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인식 논란에 걸려 광폭행보 표류 지속

 대선을 90일 앞두고 새누리당 박근혜 대선후보가 총체적 위기를 맞고 있다.

봉하마을 방문으로 시작한 국민대통합 행보가 인혁당 사건을 비롯한 과거사 문제로 제동이 걸린데 이어 측근들의 잇단 비리 추문은 그의 정치쇄신 의지의 빛을 바래고 있다.

이 때문에 한동안 강고하던 지지기반은 흔들리기 시작했다. 민주통합당의 문재인 후보 선출과 무소속 안철수 후보의 대선출마 선언 등으로 언론의 조명은 차츰 야권 후보들에게로 옮겨가기 시작했다.

실제 이번주 들어 각종 여론조사에서 박 후보가 양자 가상대결에서 문재인ㆍ안철수 후보에게 추월당하는 결과가 나왔다.

민심이 크게 흔들리는 추석연휴 이전에 확고한 대선 후보로서의 위상을 구축하려던 박 후보측의 계획은 사실상 실패로 돌아가고 있다. 한달간의 대권행보가 표의 확장으로 이어지지 못했다는 분석이다.

야심차게 출범시킨 공약기구는 경제민주화를 둘러싼 잡음으로 시끄럽고, 정치쇄신특위도 낡은정치 자체를 쇄신할 수 있는 획기적 거대담론에는 접근하지 못한채 측근비리 차단책 정도의 지엽적 개선안 마련에 그치고 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이런 위기의 한 복판에는 박근혜 후보가 자리잡고 있다는 것이 당 안팎의 공통적인 지적이다.

야권 후보들의 움직임과는 별개로 박근혜 대 박근혜의 싸움이 벌어지고 있다는 것이다.

무엇보다 당내에서는 박 후보가 `불통 후보라는 볼멘소리가 터져나온다. 언론에서 연일 박 후보의 과거사 인식 문제를 비판하고 있지만 캠프 측은 "언제까지 사과해야 하느냐"며 오히려 항변한다. 박 후보의 생각도 이와 그다지 다르지 않은 것으로 알려졌다.

당내에서는 악재에 악재가 꼬리를 무는 총체적 난국을 돌파가기 위해서는 중앙선대위 조기출범을 비롯한 선거체제의 완전한 새틀짜기가 불가피하다는 이야기가 나오기 시작했다.

우선 박 후보의 과거사 인식의 대전환이 새틀짜기의 전제조건으로 꼽힌다. 수도권의 한 의원은 연합뉴스와의 통화에서 "시대정신은 40대를 기준으로 만들어지는 것"이라며 "하지만 40대가 박 후보의 역사인식을 이해 못하는 상황에서 어떻게 `시대에 맞는 사람이 될 수 있느냐"고 꼬집었다.

이재오 의원과 김문수 경기지사 등 유신 피해자는 물론 부정적 시각을 갖는 인사들이 적지않다는 점에서 과거사에 대한 새로운 접근이 당내 화합ㆍ통합을 이끌어내는 단초라는 주장이다.

한 재선 의원은 "이번 대선이 1∼2%의 초박빙 승부가 예상되는 것 아니냐"며 "그렇다면 과거사에 대해 사과하고 당내 유신 피해자에게 진심으로 다가가야 한다"고 말했다.

그럼으로써 과거사 문제를 조속히 정리하고 이에 걸맞은 과감한 대통합행보를 보여줌으로써 역사문제에 민감한 40대나 계층, 이념의 중간층들을 끌어안아야 한다는 것이다.

문제는 각종 채널을 통해 역사인식 전환의 시그널이 보내지지만 박 후보가 움직이지 않고 있다는 점이다. 박 후보 주변 인사들도 "역사의 판단에 맡겨야 한다"는 박 후보의 말만 되풀이하고 있다.

이는 박 후보의 불통 논란으로 연결돼 최일선에서 표심잡기에 나서야 할 의원ㆍ당협위원장들의 복지부동으로 이어지고 있다는 지적이 제기된다.

