잠종장 탱자 울타리 한참 지나길게 논둑길 넘어서면가을 햇살 아직 등때기가 따숩고명암지를 지나온 바람보푸라기 한 옴큼씩 달고풀씨 몇 알 아무데나 몸을 낮춘다.문득 안심사 대웅전댓돌 위에 평안히 앉아가물가물 탱화나 바라볼 나이뉘엿뉘엿 해 다 기우는 때인가의 감나무들 잎 다 떨구고비로소 홍시를 익히고 있다.
봄바람 싹틔운 무심천변엔벚꽃 사람꽃 흐드러지게 피누나.우암에서 흘러내린 여름속으로잘 익은 열매 하나 지혜롭다.달 여울 길게 늘인 그 하늘가고향이여 청주, 부르는 소리물안개 자욱한 길을 건너서만나는 함박눈 묻어나는 언어여.
가로수 푸른 터널두둥실 뜨는 우화바쁘고 설렘의 세속허위적 세월들이예서 문득 사랑으로 풀리네무심천이흐르네무심천 무심 무심무심타 마올 것이천심에 무심 아님이 세상 어디 있어새 세월 문명도 사람다히청풍명월천아.
초정리 가든구녀성 자락으로 낙엽이 진다우리는 그리운 추억 속푸른 술 병,영혼처럼 맑은 소주를 마신다술잔 위에 낙엽처럼그녀의 눈물이 진다유리창 밖갈대꽃 헝클어진 하얀 머릿결로 일어나고개를 끄덕이며 생각에 젖는다그녀가 말없이 술잔을 비운다가을, 구녀성 깊은 골짜기에그녀의 눈물처럼 낙엽이 진다
쇠보다 무거운 고요천년을 묻어둔 채비바람 지는 앞에눈물마저 외면하고누리의 복판에 앉아맑은 골을 지킨다.꿋꿋한 황소의 등에호수처럼 실린 하늘산자락 늘린 폭에상당별 길러내니낮은 듯 깊은 반석을어느 누가 아는가.
거기보살사에 가서 보아라여름내 뒤척이던 바람솔숲으로 몰고 와맑게 합장하는 풍경 소리를그렇게 몸 바래며끝없이 높아간 하늘을또 보아라한세월 무성하던 이파리곱게 물들여희디흰 물살로 떠 안고 가는석간수를, 뿐만이랴버릴 것 다 버리고뿌리 하나로 겨울로 가는밑바닥의 온갖 것들을보아라. 그리하여 그 위로향기처럼 스미는부처님의 미소를
꿈꿀 수 없는 것버려두고나에게는 그냥 오라힘겨운 날에도한 그루 쇠기둥으로뿌리내리고상처 깊은 사람을더 그리워하는나는 비바람이 두렵지 않은두껍고 어두운 추억
한 가닥 실오라기에 매달려끈을 놓지 않으려 밀고 당긴다더 높이 그리고 더 멀리 날아가고 싶을 땐있는 힘껏 줄을 잡아당기는 거야팽팽하게 시위가 조여 들수록점점 높이 올라세상이 모두 눈 아래 내려다보이지거침없이 종횡무진 하늘을 누비다 보면나를 잊어버리고모두들 올려다보며 탄성을 지르겠지꼬리를 흔들며 춤추는 것이얼마나 황홀하고 위험한 것인 줄까맣게 잊어버리고 머리
흐려진 물소리더 먼저 가는 바람 앞선 마음흘러가고 말 하늘빛은 그대떠도는 구름 몇 조각꽃상여하늘 속에 빠진 구름기어이 사랑니 빼는구나젖은 허공에 떨고 있는 초승 낮달견우 직녀 해후하는가환장할 나의 목마름
대웅전 뜰 앞자운영 바다에윤회하는 호랑나비오층석탑 끌질하던천년 석공의 환생이 아닌가내려다 보시는 부처님의 미소가황송한 불청객이다소원하지 않은 이승의 미련아뢰지 못하고부처님 성가신 불전에만눈이 쏠린다주섬주섬 업을 챙기며관음전을 등에 지고하산하는 번뇌의 이 기쁨이여
하지가 지나고햇감자를 물에 말아 먹으면사이다처럼 하얀 거품이 일었다그 안에는 밭둔덕의 찔레꽃이나소 울음도 들어 있었는데나는 그게 먹기 싫어서여름이면 어머니와 싸우고는 했다그 후 논밭과 사는 일은세상에 지는 일이라고 나는 멀리 떠났고어머니도 감자밭을 버리셨지만해마다 여름이 와서온 몸에 흙을 묻힌 채시장에 나오는 감자를 보면거기에 어머니가 있는 것 같아나는 빈
