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떠남도 아름다움이던 시절기차도 눈 귀가 있어 목이 메었었다눈인사조차 제대로 못 했지만밤안개처럼 안기는그 선연한 모습을계절마다 자라던 그리움의 마디마다에수은등처럼 켜지던그 소녀단발머리 손녀 배웅하는 저 할매 아닌가팔음산* 뻐꾸기한낮 흔드는 연유를 알 듯하다*팔음산八音山은 충북 옥천군 청산면에 있음.△ ‘새로운 감성과 지성’ 동인
아침을여는시
동양일보
2017.07.02 17: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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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중으로 서투르게 날린 부메랑은 금방 추락하고 만다추락하는 것은 보이지 않는 공기를 타고 날기 위한회전력이 부족하기 때문이다살면서 보이지 않는 아픔이나 마음의 억압 따위를딛고 서려는 치열함이 나에게 있었는가한 마리의 새가 공기와의 길항을 통해 날듯이나는 추락을 염려하기보다 추락을 먼저 배워야 한다편안하고 쉽게 살아온 마음의 중심을 꺾어곡선으로 휘어져야 한다추락하는 부메랑, 추락하는 순간의 충격을 되받아다시 솟구쳐서 나에게로 돌아와야 한다한 번의 완성을 위한 여러 번의 비행새나 바람이 익힌 비행술을 찾아촘촘하게 짠 공기그물을 던져 포
아침을여는시
동양일보
2017.06.29 20: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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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문을 지나면 계곡 길지문을 묻히는 바람 같이 산을 오르네바위를 지나고 잡목 숲과 억새 덤불을 스칠 때소소한 바람소리가 책장 넘기는 소리로 들리네몸에 닿은 소리는 내부를 거쳐 데워지고신경을 따라 불빛을 깜박이다 사라지네생각하네초겨울 산사에서 동안거에 든 사람은계곡의 어느 여백 속으로 옮겨 다니다 바람으로 숨는지경을 읽다가 또 무슨 소리가 되어산봉우리 끝으로 가서 자신을 버리는지아니면 겨울의 땅 툰드라 지대에서경을 외는 눈송이로 날아다니는지산을 오르네 자작나무 숲으로 가는 길은희디흰 경의 뼈를 보는 일이네높게 솟아 가지런히 동안거에
아침을여는시
동양일보
2017.06.27 16: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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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풍이 온다는 해거름두 집의 귀를 당겨둥근 집을 짓는 거미어떻게 저 거리를 엮어 놓았나깜깜한 뱃속에는해산하지 못한 책임이 있으리라하여 무너질 줄 알면서도줄을 매며 배부름을 꿈꾸리라배를 곯아본 삶은내일을 오늘 걱정하지 않는다가난한 살림의 두 귀퉁이가허공의 점으로 기울어져 있다△ 시집 ‘꽃따기’ 등
아침을여는시
동양일보
2017.06.26 17: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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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에 그늘이 너무 크게 들어 아주 베어버린다고참죽나무 균형 살피며 가지 먼저 베어 내려오는익선이형이 아슬아슬하다나무는 가지를 벨 때마다 흔들림이 심해지고흔들림에 흔들림 가지가 무성해져나무는 부들부들 몸통을 떤다나무는 최선을 다해 중심을 잡고 있었구나가지 하나 이파리 하나하나까지흔들리지 않으려 흔들렸었구나흔들려 덜 흔들렸었구나흔들림의 중심에 나무는 서 있었구나그늘을 다스리는 일도 숨을 쉬는 일도결혼하고 자식을 낳고 직장을 옮기는 일도다흔들리지 않으려 흔들리고흔들려 흔들리지 않으려고가지 뻗고 이파리 틔우는 일이었구나△ 시집 ‘눈물을 자
아침을여는시
동양일보
2017.06.25 20: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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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지 풀풀 날리며 빨간 버스 지나간다차 허리 탁탁 치며 안내양이 오라∼이한 줄기 흙 비린내 날린 소나기도 오라∼이 닫힌 문이 열리자 쏟아지는 정든 얼굴들파란 철재 교문 위로 넘어오는 종소리에황톳빛 발걸음들이 다급하게 달려갔던 단벌 운동화도 그땐 마냥 좋았었지버드나무 옛 정류장 만삭의 배 내밀듯이토란잎 꺾어 든 아이들 총총히 몰려왔다
아침을여는시
동양일보
