는시
동양일보
2014.11.12 20: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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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식간에 벌어졌다한걸음이 더 나갔다 아스라이 들려오는귀를 찢는 채찍소리 외나무 다리를 타고아침이 걸어온다 키를 쓴 동자승이대문 밖을 서성인다 알 듯 모를 듯한지도 한 장 그린 죗값 맨살에 우박이 내린다햇살도 붉어진다
아침을여는시
동양일보
2014.11.11 21: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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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메이크된 유행가, 가사는 그대로인데 음정과 박자가 바뀌었군요 젊은 작곡가들이 노래가 처음 만들어지던 세월을 리메이크한 것일 뿐 변한 것은 아무것도 없지요 한때 무대 위를 화려하게 장식했던 노래, 세월 흐르자 강물 속에 가라앉았다가 수면 위로 떠올라 다시 흐르는 거지요 다시 예전 사람들과 요즘 사람들이 섞여 함께 바다로 향하는 것이지요 예전보다 빠르게, 외래어도 섞어 부르네요 보세요, 펑퍼짐한 청바지 입은 늙은가수들이 다시 기타 들고 길을 나서고 있어요 젊은 가수들도 리메이크된 악보를 들고 무대에 올라가고, 젊은 관객들은 제 부모들
아침을여는시
동양일보
2014.11.10 2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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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 한 방울의 체액까지제 눈자리에 쏟아 붓고제 빛깔 태양이 흡입할 때 까무룩 잠이 든다허공으로 내리뛰는 저 짧은 외마디쉽게 지워지지 않는 소묘들의 표류처럼골목을 돌아나와 살을 포갠다아침마다 낙엽을 쓸던 철이 할배볕 좋은 묵정밭 빈 집에 드신다명년 봄 저 나무들 짧은 혀를 내밀어바람을 노래할 때 짧은 머리를 한 할배는떼의 눈을 빌려 이승을 엿보리라 잎 지는 산 중턱에 흙이 되는 주검을 본다잎 지는 산 살에 살 오름을 본다내일을 향한 긴 장례행렬베옷을 입고 편편翩翩히 눕는다 태양계를 벗어나지 못하는 시간만이사상가가 된다
아침을여는시
동양일보
2014.11.09 20: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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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막 걸음마를배우려는아이가 자작자작 비틀거린다중심을 잡으려고 두 팔을 하늘로 번쩍작은 발을 뗄 때마다 길도 따라 뒤뚱뒤뚱아이가 잡고 있는 것은 중심이 아니라하늘에서 가져 온 투명날개도톰하고 보드라운 발에 힘을 주고첫 발자국을 바닥에 그리고 있다입가에는 하느님의 미소 가득아기는 신이나서구름 위를 걷는지 꽃길을 걷는지천사들과 놀던 곳을 기억하는 걸까걸음마 내내 까를까를쳐다보는 엄마도 천사얼굴이 된다
아침을여는시
동양일보
2014.11.06 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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뱀이다뱀의 움직임 소리를 들었다소스라치게 놀라 달아나는 개구리들몇몇은 먹이가 될 것이다 깊이더 깊이 잠수해야 한다 그러나그들에게 잠수는 초년병처럼 어줍다숨이 가쁘다 오늘 다시못 속에 잠겼던 바위 하나가 뾰족이 고개를 내민다오, 세상은 저 등을 보이며 돌아누운 하늘이다불러도 대답 없는찔러도 피 한 방울 나지 않는 철옹산성이다그 하늘 밑 거죽뿐인 연못,낙엽처럼 몸을 구부린 개구리들이겨울 빨래처럼 굳어 죽어 가도가뭄의 끝은 보이지 않고저 독한 것은 그들의오랜 종족의 습성마저 빼앗고 있었다
아침을여는시
동양일보
2014.11.05 20: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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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틈으로 살짝 들어온노란 은행잎의자에 곤히 잠들어 있다얼마나 힘들었을까바람에 기대어 온야윈 그를 물끄러미 바라보며깰까 봐 선뜻 앉지 못한다일곱 빛깔 꽃잎으로영혼을 물들이던 날태양을 잃고 절규하던 푸른 날개허리 굽도록 안았던품안의 자식들얇은 속눈썹 아래 젖어 있다그 속에 어머니그리고 내가 있다.
아침을여는시
동양일보
2014.11.04 20: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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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의 끝은 소전리 교회 사과도 낙엽도 익어서 떨어진 하늘달랑 매어 달린 이파리 없는 감들풀어놓은 빨랫줄로 기어가는 저 숲길담 모퉁이 돌아구불구불 기어온 시내버스도랑물에 새파란 미나리 낮달 다람쥐 쏟아진 은행알 아무도 줍지 않아더욱 고요한 산골어머니 옆구리처럼 편안하다 한 바퀴 살다옷깃 피곤할 즈음 다시 찾고 싶은충북 청원군 문의면 한지마을 벌랏
아침을여는시
동양일보
2014.11.03 21: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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멍들고 나서야꽃이 되는 증표 하나 거기 있다 푸른 멍으로 촘촘한 가시를꽃인 양 피우고서야비로소 내내 그리워했었노라고씨앗 같은 한 마디 고백할 수 있는사랑 하나 거기 있다 누군가를 사랑하는 일은결국 내 안으로 인내의 가시를조금씩 키워내는 일 나를 조용히 숨 죽일수록깊어져 가는 푸른 멍!푸르고 부드러왔던 기억은 잠시아프지만 성글게 여물어 가는사랑이었다
아침을여는시
동양일보
2014.11.02 2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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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아버지는 옹기장이다쇠소깍물 길어 마른 흙덩이 빚으면흘러가는 햇살이 저 혼자 꿰어졌다온몸에 구름으로 덧칠해 가면서빗살무늬가 내어 준 어느 별의 길을 따라 걷다보면아버지 손에서 단풍들던 붉은 옹기들,바람도 숨 고르며 쉬어가는 날맨발로 걸어오던 별빛마저깊어진 옹기 안에서 잠들곤 했다지워져가는 아버지의 손금 그리우면빗살을 꺼내 하나하나 들춰보라겹겹 포개진 빗살 속에는아득한 시간의 길이 보이고뭉그러진 까만 손톱으로세상 모든 꿈틀거리는 것들을 담으셨던수많은 아버지의 아버지들이 보인다지금 곧 고두기엉덕에 가보라잘 구워진 아버지들이흙빛으로
아침을여는시
동양일보
2014.10.30 19:5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