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군가 불러주지 않아도누군가 오라하지 않아도스스로 꽃이 되어향기가 되어네게로 가지 그대에게 가지밝은 대낮엔그늘진 곳으로어둔 밤이면등불을 들고네게로 가지 그대에게 가지누이들 꽃처럼 울던 자리천사처럼 웃던 자리마음으로 어루만진 100년이네어둔 밤 등불 비추던 100년이네아픈 자리 쓰다듬고편치 않은 자리 보듬어등불 들고 꽃피운 누이들가슴으로 어루만진 100년누이
길을 잃고 나서야 나는누군가의 길을 잃게 했음을 깨달았다그리고 어떤 개미를 기억해냈다눅눅한 벽지 위 개미의 길을무심코 손가락으로 문질러버린 일이 있다.돌어오던 개미는 지워진 길 앞에서 두리번 거리다전혀 엉뚱한 길로 접어들었다제 길위에 놓아주려했지만그럴수록 개미는 발버둥치며 달아나버렸다길을 잃고 나서야 생각한다사람들에게도누군가 지나간 자리에 남는냄새같은게 있
앞 산 녹음이마당까지 내려와담록을 풀어놓았다따라 내려온 매미도고향 같은 집을 짓고터를 닦는다옥수숫대가 성큼담장을 넘었으니이제 참새떼들이웃집 눈치를살피지 않아도 되겠다나도 뻐꾸기 둥지 같은사랑 하나 엮어서녹음으로담을 쌓았으면 좋겠다
태양의 과일이라는 토마토가과일이 아니고 채소라는 말을 들으니, 몸속에수평선이 돋는 느낌이다하늘과 바다를 갈라놓는 수평선이 아니라, 그것을하나로 만들어 주는 수평선, 육감적인 과일이라는 느낌을부드러운 질감의 식물성으로 혼합해 주는 수평선그러면 이제 저 토마토를 과일채소라 부르면 어떨까?과일과 채소라는 두 개의 명칭을, 그렇게 하나로 융해시키면 어떨까?보라,
늦은 밤 기차를 타고 비 오는 도시를 지나가다철로와 길들이 검은 비닐로 코팅되는 중이다(지나친 번들거림)가로등도 우수에 차 한껏 부풀고 있다허공 중에, 슬픔 속에외부시계를 차단할 듯이늦은 귀가 차량의 긴 행렬들 그들의 눈마저도 붉다누구를 위해 저 기다림 조차 그토록 슬픔에 차 있는 걸까늦은 밤 텅 빈 기차 비 오는 도시를 지나가다
가파른 비탈만이순결한 싸움터라고 여겨 온 나에게속리산은 순하디 순한 길을 열어 보였다.산다는 일은더 높이 오르는게 아니라더 깊이 들어가는 것이라는 듯평평한 길은 가도 가도 제자리 같았다아직 높이에 대한 선망을 가진 나에게세속을 벗어나도세속의 습관은 남아있는 나에게산은 어깨를 낮추며 이렇게 속삭였다.산을 오르고 있지만내가 넘은 건 정작 산이 아니라산속에 갇힌
자작나무처럼 나도 추운데서 자랐다자작나무처럼 나도 맑지만 창백한 모습이었다자작나무처럼 나도 꽃은 제대로 피우지 못하면서꿈의 키만 높게 키웠다내가 자라던 곳에는 어려서부터 바람이 차게 불고나이 들어서도 눈보라 심했다그러나 눈보라 북서풍 아니었으면곧고 맑은 나무로 자라지 못했을 것이다단단하면서도 유연한 몸짓 지니지 못했을 것이다외롭고 깊은 곳에 살면서도혼자 있
여름을 손짓하는 푸르름 속에바쁜 세상살이 쉬어 가라고늙은 소나무세상이 시끄럽다 말하지 않는다철없이 개구장이 돌팔매자동차의 매연스멀대는 벌레 짓나무는 그늘 자리 쉼 자리 내어주고오는 사람 가는 사람 지켜보며 반긴다삶의 뒷 모습을 돌아보고나를 바라보니길이 턱이다
가끔은 아주 가끔은내가 나를 위로할 필요가 있네큰 일 아닌데도 세상이끝난것 같은 죽음을 맛볼때남에겐 채 드러나지 않은 나의 허물과약점들이 나를 잠못들게 하고누구에게도 얼굴을 보이고 싶지 않은부끄러움에 문 닫고 숨고 싶을때괜찮아 괜찮아 힘을 내라구이제부터 잘하면 되잖아조금은 계면쩍지만 내가 나를 위로하며조용히 거울앞에 설 때가 있네내가 나에게 조금 더 따뜻하