꽃집 앞수도승으로 버티고 선 삭발의 버즘나무동안거 중일까만행 중일까보람화원 유리창 안에 꽃들이 보이긴 하는 건지시선 처리 쉽지는 않겠다날 세운 바람에도동요하지 않는 까닭동토 깊은 곳천 년 화석으로 남겨질 겨울나무의 혈맥봄을 퍼 울리는 두레박질 한창이겠지겨울 철새들 강물 속에서 부단한 발길질처럼
늦은 시월의 창밖으로철 지난 비가 내린다지난 밤 늦도록시린 어깨 움츠리어 잠 설치게 한그 무엇이 녹아내리는 것일까대여섯 남은앞집 석류잎이노오란 추억을 추리게 한다안개보다 뽀오얀트로이멜라이
봄밤,잠이 오지 않았지내 마음 속 참새 한 마리이불 속으로 들어가지 않고자꾸만 춘란 밑으로 숨었어자정이 다 지나도록고장 난 사발시계와많이 싸우기도 했지담 밑에는 매화꽃이 피려고사랑방에 불 꺼지기만 기다렸어주인 영감글 읽는 소리는 언제쯤 그치려나어지러운 세월에잠이 오지 않았지참새 한 마리가 밖으로 나가려고밤새도록 창문을 흔들었어
눈처럼 당신은 내게로 와요어느 해맑던 날은조심조심 조용히 숨어 계시다이렇게 반갑게도 오시네요숲 속으로 내리는 눈처럼한적하고도 소담스럽게해변으로 떨어지는하얀 눈의 풍경으로도당신은 내게로 와요하얀 꽃고무신 종 종 걸음에수줍은 듯 그렇게 당신은살방 살방 오시네요
오십을 바라보는 형과 형수가마주앉아 봉숭아 꽃물을 들입니다형은 약지와 새끼손가락에형수는 열 손가락 모두봉숭아 꽃물을 싼 비닐종이를 실로 칭칭 동여매고형수가 불안한 손가락으로 삼겹살을 굽습니다서로 닿지 않도록 약지와 새끼손가락을 벌리고천장 보며 누워 있던 형이 날 보고소년처럼 사르르 웃습니다다 구운 삼겹살을 담아내온 접시에형수의 손에서 흘러나온 봉숭아 꽃물이
노루오줌 빛 햇살이 가렸다흘린 눈물로 덕지덕지 달라붙어노박이로 들어앉은 검은 반점섬처럼 잠들었다오래되어도 지워지지 않는,손톱자국처럼 남아있는 때 낀 사랑울컥울컥 잎새마다 어리쳐꿈속에서도 가슴 끝자락은검붉은 핏빛인데노루오줌 빛 햇살 사뿐히 내려앉은 그늘 밑,추억처럼 환하다
전생 前生의 빚쟁이들이 소낙비로 다녀간 뒤내 빚이 무엇인가두꺼비에 물어보면이 놈은 소름만 키워서잠든 돌에비게질이다단풍은 매일 조금씩 구간 舊刊에서 신간 新刊으로한 몸을 여러 몸으로 물불을 갈마드는데이 몸은어느 춤에 홀려병든 피를씻기려나추녀 밑에 바래 놔둔 춘란 잎을 어루나니서늘타, 그 잎 촉 燭들!샛강물도 서늘했겠다막걸리 몇 말을 풀어서적막 강심(江心)을달
사랑을 받아주세요장미꽃보다 더 붉은 마음을어찌할 수 없는 이 마음을 꼭 받아주세요쓸쓸하고 외로워도 당신 생각만 하면즐겁고 신이나요아무 것도 필요하지 않아요당신만 있으면 돼요오직 당신만 사랑하고 또 사랑합니다
거침없는 폭풍 뚫고 온 시간내 사랑은 아픈데넌 왜 이리 곱더냐얼굴 붉어져떨고 있는 모습은혹여나 이별이 두려운 까닭이더냐거침없는 폭풍 뚫고 온 시간내 가슴은 시린데넌 왜 이리 붉더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