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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만히 하늘 쳐다보면하늘 속에 하늘이 있다산 속의 산처럼 가만히 물소리 들어보면소리 속에 소리가 있다강물 속의 강물처럼 가만히 내 마음 열어보면마음속에 마음이 있다바람 속의 바람처럼 가만히 네 눈빛 생각하면눈빛 속에 눈빛이 있다꿈속의 꿈처럼
아침을여는시
동양일보
2017.01.02 20: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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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읽으며 자꾸만 집어먹는 글자 때문에머리가 물렁해지는 것인지눈이 짓무른 것인지앞일이 캄캄해지게 자꾸만원피스 하늘거리게 입은 여자가 생각나고어떤 때 불끈 아랫도리에 힘이 들어가고결국엔잡아 든 것이온통 세상의 일이 모두가 한가지로 같음 일진애써 뭉뚱그려 없애려 함이 더한없앰으로 다가오는세계 하나그거 정말재현할 수 없는 세계
아침을여는시
동양일보
2017.01.01 21: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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곁에 있어그리움 모른 채또 한 해를 보냅니다 가까이 있어소중함 깨닫지 못한 채또 한 해를 보냅니다 한 해 마지막 시간에 서서야함께 있음의감사와 평안을 돌아봅니다 내 세월 나이를 먹을수록사랑이 젊어지는 이치를이제야 깨우칩니다
아침을여는시
동양일보
2016.12.29 20: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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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년을 소리쳐도 알아듣는 이 없어 하얗게 목이 쉰 폭포는 내리쏟는 한 정신으로 마침내 얼어붙어 바보 경전이 되었다.
아침을여는시
동양일보
2016.12.28 21: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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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사 전시장에서화석을 본다 용해할 수 없었던수억만 년의 세월을 끌고 와서유리장 안에 누워 있는고생대 데본기의 삼엽충중생대 백악기의 암모나이트 다시 몇 억만 년 후내 가슴에서 발굴된당신의 이름을 본다
아침을여는시
동양일보
2016.12.27 21: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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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삿바늘 자국 수북수북 생겨난 어머니 몸은, 가시 둘러쓴 대추나무였다. 좁쌀죽 끝내 삼키지 못하고 저승가신 어머니는 우두커니 2층 아파트 베란다 밖에 서 계신다. 그렇게 좁쌀죽 퍼담고 늦봄을 건너더니, 어느새 잎 지운 꼭대기 나무는 대추 몇 개 햇살에 쭈글쭈글 말린다 해가 일찍 지는 겨울이면, 남은 내 그리움도 다 말라가고야 말겠지
아침을여는시
동양일보
2016.12.25 20: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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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은모두 제 자리로 돌아가야 할 때한철 무성했던 자음일랑 저만치 떨궈내고형형한 모음의 뼈대 몇 개만을 추슬러한 그루 감태나무로 서야 할 때문득 높바람은 눈시울을 씻어 가고하늘 한복판 일필휘지로 날리는기러기 떼의 서늘한 서한체그 삐침과 파임에 골몰하여밤늦도록 촛불을 밝혀야 할 때똑, 똑, 똑조용히 나이테를 두드리며한줄 한줄 일기를 써야 할 때그렇게 그 안으로 걸어 들어가묵언의 울림에 귀를 기울여야 할 때지금은
아침을여는시
동양일보
2016.12.22 18: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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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원처럼 넓은 비행장에 선 채 나는 아침부터기진맥진 한다.하루 종일 수없이 비행기를 날리고 몇 차례인가 풍선을하늘로 띄웠으나 인간이라는 나는끝내 외로웠고 지탱할 수 없이푸르른 하늘밑에서 당황했다. 그래도나는 까닭을 알 수 없는 내일을 위하여 신열身熱을위생衛生하며 끝내 기다리던, 그러나 귀처란애초부터 알 수 없던 풍선들 대신 머언 산령위로 떠가는 솜덩이 같은 구름 쪽만을 지킨다.
아침을여는시
동양일보
2016.12.21 21: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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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나무 아래 앉아잠시 그대를 생각했을 뿐인데 밤꽃이 저토록 낭자하게뿜어져 나올 줄이야 비린 꽃 향으로 흠뻑 젖은 산허리에서 산딸기저토록 달아올라은밀히 농익고 있을 줄이야 농익어 산자락을 저렇듯붉게 물들일 줄이야
아침을여는시
동양일보
2016.12.20 21: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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뚫어야 할 것이 어디하수구 뿐이며풀어야 할 것이 어디 화두 뿐이랴? 열지 않으면한 발짝도 나아갈 수 없는 문이날마다 은산철벽 같아 무문無門처럼 닫힌문 앞에서 서성거리다꽃가지 하나 집어 올린다. 발소리에 먼저 잠기는 빗장을꽃가지로 바꾸면어떤 도깨비가 나타날 것인지 날마다 막아서는 문 앞에이 생이 던져놓은꽃가지 하나.
