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 영 자 수필가아는 사람을 만나면 반갑다. 오래 못 만났던 사람을 우연히 만나게 되면 더욱 반갑다. 하다못해 엘리베이터 안에서 이웃의 아는 사람을 만나도 반가워 웃으며 인사하고 짧은 시간이나마 몇 마디 대화를 나눈다. 아는 사람처럼 좋은 게 없다고 생각해 왔다.

어느 날 버스에 올라 교통카드를 대자 잔액이 부족합니다라는 멘트가 나왔다. 아차, 그때서야 미리 충전하지 못한 것을 깨달았고 지갑을 뒤졌지만 천원짜리가 보이지 않아 애를 먹고 있는데 뒤쪽에서 성큼성큼 걸어와 자기의 카드를 대 주는 이가 있었다. 뜻밖에도 한 통로에 사는 젊은 아기엄마였다. 그녀가 아니었으면 만 원짜리를 내고 버스기사의 핀잔을 들을 판이었다. 참말 고마웠다. 이래서 이웃사촌이라는 말이 생겼을 것이다.

그녀는 나보다 나이도 한참 아래이니 아주 친한 사이도 아니었는데 아는 사람이라는 신뢰만으로 나의 위기를 모면해 주었다. 그런 예는 수없이 많기에 아는 사람이 많은 것은 재산이 많은 것과 같다는 생각으로 살아왔다.

모자 벗겨, 모자 벗겨.”

정말로 치가 떨리고 흥분스럽고 참 세상이 말세가 되는 거구나 이런 생각이 듭니다. 너무나 울분이 쳐가지고 눈물이 납니다.”

말은 어눌하지만 우리 모두의 마음을 대신하니 가슴이 먹먹하다. 일곱 살 어린새순을 이불 째 납치해 무참하게 폭행한 나주 성폭행 사건현장 검증 자리에 수많은 시민들이 나와 끔찍한 범행에 분노를 폭발했다. 인면수심의 철면피에게 욕설을 퍼붓고 극형을 주장하는 시민들의 분노가 하늘을 찌를 듯 했다. 오죽했으면 대통령까지 정부를 대신해 사과를 하는 지경에 이르렀겠는가.

부모들은 어떻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느냐. 우리 아이도 안전하지 않다는 분위기가 확산되고 있다. 세 살짜리 딸을 키우는 백모씨는 동네가 주택가인데 아이 웃음소리나 울음소리가 밖으로 샐까봐 창문까지 닫고 지낸다엄마들끼리는 자는 애도 다시 보고, 잠긴 문도 다시 보고, 이웃이랑 친하게 지내지 말자는 말을 한다. 모든 게 무섭다고 말했다. 성폭행 범죄가 성인뿐 아니라 어린 아이까지 확산되면서 딸 키우는 부모들의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다.

초등학교 3학년생 딸을 둔 박모씨는 하도 불안해서 차로 아이를 등하교시키고 있다학교 주변에 아이를 기다리는 차들이 많아졌다. 나처럼 걱정하는 학부모들이 많다는 뜻이라고 했다. 아동을 상대로 한 성범죄가 위험 수위를 넘어 큰 사회적 문제가 되고 있는 것이다.

보다 못한 엄마들이 거리로 쏟아져 나왔다. “더 이상 엄마들이 가만히 있어선 안 되겠다는 여론이 확산되더니 요리전문 사이트 ‘82쿡닷컴을 비롯해 최근 온라인을 중심으로 만들어진 아동 성폭력 추방을 위한 시민모임 발자국6개 인터넷 카페 회원들이 명동에서 성범죄자 사형 집행과 강력범죄 처벌촉구 집회를 열었다.

이들은 나쁜 아저씨 혼내주세요’ ‘물렁법안 그냥 놔둔 너희들이 범인이다’ ‘전자발찌 필요 없다. 성범죄자 무기징역이라고 쓰인 피켓을 들고 있다. 이들 중에는 미혼여성부터 아이를 데리고 참여한 주부들, 남성 참여자도 눈에 띄었다. 집회가 열리는 동안 주변에 둘러서서 지켜보는 시민들도 TV를 통해 전해 듣는 내 마음도 그들과 똑같았다.

엄마들의 분노하는 글이 인터넷을 달구고 있다. 정작 범인을 잡아서 재판에 넘겨도 집행유예로 풀려나는 경우가 절반에 가깝고 더 심각한 것은 아동 상대 성범죄자의 집행유예 선고 비율이 늘고 있다는 것이다. 자신을 4살 딸아이를 둔 평범한 시민이라고 소개한 누리꾼은 포털 다음 아고라에 10만 명의 서명을 목표로 아동 성폭행범 강력 처벌을 촉구하는 청원을 제안했고 수만 명이 서명했다.

이제 아는 사람, 이웃 아저씨도 믿지 못하는 세상이 되었으니 아는 사람이 좋다는 말도 옛말이 될 판이니 삭막한 세상이 무섭고 서글프다. 아이들 양말에, 발바닥에 쓴 밟지 마세요! 지켜주세요!”라는 구호가 가슴을 친다. 늦었지만 경찰이 방범 비상령을 선포하고 성폭력, 강력범죄 종합대책을 발표하며 두 팔을 걷어붙였으니 기대해 볼일이다. 제발 대한민국에서 일몰 후 안전하게 다니고 싶다는 구호처럼 안전한 나라가 우선이다.

무엇보다도 몹쓸 짓을 당하고 정신까지 잃었지만 이불을 잃어버리면 엄마에게 야단맞을까봐 젖은 이불을 꼭 쥐고 있었다는 이 순진하기 짝이 없는 아이의 빠른 회복으로 고통에서 벗어나 전처럼 해맑게 웃을 수 있기를 간절히 기원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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