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 유 경 세명대 교수

17세기 영국의 종교시인 헨리 본은 폭포라는 시에서, 빛의 바다에서 어둠의 속세로 내려와 두려움에 떠는 인간을 폭포의 물살에 비유하며 결국 신의 품으로 돌아갈 텐데 두려울 것이 무엇인가 노래한 바 있다.

졸졸 흐르던 차디차고 투명한 개울물이 가파른 낭떠러지를 만나면 불안한 듯 물살이 빨라진다.

개울물은 떨어지지 않으려고 발버둥 치며 소리치지만, 일단 떨어진 후에는 차차 흐름이 안정되고 평온해지면서 넓고 도도한 바다의 품에 안기게 된다.

우리네 삶도 마찬가지다. 우리는 가파른 낭떠러지에 이르게 되면, 아래로 떨어질 것이 두려워 머뭇거리고 집착하고 매달리고 원망하고 절규하고 안간힘을 쓴다.

하지만 바닥을 치면 올라갈 수밖에 없다는 말처럼, 일단 아래로 떨어지고 나면 그 다음에는 오히려 모든 게 편해진다.

얼마 전 폭염이 계속될 때 무리해서인지 몸과 마음이 한동안 어지러웠다. 나름대로 이겨내는 방법을 찾다 집에서 쉬며 옛 고전에서 지혜를 얻고자 했다. 그때 집어든 것이 17세기 형이상학파 시인들의 시집과 셰익스피어의 비극이다.

셰익스피어는 비극에서 고귀한 왕이나 영웅이 비극적 인물로 전락하는 것을 보여줌으로써 우리 보통사람들이 사소한 어려움을 이겨낼 수 있도록 도와준다.

이번에 다시 읽은 작품은 격정과 고통의 크기가 너무 크기 때문에 이를 소화해낼 배우를 찾기 힘들다는 리어왕이었다.

리어왕은 자식들에게 모든 것을 베풀어준 부모가 자식들에게 배신당하고 비바람이 몰아치는 벌판으로 나가 미쳐버리는 내용이다. 리어왕과 그의 충신 그로스터는 불효자의 사탕발림에 넘어가 효자를 내친 결과, 한 사람은 광인이 되고 한 사람은 장님이 된다.

이 작품의 압권은 누가 가장 불쌍한 인물인지 경합이라도 하듯 폭풍우가 몰아치는 황야에서 거지와 광대와 버림받은 노인이 모여 자신의 절망과 고통을 격정적으로 토해내는 장면이다.

장님이 된 그로스터는 스스로 목숨을 끊으려 헤매다 쫓아냈던 아들 에드가를 만나는데, 아들을 못 알아본 그는 자신을 가파른 절벽 위로 데려다 달라고 부탁한다.

에드가는 절벽 위에서 뛰어내려 목숨을 끊겠다는 부친을 속여 평지에서 한바탕 연극을 벌이고는, 넘어진 부친에게 저 높은 절벽에서 뛰어내리고도 어떻게 살아났는지 신기하다면서 이렇게 기적적으로 살아난 만큼 열심히 살아야한다고 눈물로 충고한다.

요즘 전 세계적으로 어려움을 겪는 이웃이 너무도 많다.

자본주의의 승리, 공산주의의 종말을 이야기한지 십여년 만에 자본주의의 맹점이 여기저기서 터져 나오고 마르크스의 유령이 힘을 얻고 있다. 우리사회의 화두는 가난이다.

졸업과 동시에 빚더미에 눌리는 대학생들, 구조조정으로 조기 퇴직한 가장들, 창업 몇 년 만에 빈털터리로 문을 닫는 자영업자들, 수많은 비정규직, 하우스 푸어들의 고민과 한숨이 늘어가고, 최근엔 기상 이변까지 겹쳐 세계 곡물 가격이 급등하고 있다고 한다.

전 세계가 마치 폭포에서 떨어지기 직전의 물살처럼 불안과 두려움에 요동치고 있는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는 과연 어떻게 살아가는 것이 최선일까.

어쩌면 헨리 본의 폭포와 셰익스피어의 비극에서 교훈을 얻을 수 있지 않을까.

흔들리고 부딪치며 아래로 떨어져도 결국 평온한 넓은 바다로 나가게 되듯이, 그리고 가파른 절벽 위에서 떨어지는 것처럼 세속적인 욕망에 대한 미련과 집착을 버리면 오히려 살아갈 힘을 얻듯이, 우리도 마음을 비우고 삶의 흐름에 편안히 몸을 내맡기는 것이 순간의 어려움을 극복할 수 있는 최선의 방법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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