2017.06.22 21: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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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된 일기장의 창문을 열고 들어서면거기, 맑고 서늘한 물줄기가 있어어린 버들치 한 마리 살고 있다물속에서도 깨밭을 가꾸는 것인지꼬리를 흔들 때마다 들깨 향이 여울졌다그 향이 좋아 솜털구름 찾아오면함께 손잡고 진종일 산 능선 넘나들다가노을목을 지나 어스름 기슭에서초록 갈기 날렵한 나사말에 올라타고는은하의 굽이를 돌아 마침내삼경三更의 하늘소沼에 이르곤 했다누구의 솜씨일까, 궁륭 가득 명멸하는별 무리들, 황홀하여라부레를 한껏 부풀린 버들치는별자리 돌고 돌아 문패 달기 여념 없더니별똥별 길게 꼬리 물던 어느 날 밤홀연 지느러미 바짝 세우
아침을여는시
동양일보
2017.06.21 14: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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뻘밭을 밟는다, 바람 없는 날염부가 수차에 올라 쉼 없이물의 배를 밟아 내려 소금물을 잡는다서서히 물의 배가 꺼져 내리고까무룩, 산고 끝에 오는 저 졸음햇볕이 소금을 앉힌다,허공 옷을 입힌다연년이 바다에 나가 죽은 자들의눈물이 마르고 응고되고그들의 외마디마저 빛으로 쌓일 때소금꽃이 핀다그렇게 죽은 자들이 오고그렇게 소금창고에선만삭인 염부의 아내도 몸을 풀고 또 풀고바다가 삼키다만, 태양이 녹이다만저 물의 흰 뼛가루, 쌓인다날마다 저 하얀 물을 마시고 하얀 불을 삼키다내 죽으면 아이야, 소금밭에 묻어라쇠도 녹인다는 갯바람에 비석조차
아침을여는시
동양일보
2017.06.20 14: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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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로봉 허허한 달빛 밀려온 어둠을 밝히다세렴폭포 허연 물살 땡볕의 침묵을 때리다구룡사 풍경風磬 바람의 옷을 벗기다눈감은 부처 지나는 길손의 가슴을 치다△ 시집 ‘지상의 은하수’ 등
아침을여는시
동양일보
2017.06.19 15: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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늦도록 숨은 길목 짚어가던 발길이 닿은 곳은문턱 높은 그대 가슴팍이네어스름 속 파고들자목덜미 서늘한 가을밤은 누워서 더 고요해지며낮은 숨결까지도 밀봉해버리네토해내지 못한 몇 마디 구절, 은밀한 가락으로 남아수줍은 해당화 꿈 화진花津 화진花津 새겨놓았는지몸 속 어딘가에 때늦은 꽃술이 피어나 밤새 궁금하였고바람 뒤척이는 머리맡엔 짙푸른 동해가 넘실거리네돋을새김 물꽃 피우며 여념 없이 물 위를 건너뛰다기꺼이 추락하는 물수제비 뜰 때의 돌처럼굽이치며 밀려올 것 같은 내 사랑이 내딛는 걸음기어이 벼랑이어도 좋겠네길빛의 억새 넉넉히 허공에 쓰
아침을여는시
동양일보
2017.06.18 19: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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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자는 검劍이다이렇게 쓰면 깨어나 꿈틀거리는 검劍칼날에 벤 연꽃들이붉은 꽃다발 부케를 던지고 있다햇빛은 나사못처럼 회전하여 수면을 뚫고1/2씩, 1/4씩, 1/8씩 증발하는정오의 논코입귀물풀 사이로 새빨간 금붕어가 헤엄친다 거짓말이다물뱀 둘이 교미하며 껍질을 벗고 있다어제와 오늘처럼죽은 검劍이다이렇게 쓰면 살아나 내 목을 치는 검劍△ 시집 ‘힐베르트 고양이 제로’ 등
아침을여는시
동양일보
2017.06.15 19: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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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해 여름난을 찾아 남쪽 섬에 갔을 때이른 아침 싸목싸목 걷히는 안개초등학교 운동장을 가로질러산 밑에 이르렀을 때동백나무에 개 한 마리 매달려 있었다장정들이 작대기로 두들겨 패고 있었다개 패듯, 개 패듯이란 말!그렇게 맞아 죽은 개가가지 끝에 잉걸불 피우나 보다개가 내지르는 단말마斷末魔가 뜨거워나무는 비명, 비명으로 뿜어낸눈물 낭자한 적막이 땅을 덮고 있었다그래서 동백은 그늘까지도 붉게 젖는다그날이 복날이었는지도 모른다지금은 동백이 피는 계절남녘 하늘이 소란스럽기 그지없다.△ 시집 ‘바람도 구멍이 있어야 운다’ 등
아침을여는시
동양일보
2017.06.14 15: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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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정 넘은 시간에걸려온 전화술에 취해그가 한 말은자귀나무꽃이 피었다는 그뿐이어지는 말없음표가천둥처럼 달려와오래 키운내 뜰의 상심 한 그루 넘어뜨리고그 자리에눈물보다 먼저분홍빛 따뜻한 꽃물이 번져나 이제세월을 믿는 나이가 아니건만올해도자귀나무꽃이 피었습니다△ 시집 ‘지상은 향기롭다’ 등
