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 희 팔 논설위원·소설가

올해 건조기 첫 개시는 익모초가 한다. 시집갈 나이에 든 친정조카딸이 냉증으로 손발이 차고 생리통증이 있다며 수원 사는 올케가 한걱정을 하며 부탁하기에 한솔댁이 익모초를 뜯어 왔다. 전에는 집 주위와 길가에 지천이던 것이 약에 쓰려고 해서인지, 제초제와 이상기온 탓인지 통 눈에 띄질 않아 예전에 도토리 줍던 산 너머 너덕골에서 보았던 생각이 나 허위허위 넘어가 두 내외가 두 자루씩 잔뜩 뜯어 이고 지고 왔다.

익모초(益母草)라는 것이 ‘어머니(여성)에게 이롭다’고 해서 이름 붙여진 것으로 여성의 여러 질환에 효험이 있다지만, 한솔댁에게는 어렸을 적 한여름 더위 먹었을 때 친정엄마가 익모초 삶은 물을 아갈잡이로 먹였던 기억이 새롭다. 그 맛이 얼마나 쓰던지 소태 같아서 한사코 거부하곤 했었다. 그래서 올케는 익모초를 건조기에다 아시 말려 보내면 전문 건강원 찜통에서 이걸 엑기스로 내려 꿀을 섞어 환(丸)으로 짓는다는 것이다. 그래야 쓴 맛을 가시게 하고 휴대하고 다니면서도 복용할 수 있어 요새는 다 그렇게 한다며 간절히 부탁하는 거였다. 해서 한솔댁은 그 뜯어 온 익모초를 그간 별로 쓰지 않아 터진 꽈리 보듯 해온 건조기에 넣는데 20개의 말림판이 모자랄 것 같아 정상보다 두껍게 담았다. 애초 이 건조기는 고추건조용으로 샀다. 집의 김장용 고추나 말릴 요량으로 10판 짜리 조그만 것으로 사려던 걸 그래도 앞으로 모르는 일이니 가격차이도 얼마 안 나는데 이왕이면 조금 더 큰 걸로 하자는 남편의 제안이 있어 이에 따른 것이다. 건조기의 스위치를 올리면서 한솔댁은, 이렇게 많은 걸 한 번에 말릴 수 있으니 큰 것으로 들여 놓기를 잘했다는 생각을 했다. 그리고 인제 사흘 만에 마침내 건조기를 여는데 그 익모초 특유의 쓴 내가 열기를 타고 확 몰려온다. 그 쓴 냄새만으로도 속을 확 뒤집어 놓는다. 그걸 박스에 정성껏 담아 올케에게 보냈다.

한솔댁네는 올해 작정하고 고추를 예년보다 많이 심었다. 충분히 거름도 주고 주기적으로 약도 적당히 주는 등 신경을 쓰고 힘을 쏟았다. 게다가 한창 성장기에 날씨도 알아서 적당히 가물어 주어 아무런 해 없이 참 잘 되었다. 이걸 연일 따 들여 익모초로 개시한 건조기에 잇따라 말렸다. 그러다 보니 200여 근이나 되는 양이다. 그 소문이 무엇을 타고 어떻게 날아갔는지 대처에 사는 친지들로부터 주문이 쇄도하기 시작했다. “올해 고추농사 잘 졌다며 그렇게도 터울터울 애쓰더니 이제야 보람이 있구먼. 사십 근만 붙여줘.” 서울 고모다. 이를 필두로 이천 여동생, 서울의 남편 친구네, 청주 사는 여중동창들 등등해서 100여 근이 팔려 나갔다. 그간 땡볕 불볕의 고생이 빛을 본 것이다.

그런데 한창 이렇게 마음이며 기분이 들떠 있는데 여동생에게서 전화가 걸려왔다. “언니, 이상하다. 고춧가루가 왜 맛이 씹씰해?” “무슨 소리야?” “한번 거기 있는 고추 씹어봐!” 그때 한솔댁은 머릿속에 얼핏 지피는 게 있어 부리나케 고추 있는 데로 달려갔다. 앗, 정말이다. 한 자루에 든 것은 몇 개를 씹어 봐도 씁쓸하다. 가슴이 덜컥 내려앉는다. 익모초 말린 말림판을 씻지 않고 그냥 사용했으니 그 익모초 쓴 맛이 고대로 밴 게 틀림없다. 이어 다른 자루에 있는 것들도 다 몇 개씩 씹어 보았다. 괜찮다. 어휴, 다행이다. 눈이 멀어도 다행이라는데 그래도 남아 있는 100여 근은 괜찮으니 천만 다행이다. 이것들은 나중에 말린 것들이어서 냄새가 다 날아간 뒤라 위기를 모면했을 거였다. 한솔댁은 곧바로 여동생에게 전화를 걸었다. “얘, 그게 그럴 만한 이유가 있다. 내 불찰이야. 그거 도루 택배 착불로 반환해. 내 다른 것으로 곧 보내줄게.” 그리고 이내 한솔댁은, 아직 아무런 연락은 없으나 고추 사간 다른 사람 모두에게 확인전화를 걸었다. 그들은 이미 고춧가루로 빻았거나 빻으려고 방앗간에 갖다 줬다면서 아직 맛은 보지 않았으니 쓴지 단지 모른다고 한다. 한솔댁은 그들에게 저간의 사정을 이야기하면서, 맛을 보아 씁쓸하면 곧바로 연락 달라 하고 그러면 즉시 다시 보내준다고 거듭거듭 일러 주고 일일이 사과했다. 그리고 그길로, 괜찮은 고추를 보낸 만큼 각각 저울에 달아 놓고 이것들의 꼭지를 따고 배를 갈라 씨 발라내는 작업으로 들어갔다. 내 불찰이니 그네들에게 이러한 일을 또 하게 할 수는 없는 일이다. 그러면서 또 ‘그래도 성한 것이 그만큼 있어 다시 줄 수 있으니 얼마나 다행인지 모른다.’ 며 안도의 가슴을 쓸어내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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