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 주 희 침례신학대 교수
한 작품으로 오랜 세월을 진력한 그건 열정, 끈기, 참을성을 넘는 집착에 가까운 각고일지. 창작의 공방에서 얼마나 외롭고 고단하고 치열했던지, 작가는 토지 1부를 끝내고서, ‘내 삶은 왜 이렇게 팽팽하여야 하는가고 탄식을 하셨다던가. 그 긴 시간을 한 테두리 안에 세상의 이야기들을 불러 모아들이게 한 힘은 이야기 속 인물들에 대한 애정과 이야기 밖 사람들에 대한 연민이었을까, 사람의 생명과 삶에 대한 외경이 없었대도 가능했을까.

토지, 박경리의 대하소설 토지결정판이 간행되었다. 드디어, 마침내. 작가는 25년을 걸려 작품을 마무리했고, 그 뒤 토지연구자들은 10년을 들여 오자와 탈자, 착오들을 바로잡아 정본으로 정리했다. 19699월부터 현대문학에 연재하기 시작한 소설 토지는 여러 매체에서 연재되다 19948월에 완성되었으니 25년 만이다. 정리작업 10년까지 합치면 35년이 걸린 대작을 우리가 대하게 되는 셈이다.

토지는 이미 많은 이들이 읽고 언급해 왔다. 현대소설사의 산맥, 폭발하는 모국어의 잔치, 근 백년간에 걸친 시대의 벽화, 서사시라는 찬사로, 역사, 사는 일의 고독과 심연, 인생과 진실에 대한 집요한 질문, 생명가진 것들의 오랜 꿈과 소망과 슬픔으로도 읽어온 대작이다. 동학혁명, 식민지시대, 광복 등 우리 민족의 쉼 없이 고단했던 근 현대사를 배경으로 경남 하동 평사리 대지주인 최참판네를 갈등의 초점으로 두고, 그 가문 4대에 걸쳐 일어나는 비극적인 사건들을 이야기하고 있다.

그 가문의 비극들은 개인의 성격에서 빚어지는 문제들이 아니라 공동체의 역사적 문제들과 밀접한 일이기 때문에 전 민족에게 살포된 비극으로 치환할 수 있게 된다. 중심인물인 서희는 어린 시절 생모와 이별하고 아버지에게도 제대로 사랑을 받아보지 못했지만 친척임을 내세워 들이닥쳐 재산을 빼앗으려드는 조준구에게서 가문을 지켜내야 하는 임무를 스스로 터득하게 된다.

할머니가 여성임에도 가문을 강하게 일으켜 지켜왔듯이 서희는 자신과 가문을 지켜낼 방법으로 농민들을 대동하고 간도로 이주한다. 서희를 당해 조선이 처한 현실에 대한 상징적 인물로 읽히듯 서희 주변 농민들의 고단하고 팍팍한 삶도 당대의 민초들 모습으로 자연스럽게 등치하게 된다. 서희와 단결해서 간도로 이주해 가는 과정이 개연성있게 그려지는 것은 국권을 빼앗긴 시국에서 백성들이 겪는 혼란의 깊이와 살 길이 보이지 않는 국내의 정치 경제 상황이 워낙 절실했기 때문일 것이다.

죽지 않기 위해 간도로, 만주로 갈 수 밖에 없던 당대의 사정은 역사적 사실이 고증하지 않던가. 소설은 3.1 운동에 대한 기대와 실패, 총독 정치로 가혹해지는 정치 현실이 암울하게 그려지다가 마침내 광복을 맞이하는 것으로 마무리된다.

인쇄된 책으로만 20권에 달하는 이 대하 이야기를 작가는 원고지 4만여장에 담았으며, 인물은 600명을 이야기 속으로 불러모았다. 영웅이나 지사나 의연한 선각자가 아니라 수많은 민초들은 이 이야기 속에서 각자 자기 삶의 마당에서 다투고, 갈등하고, 견뎌내며 자기 삶의 알리바이를 세워나가도록 조명하며 안쓰러워한다. 그렇게 가엾게 사는 인물들의 삶의 의미는 도대체 무엇인가. 작가는 사람들의 남루하고 누추한 이야기를 하는 것, 그 인물들을 이야기 속으로 불러와 정성스럽게 이야기하는 것을 통해 그들의 이야기를 독자들에게 소개한다. 그 누추함이야 말로 우리 평범한 이들이 여기저기 휘둘리며 사는 삶일 수 밖에 없음을 직면하게 한다. 그 이야기를 수 십년간 붙잡고 있을 수 있는 힘은 그러므로 사람과 사람살이에 대한 쟁그러운 연민이었을 것이다. 등장 인물 하나하나에 관심을 기울여 이야기를 부여했던 그 연민은 결국 어떤 삶도 모두 간단히 해치워버릴 수 없이 눈물겹고 고귀하게 여긴 데서 비롯되었으므로 그 이야기를 대하는 이들에게도 거기에 도달하도록 격려할 것이려니. 우리의 고마운 문화 유산이 또 하나 정비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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