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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이 마르다목이 마르고 어둠이 깊다별들은 각각 하늘 높이 떠있고떠나간 사랑은 다시돌아오지 않는다목이 마르다목이 마르고 길은 보이지 않는다허공엔 창백한 목소리만 떠 있고어느 곳에도 가 닿지 못하는 발자국 소리는끝끝내 잠들지 못한다목이 마르다목이 마르고 새벽은 멀다
아침을여는시
동양일보
2014.02.27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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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직의 낭떠러지를 맨주먹 맨발로 오른다당신에게 가는 길, 혹은 내게로 오는 외골목을주황나팔 내어 불며 간다 독을 품고 온다방향없이 가두는 독, 나는 불륜이라 명명했고당신은 사랑이라 칭했다소문은 누구에게나 치명타다내게서 찾는 것일까담 너머 금낭화 씨앗이 영글다 떨어지고 함께 거닐던 샛길이폭풍우에 짓밟힌다어쩌면 한 잎어쩌면 한 줄기어쩌면 한 뿌리통꽃으로 이우는
아침을여는시
동양일보
2014.02.26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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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 아이가 자다 빠져 나온 잠자리거푸집처럼 부푼 이불이애벌레의 동공으로 고개를 쳐든다간 밤 아이가 만들어 놓은웅크린 흔적들뻣뻣하게 굳은 석고붕대 같은고치의 무게만큼이나 그 속에서 떨었을,아이의 잠이 실타래를 펼치며올올이 흩날린다오래지 않아 산다는 게거추장스러운 옷 한 겹을 벗어던지는 것처럼밤낮으로 잠의 나이테를 갈아입는거라고아이는 잠에서 깨면 알 수 있을
아침을여는시
동양일보
2014.02.25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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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도 가을 하늘 같은 파아란 웃음을 돈사려고 서산장터에나가네 한바지게 풀어놓고‘ 진짜 웃음 사가유 원조 바보 웃음이유 싸구려 싸구려유’ 목이 터져라 호객을 하지만 이젠 서산촌놈도 서울사람 뺨치는 깍쟁이가 되어서 싸구려 웃음 따위는거져준다 해도 쳐다보지도 않네 값비싼 서울의 냉동웃음에 인이 박힌 아이들은 더더욱 들은 척도 하지 않네네팔 산골이나 몽골 초원의
아침을여는시
동양일보
2014.02.24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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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수사우나 노천탕 속에 몸을 담그고 있는데젖가슴 앞에서 문득 만월이 출렁대는 거였다끊임없이 물살을 밀어내며수천의 손들이내 몸을 뒤집다가 일으켜 세웠다가한순간 둥둥 떠오르게 하는 거였다등 뒤에 벚나무가만개한 그림자를 펄럭이며물속으로 걸어왔다출렁출렁부풀어 오른 그림자들이흘러 넘쳤다내 몸을 빠져나간 그림자가노란풍선처럼 떠 있는 봄밤이었다
아침을여는시
동양일보
2014.02.21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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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금 무슨 일이 일어난 것 같은 느낌이 들어요달리는 차가 눈을 감고 고양이는 무엇을 찾는지홍매화가 먼저 꼬리를 붉게 부풀립니다새로운 것에 흥분하면 고양이는 좀 전의 차 소릴듣질 못한데요 그것을 관문이라고 하나요어제 저녁엔 새순 터지는 소리에 귀 기울더니이젠 길에서 죽어간 제 몸을 그리워하고 있네요지나간 차들이 치고 갔을 갈색 무늬고양이를잠시 망설이다 나도
아침을여는시
동양일보
2014.02.20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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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 추위에밤새 내린 눈이발갛게 얼었다날개 접은 산새는뒷산 숲에 내렸고징검다리 건너던 냇물도바위아래 새우잠 들었다집도사람도꽁꽁 얼어붙어서시골길엔 발자국이딱 한번만 찍혔다
아침을여는시
동양일보
2014.02.19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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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을 거슬러 올라갈 수 있다면고래들의 발자국을 보고 싶다고래가 발을 버리고 왜 지느러미를 갖게 되었는지무슨 아픔이 있어 바다로 몸을 숨겼는지발자국을 보면 그 의문이 풀릴 것만 같다새끼를 낳고 젖을 물리는 고래들의 발자국을고고학자들은 왜 아무도 찾지 않을까바닷속 어딘가는 두 발로 혹은 네 발로 걷던발자국 무덤들이 가득히 있을 것인데수천 년 동안 고래 발자국
아침을여는시
동양일보
2014.02.18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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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군가 내게 말했다한번 명중되면그 독이 온몸에 구멍 뚫는다고목숨 다 하도록 구멍 뚫는다고큐피드의 화살보다 천 배나 강한 독성으로그 독화살 맞고나 지금 방바닥 치고 있다맹독이 전신으로 퍼져나가고 있다오늘도 피를 쏟아내듯파지 한 묶음씩 쏟아내며벌집 같은 구멍 뚫리는중증의 증상들꼬리 좌우로 흔들며구멍구멍에 까놓는 시의 애벌레들물 좋은 시여,천 배의 독화실이여,
아침을여는시
동양일보
2014.02.17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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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장독 속에 어머니 들어가 있다일곱 번씩 일흔 번을 달인 말씀 그득 채우고물빛 고요히 누워있다세상에서 다지고 다진 슬픔들덩어리째 끌안고 사뭇 까맣게 숯물 되었다손길 닿지 않는 깊이에서덜 익은 상처 꾹꾹 눌러 매운 숨결 풀고 있다 씻고 있다대바람 소리 밀물치는 뒤란다소곳 가을 풍경 삭이는 어머니세월 솔기마다 튿어낸 한숨, 그 위에별빛 고운 어둠 감침질하고 있