엄마 등에 업혀달맞이 간 아이소나무에 달 걸어놓고곤히 잠든 밤스르르 실 풀려중천에 달 떠오르면그리운 사람들이은하수 물결따라달섬을 건넌다쪽배타고 떠난 님어디쯤 오시나등뒤에 잠든 아이가 놀라빈손으로 달을 훔치며잠꼬대를 한다
간밤에 비 내리더니아침이 꽃 천지라이 골목 저골목개나리에 목련꽃 벚꽃이 방긋방긋저 쪽에 덩굴장미 이쪽에 라일락웃기시네! 순서대로 나와야지잎이 나고 꽃이 피어야지꽃이 피고 잎이 나오다니봄비가 싸움을 붙이느냐서로가 먼저라네잎서면 어떻고 뒤서면 어떠리봄 동산은 그대들 있어 좋으리
봄이 떠나가는 날꽃이 지는 것을보다가그만 고독해져서전화를 걸고만 싶었다 삶을 찬란하게노래하던꽃들이 박수갈채도 없이떨어져갈 때함께 있고만 싶었다 이별할 때는모든 것이이별할 이유가 된다 이별할 때는모든 것이 이별이 된다
봄은 아리다가끔은 그렇다구덩이에서 꺼낸봄 감자를 날 것으로처음 먹을 때처럼목이 아리다가눈이 아려져오고마음이 싸해진다아리다는 건막연한 설움이다설명할 수 없는
말이 되지 않는그리움이 있는 줄 이제 알겠습니다말로는 나오지 않는 그리움으로내 가슴은 봄빛처럼 야위어가고말을 잃어버린 그리움으로내 입술은 봄바람처럼 메말라갑니다이제 내 피는그대를 향해까맣게 다 탔습니다
봄꽃을 보니그리운 사람 더욱 그립습니다이 봄엔 나도내 마음 무거운 빗장을 풀고봄꽃처럼 그리운 가슴 맑게 씻어서사랑하는 사람 앞에 서고 싶습니다조금은 수줍은 듯 어색한 미소도보여주고 싶습니다그렇게 평생을피었다 지고 싶습니다
아무리 숨었어도이 봄햇살은반드시 너를 찾고야 말걸땅속 깊이 꼭꼭 숨은암만 작은 씨라 해도찾아내꼭 저를 닮은 꽃방실방실 피워 낼걸아무리 숨었어도이 봄바람은반드시 너를 찾고야 말걸나뭇가지 깊은 곳에꼭꼭 숨은 잎새라 해도.
봄은 땅과 약속을 했다.나무와도 약속을 했다.그 약속을 지키기 위해새싹을 틔웠다.작은 열매를 위해바람과 햇빛과도 손을 잡았다.비오는 날은 빗방울과도 약속을 했다.엄마가 내게 준 작은 약속처럼뿌리까지 빗물이 스며들었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주기 전에는그는 다만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다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주었을 때그는 나에게로 와서꽃이 되었다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준 것처럼나의 이 빛깔과 향기에 알맞은누가 나의 이름을 불러 다오그에게로 가서 나도그의 꽃이 되고 싶다우리들은 모두무엇이 되고 싶다나는 너에게, 너는 나에게잊혀지지 않는 하나의 의미가 되고 싶다
길이 끝나는 곳에서길이 있다.길이 끝나는 곳에서도길이 되는 사람이 있다.끝없이 걸어가는 사람이 있다.강물은 흐르다가 멈추고새들은 날아가 돌아오지 않고하늘과 땅 사이의 모든 꽃잎은 흩어져도보라사랑이 끝난 곳에서도사랑으로 남아 있는 사람이 있다.스스로 사랑이 되어한없이 봄길을 걸어가는 사람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