아침을여는시
동양일보
2017.06.13 18: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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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커멓고 키가 큰 저녁이 성큼성큼 열지 않은 창을 넘어 방안으로 획 들어왔다.주인은 알 바가 아니었지만 아이를 잃어버린 목소리들이 자꾸만 저녁을 불러들이는지곧 문들이 열리고 닫히고, 불이 켜지고, 침묵이 어둠보다 도란도란 키득거렸다.지 애비를 부르며 자란 아이가 지 애를 데리고 모처럼 시간을 내어 놀아주는 숨결이 어느새 유리창 성에로 끼어아이는 자꾸만 앞에 있는 애비를 지 생각대로 얹어 부르고 언젠가 사라질지 모르는 애비를 또 애타게 부르고, 아이가 돌아나간 골목으로 애비로 돌아 나와 가만히 피자마 바람으로 대문간에 앉아 담배를 빼
아침을여는시
동양일보
2017.06.12 20: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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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시 피었다가 해거름에 뚝뚝 떠나는 흰 꽃잎들그러고 보니 엊그제 만개한 水菊도 알약이더군!그걸 아무도 슬픔이라고 말하지 않더군!누군가를 잠시 만나 뜨겁게 살다갔으니△ 시집 ‘쑥의 비밀’ 등
아침을여는시
동양일보
2017.06.08 17: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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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여자로 태어나칠남매 낳고 키운 죄마침내 병을 얻었어도아무도 알아주지 않았다오늘도뒤안에서혼자 울다자식들에게 들켜버린속절없는그 눈빛낮게 피어 있던 꽃엄마△ 시집 ‘다시 바람의 집’ 등
아침을여는시
동양일보
2017.06.08 14: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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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말해서는 안 될더 보여주어도 안 될그대를 향한 그리움 때문에은행잎은 물드는 거죠그대 낙하하는 산하를바라보고 있을지라도까만 풀씨들이 그대 그리워떨어지고 있는 것은 모르실 걸요더 감추어선 안 될더 참아서도 안 될속살 싸늘해진 바람에게잠 못 드는 영혼을 던지고 있는고달픈 그리움을 접고 떠나는白馬山 은행잎을 모르실 테죠△ 시집 ‘태양일기’ 등
아침을여는시
동양일보
2017.06.06 17: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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숱 빠져 훤한 가르마늙는 티가 나나 싶어오른쪽 머리를 쓸어 왼쪽을 덮은 날부터삐딱이 똬리를 트는좌익의 붉은 기운이순을 바라보면 삭을 법도 하거니와하찮은 머리칼조차따따부따 편 가르고그 중간어정쩡 서서 잔머리나 굴리다니△ 시조집 ‘공생시대’ 등
아침을여는시
동양일보
2017.06.04 17: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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붉은 석류노을에 휘어진 꼽추 등날빛을 안고 잠들며내려앉은 장막 위에는초롱초롱 피어나는 꿈아낙들 굴뚝연기 피어낸밤도 깊이 무르 익어가고호롱불 하나 둘 내려앉듯아버지 흥취도 잠들어 가고깜박깜박늙은 지팡이 고개 넘어가듯어스름 길휘청거리며 더듬거린다. △ ‘해정문학회’ 동인
아침을여는시
동양일보
2017.05.31 20: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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잊지 않기 위해서다언제나 곁을 두기 위해서다한걸음에 달려오고 싶어서다뜨거운 입술의 유혹 앞에새치름히 다가오는 그녀바다 빛깔 모자가 잘 어울린다그래, 홀짝 비우고 나면남아있는 미련들은 어쩌란 말이냐파도에 쓸려와 백치 된 포말무슨 핑계로 외면하란 말이냐오래도록 기억하기 위해서다미치도록 느끼기 위해서다온몸으로 빠지고 싶어서다하고픈 말 남아있다면잔에 묻은 여운 속에 던져다오오래도록 간직하기 위해이제 너를 혀끝 깊이 숨겨야겠다△ 시집‘이별없는 이별’ 등
아침을여는시
동양일보
2017.05.30 20:3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