아침을여는시
동양일보
2014.02.14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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흰 눈에 파묻힌 청보리싹이 눈을 뜨네 부케 같은 하얀 꽃을파냄새가 피웠네 유채꽃이 노랗게 손을 흔들며 한 겨울 여기서 나라고 하네 가파도로 떠나면서 거센 파도를 만났고 눈보라 몰아치는 마라도로 건너갈 때 뭍으로는 돌아가지 않을 궁리만 했네 고래 같은 우울이 마음속에 헤엄치고 있어도 모슬포 부둣가에 무심한 물고기를 자질구레한 생각처럼 떼 지어오가네 수선화를
아침을여는시
동양일보
2014.02.13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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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단한 그릇에 무엇을 빠뜨렸는지당신이 내 등을 밟고 간다돌팔매질까지 한다얼음덩어리를 끌어안고 나뒹구는 내가 보인다춥다어스름 등불이 켜질수록 냉랭한 불그마저 먹어치우는 눈발차가운 불기둥 속으로물고기가 치솟을 때마다외로움이라는 거 쓸쓸함이라는 거장작불처럼 활활 타오르거나고드름처럼 거꾸로 처박힐 듯 내 속을 잔뜩 치받는 거극에서 극으로 달린다당신이 서 있던 마지
아침을여는시
동양일보
2014.02.12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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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젊은 날눈보라 펄펄 날리던 날군복 입고 8부 능선 단숨에 달렸거니산 위에서는 펄펄 휘날리는 눈보라 속에서나무들이 벌거벗은 채 울부짖고 있었거니많은 세월이 강물같이 무던히 흐른 뒤에도그 처연히 울부짖던 벌거벗은 나무들내 가슴에 살아 있거니산이 울리도록 울부짖던 소리더욱 살아 있거니발목에 피가 나도록 살아온 발자국마다그 울부짖음 살아있거나고희가 넘도록 아직
아침을여는시
동양일보
2014.02.11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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샘은파아란 가슴에 달을 띄운다.아기눈속 처음 뜨는화안한 보름달이다.잔잔히연꽃을 피우고 있다.간절한 하늘에꽃잎 비비면,샘물은보드라운 하늘샅이다.
아침을여는시
동양일보
2014.02.10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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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은우리가 바라볼 때만 빛난다골목에 세워진 아픈 불을 다 끄고고개 들어 긴 숨을 내쉴 때별은깜빡이며 우릴 쳐다본다붉은 별에서 보라 별까지샛별에서 새벽 별까지흐느끼는 너를 가슴에 품고 있어야 한다는 것캄캄하게 흐르다가흐르면서 쓸쓸해지다가가장 낮은 바닥에 누워 눈을 떴을 때거기가장 뜨거운 별들이 눈썹 위로 쏟아진다
아침을여는시
동양일보
2014.02.06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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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루하게 겨울비가 내린다길바닥은 파여 구덩이가 생겼고, 그것이 무서운 사람들은 달아나고싶고, 발을 동동 구르며 튀어 오르던 물방울은 허둥대고,지루하게 내리는 비가 지루한 나는 헛배처럼 게으름이 차오르고, 그것이 무서운 나는 지루함을 견디느라 자꾸 시에다 딴죽을 건다딴죽을 거는 것이 더러운 겨울은 저만치 푸른 잎을 살짝 건드리고 싶고, 그것이 부러운 담장 위
아침을여는시
동양일보
2014.02.05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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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밤의 예보가폭설이었으면 좋겠다.묵은 생각과 오래된 소음으로지친, 어떤 나를잠시라도 가두고 싶다.혼자 이룰 수 없기에삼일에 한 번씩 작심을 하며버텨온 거무수룩한 삶.온 세상이 한꺼번에 하얗게평등할 수 있는 방법은하룻밤의 장엄한 폭설뿐이리라.그렇게 너와 나 함께 갇혀새 꿈을 꾸는 것이오래 묵은 잡음에서 벗어나는초겨울의 혁명이리라.
아침을여는시
동양일보
2014.02.04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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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눈.한참을 바라보고 있어도떠오르는 사람 하나없다이렇게 다비워지는 날이 온다다 식어서푸석푸석해지는 날이온다아무 것도 담지 않는 눈빛으로저물고 슬어가는 계절의 난간스스로 허공의 몸이 되고빈 바람이 되는 시간
아침을여는시
동양일보
2014.02.03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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끈 떨어진 뒤웅박’ 이라는 말이 있다.남편의 역마살 따라 파라구아이로 농업이민을 떠난 누나의 뱃속에서미국으로 동반 밀입국한 조카딸은 벌써 26살.가방 끈이 중학교에서 끊어진 뒤 별정우체국 교환실에서 울부짖다,가난이 싫다며 시집으로 도망친 제 엄마의 미모를 빼닮았는데꿈의 나라 미국에서도 벗지 못한 가난과 엎친 데 덮친 부모 이혼으로,사춘기의 자신 속으로 자라
아침을여는시
동양일보
2014.01.29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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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은 참그때에만 있다나이 든 나무와낡은 담장과슬픔을 아는 사람처럼깊어지는 꽃을만날 그때에도함께 있자꼬-옥
아침을여는시
동양일보
2014.01.28 00:0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