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 수 길 논설위원·소설가하시모토 씨!

현직 시장이요, ‘차기 일본 총리감으로 촉망받는 젊은 정치인, 당신은 이 말을 아십니까? ‘예전의 전쟁에선 조국을 위해서 죽는다는 사랑이 있었지만 현대전에서는 그런 아무것도 없다. 여러분은 개처럼 죽을 것이다.’

헤밍웨이의 말이지요. 그는 1차 세계대전 때 이탈리아전선에 참전했던 경험을 소재로, 소설 무기여 잘 있거라를 썼고, 그리스·이탈리아 전쟁 때는 종군기자로 활약하며 전장의 잔혹함을 온몸으로 겪었습니다. 그가 쓴 소설은 감동적이고, 전장에서 보낸 기사는 리얼했지만, 자신은 불면증에 시달리는 심한 전쟁후유증을 앓았습니다. 소설 속에 묘사 된 전쟁과 사랑과 죽음의 관계가 우리를 숙연케 하는 것은 아무리 아름다운 사랑, 고귀한 생명도 가차 없이 짓밟아 버리는, ‘악마의 장난같은 전쟁의 잔혹함 때문일 것입니다. 그래서 무기여 잘 있거라악마의 장난이여 멀리 가라는 헤밍웨이의 절규이기도 합니다.

하시모토 씨, 젊은 당신은 그 악마의 장난, 전쟁의 잔혹함을 모르고, 당신의 조국 일본이 점령국에서 저지른 죄악을 모를 겁니다. 독일과 이탈리아, 일본이 ‘3국동맹을 맺고 일으킨 제2차 세계대전, 그 악마의 장난을 당신은 겪지 못했고, 당신이 배운 교과서엔 모든 진실을 감춘 성전(聖戰)으로 미화돼 있으니, 당신의 머릿속엔 죄악으로 버무려진 그 전쟁이 세계 제패를 꿈꾸던 군국(軍國) 대일본제국의 위대한 역사로 새겨져 있을 것입니다.

당연히 전쟁을 일으킨 동맹 3국은 패배했으나 그 피해는 가공할 만한 것이었습니다. 참전 각국의 전사자만도 2000만여명, 부상자와 민간인 피해를 합치면 5000만명이 넘습니다. 합방이란 미명하에 국권을 찬탈당한 우리 한국인은 징병, 보국대, 근로정신대, 종군위안부로 수십만이 동원, 희생되고 그에 버금가는 인원이 학살 또는 도피유랑으로 생을 유린당했지만, 희생자 통계에 포함되는 것조차 거부당했습니다. ‘내선일체라는 맹랑한 구호를 내세워, 조선을 인정하지 않고 조선인들의 희생을 개죽음으로 치부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도 ‘(조선인)위안부가 일본군에 폭행, 협박을 당해서 끌려갔다는 증거는 없다. 있다면 한국이 내놨으면 좋겠다’(8.21)거나, 위안부 강제동원을 인정하고 사죄한 고노 요헤이(河野洋平)관방장관의 담화(1993)일본정부의 큰 실수라고 한 망언(8.24), 당신의 역사인식과 함께 양심을 의심케 하는 것입니다. 패전 후, 한반도 철수 당시 조선인 강제동원을 증거 할 만 한 각종 군령(軍令)과 각령(閣令), 칙령(勅令)문서들을 그냥 두고 갔을 이 없는데, 그걸 우리더러 내놓으라는 건 억지요 파렴치한 일입니다. 우리가 가진 가장 확실한 증거, 일생을 유린당한 피해당사자들의 증언이 있으나, 당신들은 그 증언을 부정하고 왜곡하면서 오히려 모독했습니다. 유엔 인권기구와 제삼국이 결의안을 통해 당신들의 죄상을 인정하고 반성을 촉구하는데도, 오직 당신들만이 기만과 위선의 가면을 벗지 않고 있습니다.

하시모토씨, 당신이 진정으로 진실을 알고 싶다면, 당신네 정부서고(書庫)를 열어 보십시오. 불태우다 남겨진 증거들이 숨겨져 있을 겁니다. 양심 있는 당신네 역사학자의 조언과 전쟁체험자의 고백도 들어 보십시오, 강제로 끌려 간 조선인들이, 전장과 노역장에서, 헤밍웨이의 말대로 개처럼 죽어 간사실, ‘개처럼 유린당한 정조를 확인하게 될 것입니다.

전범국의 최고 통치자, 이탈리아의 무솔리니는 총살되고 독일의 히틀러는 자살했습니다. 인류에 끼친 죄과를 죽음으로 갚은 셈입니다. 그러고도 전후의 독일정부 수상은 전쟁 희생자들의 추모비 앞에서 무릎을 꿇고 사죄했습니다. 양심과 용기로 용서를 구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같은 전범국인 당신네 나라의 통치자인 천황은 그 모든 책임을 외면했습니다. 천황의 재가를 받아 전쟁을 지휘한 도조(東條英機)가 할복하고 소수의 참모들이 처형됐지만, 당신들은 그들의 위패 앞에서, 또 다시 욱일승천기(旭日昇天旗)를 휘날리며 군국의 망령을 되살리겠다는 꿈을 꾸고 있는 건 아닙니까?

하시모토 씨, 당신이 장래가 촉망되는 유능한 정치인이라면, 진실을 외면하지 않는 양심과 용기를 찾으십시오. 왜곡과 기만(欺瞞)으로 헝클어뜨린 과거, 오도된 진실이 비로소 바로 보이고, 위안부, 정신대, 독도사실다툼에서 감정다툼으로 번지는 양국 간 갈등해소 방안도 거기서부터 찾아질 것입니다.

 

동양일보TV

저작권자 © 동양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