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녹슨 물음표들이 낭자한갑판을 지나 다시금돛폭을 기워 보는 수심 깊은 나이 그 깊은 수심에낚싯대를 드리운다 월척! 너는 도대체 어디에 있는 거니?
아침을여는시
동양일보
2017.03.30 2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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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뚝 뚝붉은 울음으로 한숨으로함부로 고개 꺾는 통곡인 줄 알았으나 어디에도 기댈 곳 없는 심장이 멎는 것간밤 지독했던 영혼의 신열 지상에 뿌리며골똘했던 스스로를 기꺼이 참수하여한 생애 온전히 투신하는 것이다그리 뜨겁지 못했던 날들의 치욕더 단단해야 했던 시간의 꽃술 씁쓸할 뿐이어서간신히 머금고 있던 노란 숨 놓으며이승의 마지막 꽃잎까지 불을 놓아까맣게 태우고 싶은 것이다무너지고 싶은 것이다 무참히캄캄한 생애 건너고 싶은 것이다 오래 익힌 화농(花膿) 깊숙이 묻으며어쩌면 저 붉은 물 스며들어환한 하늘뿌리에 홀연히 닿을 것이다
아침을여는시
동양일보
2017.03.29 20: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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침대 끝에 등을 돌리고 앉아 있다언어가 알몸으로 빈 컵에서 새가 날아오른다꽃은 없고 꽃 그림자 속에서누가흘러내리는 내 몸을 마시고 있다 취한 밤, 마스크 쓴여자가하늘의 터널 속으로 흰 과일차를 몰고 간다 레몬은 새처럼 자고방을 가득 채운 지름 4m의 노란 공(空)
아침을여는시
동양일보
2017.03.28 20: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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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차는 떠난다가만히 보면 서 있는 기차도 떠난다돌아오는 기차도 사실은 떠나는 것이다우리가 아무리 정거장이길 원해도우리는 정거장이 되지 못한다우리는 쉬지 않고 떠나는 기차어디로 가느냐 묻지 말자바람 따라 떠나고비를 맞으며 떠난다꽃을 피우며 떠나고낙엽을 태우며 떠난다기차 속에는우리가 남긴 언약이사리가 되어 구르고우리는 떠나므로 채우고우리는 떠나므로 머문다
아침을여는시
동양일보
2017.03.27 2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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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공은 고요의 집이 아니다. 한겨울 지나며 울음이 더욱 견고해진 붕어매화 가지에서 처마 밑으로 이사했다여전히 눈을 뜨고 자고뜬눈으로 꿈도 지으니 얼마나 버거우랴. “밤새 몸에 고인 고요를 이겨아침 공양을 올리려 하니바람아 불어라, 바람 불어라나는 온몸으로 소리꽃이 되리라.” 종일 울어도 소리로 가는 길은금빛 은빛 황홀한 꿈길이어서귀에 길을 내는 이마다고요한 마음 하나씩 놓아 주고 있다. 나를 떠나간 떨거지들 지금길가에 앉아 떨고 있는 거지가 되었다살아 있어 나는 운다푸르고 깊은 하늘바다에서 운다.
아침을여는시
동양일보
2017.03.26 18: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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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나는고장난 시계다네가 떠난 그 시각에멈춰 섰다 그 날 이후바람만 예사롭고 세상은 쉰다
아침을여는시
동양일보
2017.03.23 20: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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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도 들꽃들이 겨우내 비겁하였다고 말하지 않는다나 같은 사람도 있는 힘을 다해 싸웠다나 같은 사람도 앞장서서 싸우지 않으면 안되는시대를 살았다 우리들은힘은 없지만 비겁하지 않으려 했다아직도 크게 달라진 것 없어마음 허전하기 이를 데 없지만나같이 허약한 사람도 쫓기며 끌려가며두려워하지 않고 싸웠다고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희망을 위해 싸웠다고그 생각을 하며 이 저녁 자신을 위로한다꽃샘바람에도 순이 터 올라오는 나뭇가지가 보인다산천에 봄소식이 오고 강물이 풀려도내가 아직 불법이란 딱지에 묶여 있는 게 가슴 아프다젊은날을 다 바쳐 싸우고
아침을여는시
동양일보
2017.03.22 2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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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으로 사람이 사는 곳에 빽빽하게 들어앉아저나 나나 똑같은 모습으로하늘을 바라보고 웃음 웃는 일이어디 그렇게 쉬운 일이디? 넉넉한 품안에 껴안을 것들을 생각해서사람 사는 곳에서 사람 사는 곳을 버리고허허롭게 사람의 그리운 그늘을 만들기가어디 그렇게 쉬운 일이디? 온몸 마디마디 꺾으며얼마나 견뎌 지난 세월이었니그 세월에 예사로 생채기를 내고 어디 너는 즐겁디?그러나 저를 내어 세상을 적시는 장년의 사내들이주름을 펴듯 웃는 웃음이논배미 너른 들판에 서 있을 때그땐 그 어느 배경이 필요하지 않게 멋있더라고 나이 쉰이 넘어 비로소제 자리