인혁당 사건에 대한 사과를 둘러싼 당내 혼선 끝에 홍일표 대변인이 사의를 표명한 게 이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사례로 꼽힌다.

친박(친박근혜)계 한 인사는 "박 후보가 자신의 생각과 다른 것을 말하면 이를 자른다"며 "도움을 주기 위해 조언ㆍ직언을 하지만 전혀 받아들여지지 않고 있고 의원들도 마음이 떠나는 상황"이라고 말했다.

심재철 최고위원도 이날 최고위에서 "역사의 평가에 맡기자며 뭉뚱그리는 것은 중도층을 잡는데 미흡하다"며 박정희 시대의 과(過)에 대한 통 큰 사과를 촉구하면서 "많은 사람이 직접 겪은 현대사는 주관적 인식과는 별도로 객관적 사실로 존재하며 당의 문제점이 되고 있다"고도 밝혔다.

박 후보는 `불통 논란을 불식하기 위해 각종 연찬회를 비롯해 의원 및 당협위원장들과의 접촉 횟수를 늘려왔다.

하지만 한 의원은 "박 후보가 소통과 미팅을 헷갈리는 것 같다"며 "무턱대고 통합을 얘기하면서 많은 사람을 만나는 것은 미팅이지 서로의 속내를 터놓고 얘기하는 소통이 아니다"고 꼬집었다.

핵심 당직자는 "후보가 정확하게 인식하지 못하는 문제에 대해 변화를 요구하는 목소리가 있지만 이와 관련해 소통이 되지 못하고 꽉 막혀있다는 느낌을 받는다는 얘기들이 많다"고 말했다.

각종 악재로 인해 직접적인 대국민 행보가 위축되면서 당내 단속 수준의 행보를 이어가고 있지만 이마저도 `플러스 효과를 거두기보다 `마이너스로 연결되고 있다는 것이다.

박 후보의 국민대통합ㆍ국민속으로를 내건 대권행보가 외형에만 치중한 나머지 `감동으로 연결되지 못한다는 지적도 있다.

전날 태풍 피해를 입은 경남 사천시 곤양면 송정부락을 찾아 수해복구 활동에 나섰지만 정작 봉사활동은 5분 남짓에 그치고 나머지는 격려와 현장 점검에 그친 데 대한 일각의 비판적 시각도 같은 맥락이다.

홍사덕ㆍ송영선 전 의원의 비리 추문이 강타한 전날 박 후보는 정치쇄신특위 회의에 전격 참석했지만, 그가 내놓은 메시지에서는 총체적 위기상황에 걸맞은 결연한 정치쇄신 의지가 묻어나지 않았다는 비판이 나왔다.

박 후보의 총체적 위기에 더해 문재인ㆍ안철수 후보의 상승세가 현실화되면서 추석연휴를 분수령으로 `박근혜 대세론을 지탱한 지지층 일부가 이탈, 지지율이 가파른 하향곡선을 그릴 것이라는 긴장감이 증폭되고 있다.

문제는 새누리당과 박 후보가 내세울 이렇다할 `카드가 눈에 띄지 않는다는 것이다.

박 후보 스스로가 크게 바뀌지 않고서는 좀처럼 돌파구를 마련하기 어려울 것이라는 의견이 주를 이룬다.

한 중진 의원은 "정치개혁은 친인척 비리 등 미시적인 부분에만 초점을 맞추고 경제개혁에 대해서는 후보가 의지를 보이지 않고 국민통합의 전제가 되는 역사인식 문제에는 변화의 조짐이 없다"며 "속수무책의 국면으로, 획기적 변화없이는 필패한다는 인식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친박 관계자는 "박 후보는 이제 카드가 별로 없는 것 같다"며 "선거캠페인을 처음부터 다시 한다는 생각으로 도전하지 않으면 안된다"고 말했다.

서울지역 한 의원은 "박 후보가 비키니라도 입겠다는 마음가짐으로 대선에 임하지 않고는 방법이 없다"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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