아침을여는시
동양일보
2016.12.19 20: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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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만고만한 초가삼간 혹은 흔하디흔한 기념품들다 지나치시고 중생대 혹은 쥬라기 때 공룡들 힘껏 눌러 놓은부용대 절벽으로 가세요. 가서 성급하게 뛰어내린 강물에눈 씻으시고 천년 시름 퇴적한 모래톱에 맨발을 심어 보세요.싸아 하면서 시들해지는 바람이 가슴을 파고들거든꽁꽁 동였던 이야기 보따리도 풀어 놓으시구요. 또 직립의꿈을 품은 나무들이 마을 쪽으로 머리 꺾은 상심 옆에서따끈한 다방커피 한 잔 덜덜 떨면서 마셔보세요.음 그리고…… 그리고 나서 말이죠.오래 묵은 애인과 헤어지는 것도 나쁘지 않아요.살다보면 간혹
아침을여는시
동양일보
2016.12.18 21: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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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박꽃에갇힌 벌을 잡으려다 손끝을 쏘였다그 후 한 소년은 자라서 어른이 되고사랑할 나이가 되어 꽃밭을 서성이지만 마을의 집들 담장 밖으로 늘어뜨린 호박은 없을 뿐더러 있는 호박의 꽃들은 인공 수정되고 있었다 수소문 끝에 찾아간 호박꽃 그곳에서 다시 쏘인 손끝은 지독한 바이러스 감염되어도 보았지만 그 욱신거림처음의 살맛에 이르지는 못 한다 그러나 또 벌을 잡으러 사내는 떠날 것이다
아침을여는시
동양일보
2016.12.15 20: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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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사가 불어오자 한동안 세상이 사막으로 변했다 아득한 꿈이 이루어진 것인가 등에 부린 기억이 무거워목이 타고 다리가 저렸다 순간의 꿈이 이토록 삶을 난처하게 할 줄이야 그 허망한 꼴을 보려고 물과 풀이 넘치는 여기까지 왔는가 낙타가 걸음을 멈춘 동물원 풀밭 저녁놀이 모래언덕을 넘는다
아침을여는시
동양일보
2016.12.14 21: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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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양일보)연탄재가 벽에 기대어 잔다탈지면을 구멍마다 막은염도 못한 어두운 골목 사람들은 두꺼운 외투 속에뜨거운 불씨를 품고 다니고눈은 흰 뼈에 재를 내려놓는다 가만히 젖은 연탄을 들춰본다오 저런반도 타지 못한 젊은 목숨 할아버지몹시도 추웠던 유년아버지의 아홉 살 겨울
아침을여는시
동양일보
2016.12.13 20: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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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름달 보면 맘 금세 둥그러지고그믐달에 상담하면 움푹 비워진다 달은마음의 숫돌 모난 맘환하고 서럽게 다스려주는 달 그림자 내가 만난서정성이 가장 짙은 거울
아침을여는시
동양일보
2016.12.12 21: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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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 산을 오르고야사방이 벼랑 끝임을 안다비탈이 비탈을 기어오르고나목이 나목을 잡고 능선을 오른다종횡무진 달리는 바람 앞에온몸 내 놓고하늘 무게 어깨로 떠받고슬며시 마을로 엎드려혼으로 큰다
아침을여는시
동양일보
2016.12.11 21: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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휜 겨울 옛 나루터 솟대처럼 앉은 사람밀려온 바닷물을 훌쩍훌쩍 봉하는데갑자기 모래바람이 뒤통수를 후려쳤다 뼛속까지 진눈깨비 내려 젖은 푸른 멍들방어잡이 사내가 소금기로 돌아온 밤염포鹽浦에 묶인 배들도 꿀렁꿀렁 울고 있다 지워진 이름 위에 덮어쓰는 포말같이굵은 밑줄 그어놓고 내일을 호령한다여봐라! 꽃돛배*를 띄워라, 방어진方魚津**을 쳐라 *꽃돛배: ‘꽃물 들인 돛배’라는 뜻으로 만들어낸 말.**방어진: 울산광역시 동구 방어진. 고려시대에는 왜구를 방어하기 위한 수로진으로 방어진이라 하였다가 조선시대에 방어가 많이 잡히는 나루터라는
아침을여는시
동양일보
2016.12.08 20: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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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공에 뜬 밤도 적막도 파도마저도 장엄하여새처럼 날았다 온몸의 나래 활짝 펴고다정히 늘어선 비행(飛行), 굳이북, 동, 서쪽의 세 몸이 아니어도 좋았다망망대해 깊숙이 불모지로 고적하여도 좋았다순정의 호흡으로 가파르게 일렁이는 물결 따라단단한 언어의 표피들 사그라지고새로운 음률로 이국의 방언들 생성되면몇 번이고 나는 눈물겨웠다정처 없이 부서지던 꽃이파리 파스스 타들어가며뜨거운 숨결 뜨거운 목숨을 극진히 열다가서해 끝 사리로 박혀 끝없이 울렁이는그대 나의 격렬비열도
아침을여는시
동양일보
2016.12.07 21: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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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이 주는 감동이 화가의 정성으로 나오는피 말리는 그리움의 실낱같은하소연이란 걸 알았네 희디흰 것이 달빛만은 아니란 것을화가가 헤집어 보는 마음을 보고야 알았네 그래달은 어디에도 없고화가의 손끝에 튕겨지는 푸른 눈빛만 남아견디지 못하고 흩어진다는 것을 알았네
아침을여는시
동양일보
2016.12.06 21: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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잎새 다 떨구고 앙상해진 저 나무를 보고누가 헛살았다 말하는가 열매 다 빼앗기고냉랭한 바람 앞에 서 있는나무를 보고 누가 잘못 살았다 하는가저 헐벗은 나무들이 산을 지키고숲을 이루어내지 않았는가하찮은 언덕도 산맥의 큰 줄기도그들이 젊은날 다 바쳐 지켜오지 않았는가빈 가지에 새 없는 둥지 하나 매달고 있어도끝났다 끝났다고 함부로 말하지 말라실패했다고 쉽게 말하지 말라이웃 산들이 하나씩 허물어지는 걸 보면서도지킬 자리가 더 많다고 믿으며물러서지 않고 버텨온 청춘아프고 눈물겹게 지켜낸 한 시대를 빼놓고
아침을여는시
동양일보
2016.12.05 21:2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