아침을여는시
동양일보
2017.03.21 20: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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묵은 김치 씻어 펼치고 여자가 부침개 굽는다. 진달래 꽃잎으로 징검다리도 놓는다. 자근자근 밟고 떠날 그대에게 나 더는 솥뚜껑 무쇠 바닥이고 싶지는 않았는데, 순간에 달아오른 뜨거움도 아니고 싶었는데, 여자는 그냥 그대로 이러고 산다고 푸념이다. 더 얇게 반죽 펴다가 데인 손바닥, 그 여자의 우주는 둥근 물집에 납작하게 살고 싶은 나를 며칠 째 가둔다 앞뒤로 번갈아 슬픔 굽는 일에 익숙해졌다
아침을여는시
동양일보
2017.03.20 2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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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 다섯 시쯤숙명처럼 어머니는 부엌으로 가셨다 눈빛이 곱지 않던 할머니 곁에서무정한 남편과철없는 자식들 뒷바라지는차라리 곤궁한 시대의 위안이었다 아무도 모르게 낙엽이 지는새벽에 일어나 보니빈 길 가로등 불빛양말은 깁다 앉은 채 조는 어머니 같다 나도 벌써 칠순이구나
아침을여는시
동양일보
2017.03.19 2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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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 통 산뿐인 나라에서는자동차를 몰고 한 두 시간 가면다 산골이다저 강원도 골짜기가 아니어도어릴 적 머루 따먹고칡뿌리 캐먹던 고향이다. 괴산댐을 지나 산모퉁이를 끼고 난 길깊고 맑은 계곡에 닿으면씨알 굵은 칡뿌리 구불구불 돌아누워 있다.산비탈 일군 밭에선 누렁 소가 쟁기를 끌고막걸리 한 주전자 들고 세참 내가던어린 냉이 꽃 같은 누이가 있다.자갈자갈 흐르는 물소리 따라겨우내 얼었던 감장 고무신 신고들로 산으로 뛰어 다니는봄, 갈은 아이들이 있다. 다 커버린 내가 있다.
아침을여는시
동양일보
2017.03.16 19: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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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자리에 오래 서서비 오는 날 돌아가려고 한다기다리다가 남아 있는 힘을 모아서태우는 불빛이 빗물에 부딪혀서 흔들린다빗물은 불빛을 식히고불빛은 빗줄기 속으로 몸을 던진다불빛과 빗물이 섞여서 끝없이 탈 때마다지독한 냄새가 나고 빗소리마저 격렬하게 울린다언제까지 타려는가돌아가는 모습이 처연하여 불빛이 어둡다빛들이 스러지면어둠이 빛을 싣고 와서 유리창에 바른다아, 번득이는 몸몸을 버리고 나온 지고지순한 사리 알갱이들꽃잎처럼 흘러내린 자리에실루엣처럼 다시 한 자리에 서서비를 청하는 사람이 보인다.
아침을여는시
동양일보
2017.03.15 2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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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데기처럼 기다리던 흰 밤은 오지 않았다그녀는 마루에 고단하게 앉아 별을 쓸어 담는다배고픈데묻어 놓은 밥그릇은 발가락에 자꾸만 닿고고등어조림에서 간장 냄새가 파고들어도어둠의 별을 지고 돌아올 그는풍기는 낙담도 없이 소식이 뜨음하다빨간 꽃잎 누벼진 이불에서 발효하는 시간은자정을 넘어서 숨을 고르지 못하고 쓰러진다웬 바람이 저리도 밥을 탐하는지문풍지 홀로 겨워 몇 포기의 혀를 받아들이고콧등에는 햅쌀 같은 배부름이 미끄러진다외양간 옆 오줌통에서 살얼음 깨고 들어와큰 밥그릇이 모셔진 아랫목에 발 넣으니없다 그래 바람 탓이야 이럴 줄 알았어
아침을여는시
동양일보
2017.03.14 20: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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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슨 멋이라고검은 옷을 사 들이던스물서너 살오랜 병석에 누우셨던 엄마내가 산 옷을 보시고 ─ 잠자리 날개 같이 가볍고색깔 있는 옷이 좋지 않니?─ 이게 고상하잖아?─ 고상하다 못해 괴상하다 잠자리 날개 같은명주 옷 입혀 드렸는데엄마,오래도 누워 있다
아침을여는시
동양일보
2017.03.13 20: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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빨리 도는 줄은비닐막을 만든다. 내가 돌리는 건 아니지만내가 돌리지 않는 것도 아닌,누구나 그 막을 쓰고 돌아다닌다. 줄의 빠르기에 따라 빛깔이 달라진다.몸의 움직임에 따라 모양이 달라진다. 눕고, 앉고, 서고, 걷고, 뛰면커졌다, 작아졌다, 찌그러졌다, 퍼졌다한 순간도 머물지 않는 모양이 된다. 어쩌다 남의 막과 맞닥뜨리면파르르 쇳소리를 낸다.부딪힌 줄의 진동이 짧아지면서 내는 파열음.줄이 멎으면 주검이 남는투명한 막 속에 사람이 있다. 비닐을 만든 끈의 양쪽은남과 죽음에 매여 있다.
