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 은 순 문학평론가

혹독한 무더위가 물러가고 가을 기운이 완연해지고 보니 전보다 활동량이 많아졌다. 만나자는 사람도 많고 자잘한 볼 일도 여럿 생기고 1박2일로 교육관련 캠프까지 다녀오느라 분주한 나날이 이어졌다. 늘 실감하는 바이지만 무슨 일이 생기면 몸에 무리가 가지 않게 차근차근 이성적으로 일을 처리해야 하는데 여전히 피가 식지 않아서인지 일을 몰아서하는 습관을 버리지 못하고 있다. 정해진 숙제는 정해진 시간 안에 꼭 해야 한다는 강박관념이 변치 않고 살아있는 것이다. 이 모두가 욕심 많고 감정에 휘둘리는 나의 미숙한 기질과 무관하지 않은 것 같다.

오지랖이 넓어서인지 아니면 사람을 좋아해서인지 누가 무슨 부탁을 할 때 냉정하게 거절을 해야 마땅한 일도 대부분 거절하지 못하고 들어주는 경향이 있다. 그러다 보니 항상 몸과 마음이 휘둘려 살아온 감이 있다. 그 부분이 나의 가장 큰 단점이라는 걸 잘 알고 있는데도 잘 고쳐지지 않는다. 무리를 하다보면 몸에 병이 오고 한 번 병이 나면 잘 낫질 않아 그럴 때마다 후회를 하지만 별로 소용이 없다.

한동안 이런저런 일로 분주한 나날을 보내고 나면 혼자만의 시간이 문득 그리워진다. 다양한 사람들과 세상사에 휘둘리다 보면 모든 일을 잊고 그간의 스트레스를 풀고 싶은 생각이 든다. 소위 몸과 마음에 쌓인 독을 없애고 싶은 것이다. 심신이 피곤하고 마음이 울적해 질 때면 소파에 길게 누워 음악을 들으며 가만히 생각에 잠기는 걸 좋아한다. 내게 음악은 지친 영혼을 어루만져 주는 훌륭한 치료사에 다름 아니기 때문이다.

언젠가 ‘남자의 자격’이라는 어느 방송사의 프로에서 오합지졸 합창단이 몇 달에 걸쳐 유능한 지휘자의 지도를 받고 합창대회에 참가해 멋진 하모니를 이뤄 좋은 결실을 맺은 내용을 다룬 적이 있다. 당시 나뿐 아니라 많은 시청자들의 호응을 얻은 프로였던 걸로 기억하는데 여성 지휘자의 멋진 모습과 합창단원 모두가 노력하여 일취월장하는 모습을 보며 많은 감동을 받았고 합창단원 모두가 대회를 마치고 감격의 눈물을 짓는 모습을 보고 나 또한 따라 운 적이 있다. 특히 악보도 제대로 볼 줄 모르는 재일교포 격투기 선수가 합창단의 일원으로 참가해 합창을 마친 뒤 마음이 북받쳐 흐느껴 우는 모습은 어찌나 감동적이던지 지금껏 기억 속에 남아 있다. 그 프로가 하도 감동적이고 아름다워 여러 차례 반복해 보았다. 재방송을 볼 때도 같은 부분에서 영락없이 펑펑 눈물을 쏟았다.

음악 프로를 보며 아름다운 음악으로 마음을 달래고 그에 얽힌 감동적인 이야기에 눈물 흘리다 보면 마음이 가뿐해짐을 느낀다. 혼신을 다해 부르는 노래나 연주를 통해 지친 마음을 달래는 일은 나의 오래된 카타르시스 법이다. 특히 운전을 하며 듣는 감미로운 음악의 아름다움도 빼놓을 수 없다.

또 다른 스트레스 해소법은 편안한 옷차림으로 어슬렁 어슬렁 산책을 나가는 것이다. 소란스란 일상을 접어두고 표표히 현실을 떠나 잠시나마 나만의 길을 향해 떠나가는 것이다. 산책을 나서는 일은 알 수 없는 설레임을 준다. 비록 짧은 시간이지만 어디론가 떠난다는 설레임은 마찬가지가 아닐까 싶다. 평소 잘 가지 않던 곳으로 산책을 가는 경우 설레임은 더 크다. 특히 오랜만에 만난 아들과 함께 산책에 나설 때 그 기쁨은 배가 된다. 한적한 오솔길을 걸으며 그간 있었던 일을 두런두런 주고 받으며 서로의 생각을 나누고 공감대를 형성하는 정겨운 소통의 시간이 아닐 수 없다. 은은한 나무 향과 친숙한 흙 내음, 이름 모를 들꽃들과 함께 하며 걷는 즐거움을 어디다 비할 수 있겠는가. 몇 시간의 산책을 통해 내 영혼은 해맑아지고 새로운 힘이 생기는 걸 느낀다. 이렇게 산책을 하고 나면 명상을 하는데도 많은 도움이 된다. 나의 경우 시각명상에 치중 하는 편인데 산책이나 산행을 하고 나서 명상을 하면 아름다운 자연 풍광들이 파노라마처럼 펼쳐져 그렇게 마음이 황홀해질 수가 없다. 만병의 근원은 모두 지나치고 과한 것에서 비롯되는 것이 아닐까 싶다. 과도한 욕심, 지나친 속도, 무리한 경쟁, 문명에 대한 지나친 의존, 자연을 멀리하는 마음. 이 모든 것들이 우리를 지치고 힘들게 할 터, 이 가을엔 겸손과 고요, 느림과 침묵, 기다림과 여유, 배려와 절제를 마음 깊이 되새겨 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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