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 은 순 문학평론가

며칠 전 남편이 능이버섯을 갖고 들어 왔다. 친구가 송이버섯을 따러 갔다가 오는 길에 사가지고 온 것이라고 했다. 바야흐로 가을로 접어들어 다양한 먹거리 수확이 이루어지는 풍요로운 계절이구나 싶었다. 가끔 송이버섯은 먹어 본 적이 있지만 능이버섯을 접하는 건 처음이라 아는 이에게 전화를 해 어떻게 요리를 해 먹으면 좋은지 물어 보았다.

살짝 데쳐 먹어도 좋고 버섯찌개를 끓여 먹어도 좋다고 했다. 대충 씻어서 끓는 물에 데쳐 초고추장을 찍어 먹었더니 향도 좋고 아삭아삭하는 것이 맛이 그만이었다. 남편도 능이 맛이 그만이라며 좋아라하고 먹었다. 독특하게 입맛을 사로잡는 능이버섯에는 가을 향이 깊게 배어 있는 듯 했다. 오랜만에 향기로운 버섯을 먹노라니 지난 캐나다 시절이 떠올랐다.

캐나다에 살던 시절 가을이면 송이가 풍년이었다. 시중 한인 마트에서 쉽게 접할 수 있는 송이는 크기도 크고 대체로 활짝 핀 것이 많았는데 대신 가격이 저렴했다. 보통 1킬로 정도 사려면 백불이면 충분했다. 품질이 좋은 상품 송이는 일본 사람들이 일찍이 주문해 가져간다고 했다. 값비싼 상품 버섯은 아니었지만 향이 그만이었고 그런대로 먹을 만했다. 거기서는 송이를 고기랑 구워 먹기도 하지만 송이밥을 많이 해 먹었다. 송이버섯을 잘게 찢어 넣고 밥을 지으면 송이향이 온 밥솥에 퍼졌고 양념장에 밥을 비벼 먹으면 그 맛이 일품이었다. 누군가 초대를 해서 가 보면 송이구이에 송이밥을 내 놓는 경우가 많았다. 그야말로 송이향 물씬 풍기는 가을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 연유로 어쩌다 가을날 버섯을 접하게 되면 캐나다 시절 푸짐하고 향기로웠던 송이 다발이 생각난다.

어느 한가로운 오후, 가을볕이 따갑게 내려쬐는 발코니에 앉아 며칠 전 서점에서 사온 따끈따끈한 책을 펼쳐 들었다. 마침 내가 좋아하는 문정희 시인의 산문집이었는데 그녀의 시를 워낙 좋아해서 수시로 찾아 읽고 강의 시간에도 많이 다룬바 있다.

여고 시절부터 천재성을 인정받은 그녀는 일찍이 미당 선생의 눈에 들었고 여고 시절 ‘꽃숨’이라는 시집을 낸 경력도 가지고 있다. 그녀의 시는 가히 천재성이 엿보인다. 독특한 시선, 사고의 발상은 독자들을 전율케 하는 힘을 지닌다. 오래 고민한 흔적이 없고(?) 시원시원하게 뱉어낸 듯한 거침없는 시어들은 읽는 이의 마음을 사로잡는다.

특히 ‘남자를 위하여’라는 시집에 실린 ‘사랑하는 사마천 당신에게’라는 시는 내가 제일 좋아하는 시중 하나로 꼽힌다. ‘투옥당한 패장을 양심과 정의에 따라 변호하다가 남근을 잘리는 치욕적인 궁형을 받고도 방대한 역사책 ‘사기’를 써서 인간이란 무엇인가를 규명해낸 사나이를 위한 노래’라는 긴 부제가 붙은 시이기도 하다. 참 그녀만이 붙일 수 있는 의미심장한 부제가 아닐 수 없다.

그녀의 시를 통해 나는 사마천에 대해 비로소 다시 알게 되는 계기를 갖게 되었고 역사를 통해 어떻게 문학적인 재창조를 할 수 있는가를 배웠다. 이밖에도 그녀는 조선 천지를 샅샅이 뒤져 ‘대동여지도’를 만든 고산자 김정호, 선덕여왕을 사랑한 떠꺼머리 총각 지귀, ‘왕이 하늘이 아니라 사람이 하늘이다’라고 외친 동학의 교주 전봉준, 아내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술을 마시고 강물에 뛰어든 백수광부의 자유로운 영혼, 귀를 잘라 버리고 정신병원에서 죽어간 고흐, 처용, 생떽쥐베리 등을 애정 어린 시선으로 노래한다.

그녀는 요즘 남자다운 남자, 더 나아가 사람다운 사람이 없다는 걸 한탄하며 사라져가는 원초적인 늠름함, 야성을 그리워한다. 그녀가 그리워하는 남자(사람)란 아름답고 성숙한 어른이다. 육체와 정신이 건강한 진정한 인간, 야성이 살아 있으면서도 영원의 힘을 믿는 자유로운 정신의 소유자인 것이다.

가을 햇살 아래 읽는 시편들은 훨씬 마음을 풍요롭게 한다. 평소보다 더 심금을 울리며 가슴 깊이 다가온다. 모처럼 시를 읽노라니 그동안 내 안에 소용돌이 치던 거친 욕망과 탐욕, 옹색한 마음들이 정화되는 느낌이 든다.

가을은 사람을 본질적으로 만든다. 문득 자신을 돌아보게 하고 삶을 관조하게 한다. 진정한 사람다움에 대해 생각하게 되고 인간 정신의 위대함에 대해 돌아보게 한다. 이런 가을을 난 더 없이 사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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