아침을여는시
동양일보
2017.03.12 20: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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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을 낸다, 낚싯대가낚싯대 위를 곡예하듯 걸어가 물속에 든다하나가 된다나와 물, 물과 산, 산과 마을, 마을과 노인,노인과 아이, 아이와 우주내가 나를 나무가 나무를 구름이 구름을 잡지 못할 때물밑에 갇혀, 물위에 떠올라 풍경을 만든다풍경 속에 든다빛은 제 몸 사이사이에 어둠을 키우고어둠은 번뇌의 칼끝에서 회쳐 진다그 사이 물고기는 물을 낳고물은 물고기 등이 되고비늘은 태양을 향해 활시위를 당긴다팽팽한 빛, 빛이 굴절된다그 빛에 실명한 내 눈과 물고기의 눈과 물의 눈이낚싯줄에 있다 물속 어둠만큼의 딱딱한 질량으로물 밖 밝음만큼의 팽
아침을여는시
동양일보
2017.03.09 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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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척박한 땅에서도 푸른 꿈 안 버린 널호미로 낫으로 쳐내겠다는 마음 한 켠비릿한 풀물의 고함 천둥처럼 번진다 우후죽순 돋아난 날〔刃〕을 벼린 이 어둠걷어내지 못하면서 감히 널 뽑겠다니곁가지 피워 올린 꽃도 미안해서 못 보겠다 씀바귀 엉겅퀴꽃 구둣발로 앉은 나비야 발소리를 줄여라안 온 듯이 다녀가거라 햇살아밤새 고인 천둥눈물남김없이 먹고 가거라
아침을여는시
동양일보
2017.03.08 2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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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도 알고는 있다 우리가 가는 이 길이끝내 성지(聖地)에 도달하지 못하리라는 것을 히말라야의 짧았던 여름네가 발굽 경전 두드리며 초원을 질주하면나는 흉내 서두르다 무릎 흉터 일쑤였고내가 황모필 가지런히 합장을 하면너는 늘 먼산바라기였다 너와 나, 서로의 고삐를 놓고그리하여 이 산천의 허허로운 바람이 되어네가 설산을 넘어 마을에 들면나는 거기서 한 폭의 룽다로 휘날리고내가 꽃 속에, 구름 속에 들면네가 거기서 한 폭의 룽다로 휘날리는그런 꿈으로 순례의 길을 떠났건만 지금, 여름보다 짧은 가을이위태롭게 길을 떠메고 있다 묻지 말자 애당
아침을여는시
동양일보
2017.03.07 20: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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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묵은 시간이 몸을 뒤튼다고인 물이 어지간히 묵직하다고이제 조금씩 털어내고 싶다고풀어내고 싶다고 가만히 갈비뼈에 손바닥을 문지르니어느덧 쓰윽물기 올리려는 흔적, 만져진다슬그머니 다가오는 너목덜미 선뜩한 길의 이마를 짚는, 빛푸르스름하게 깊으나솟을 듯 털어내는 시간의 깃털, 혹은 화석
아침을여는시
동양일보
2017.03.06 19: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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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다 한복판에 오르간이 환하게 떠 있다누구의 익사체일까 새들이 건반에 내려앉을 때마다밀물과 썰물이 반음 차로 울리고 파도가 모래 해변으로 나와하얀 혓바닥으로사람 발자국을 지우는 시간 게들이 하늘을 본다북극성 조등(弔燈)에 환하게 불이 켜지고원을 그리며 도는 별들 음표들 시간들 누가 주검을 연주하는 걸까건반 사이에서 새들이 날아올라캄캄한 허공으로 흰 쌀알처럼 흩어지고 있다
아침을여는시
동양일보
2017.03.05 20:3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