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석 조명희 탄생 118주년 2012 학술심포지엄… 포석 조명희는 누구인가?

 

충북 진천이 낳은 한국민족민중문학의 선구자 포석 조명희(抱石 趙明熙 1894.8.10~1938.511) 선생이 탄생 118주년을 맞았다.

포석은 한국문학 최초의 창작희곡 ‘김영일의 사(死)’(1921), 소설 ‘낙동강’(1927) 등 기념비적 작품과 한국근대 문학사상 첫 창작시집 ‘봄 잔디 밭 위에’(1924)를 발간하는 등 한국문학사에 우뚝 섰다.

동경유학시절 낭만적인 시를 쓰다가 연극운동가로 변신, 그 후 소설가로 활약했다. 1920년 봄 동경에서 근대극연구를 위해 조직한 극예술협회 창립동인으로 참가했고, 1921년 동우회(同友會) 순회극단의 일원으로 전국을 순회하며 연극활동을 펼쳤다.

이때 희곡 ‘김영일의 사’를 써서 동우회 순회극단 극본으로 삼았고, 그 작품은 선풍적 인기를 모았다. 또 ‘파사(婆娑)’(1923)라는 역사극을 발표해 현실을 간접적으로 비판했다.

시는 낭만주의적 색채가 짙고, 희곡은 궁핍한 식민지 현실의 고발과 인도주의의 바탕 위에서 인간의 자유평등과 인습타파를 그렸고, 소설은 반항적인 사회주의상을 보였다.

동양일보는 포석 탄생 118주년을 맞아 선생의 고향인 진천에서 ‘포석 조명희 학술 심포지엄’을 열었다.

동양일보문화기획단 주관, 진천군·포석기념사업회·진천문인협회 후원으로 열린 이날 심포지엄은 포석문학을 재조명하고 학술대회 결과물을 한국 문학사의 한 기록문화 자산으로 남기고자 마련됐다.

동양일보는 대학 국어국문학과 교수와 문학평론가, 시인, 수필가, 소설가 등이 참석해 열린 ‘2012 포석 조명희 학술심포지엄’의 내용을 싣는다.

 

    /주제 발표/

국내외를 아우른 민족문학의 선구자

이명재  중앙대 국어국문학과 명예교수

 “저는 대학에서 30여 년 동안 한국현대문학사를 강의하면서 느꼈던 것이 조명희 선생은 문학세계와 삶에 대해 연구하기 좋은 분이라는 것입니다. 그러한 생각은 15년 간 연구 프로젝트를 받아 조명희 선생에 대해 연구하고 책을 내게 했습니다. 저는 이 자리에서 포석 선생의 중요한 작품, 문학세계와 함께 삶에 대해 이야기 하겠습니다. 포석은 한국 신문학 초창기에 문단을 개척하고 이끌어온 대표문인임에도 민족수난의 소용돌이 속에서 너무나 소외되고 왜곡되어 온 문인입니다. 올해는 포석 조명희(趙明熙) 탄신 118주년과 작고 74주년인 되는 해입니다. 포석 조명희에 대해서 우리 문학사나 문단에서는 그 업적에 비해 상대적으로 소외시킨 데다가 왜곡되어온 게 사실입니다. 한때 남한에서는 카프활동에 앞장선 행적에 이데올로기적으로 금기시한 혐의가 짙은 작가로 생각하기도 했습니다. 1920년대 문단상황에서 카프측의 문학에서는 전체를 통틀어 프로문학 진영으로서 조명희의 소설 ‘낙동강’을 높이 평가하고는 이후의 포석문학에는 언급이 없습니다. 물론 1920년대 말엽에 러시아로 망명한 탓에 문학적인 정보가 차단된 영향도 없지 않겠으나 심지어 해당 작가를 월북 작가로 구분하는 일마저 없지 않았습니다. 그러다가 1980년대 후반 들어 우리 사회의 민주화 진전과 더불어 정부 당국의 납북 내지 월북 문인에 대한 연구나 자료 조사 및 발굴에 관한 해금에 따라 조명희 문학연구 또한 활성화되었습니다. 포석은 한국 신문학사상(新文學史上) 가파른 일제강점하의 민족수난기를 온몸으로 관통해 오면서 뚜렷한 문학적 특성으로서 여러 모로 뛰어난 업적을 이룩한 문인입니다. 극작가이며 시인인 동시에 소설가였던 그는 일찍이 프로문학과 항일의 기치를 들고 러시아 땅으로 망명하여 구소련의 고려인 한글문단을 세운 국외한인문학의 개척자이기도 합니다. 조명희는 구한말 무렵, 갑오 농민 전쟁과 동학혁명이 불타오르던 1894년 진천군 진천면 벽암리 샛말에서 태어났습니다. 전통적인 유림 집안의 4남 3녀 중 막내아들인 그는 어릴 적에는 서당에서 한문을 익히다가 진천 성결회가 세운 신명학교에서 신식 소학교 과정을 마쳤습니다. 14세 때 네 살 위의 여흥 민씨와 조혼한 그는 서울 중앙고보에 진학했으나 한창 영웅주의에 사로잡힌 스무 살 적에는 학교를 중퇴했습니다. 그것은 어린 나이에 부친을 여윈 데다 일본에 의해 국권을 잃은 나머지 평소 아버지 대신 의지하던 맏형마저 지리산에 은거해 버렸기 때문입니다. 고뇌와 방황 속에서 20대 중반을 맞이한 포석은 드디어 3.1 운동에 가담해 투옥된 적이 있습니다. 출옥한 직후 포석은 겨우 친구 편을 따라 오랜 출분의 뜻을 이뤄 일본 동경으로 건너가 동양 대학의 인도 중국 동양 철학과에서 공부했습니다. 이때부터 문학에 매진한 그는 27세인 1920년에 그곳 동경에서 유학 중이던 김우진, 홍해성, 최승일 등과 한국 최초의 서구적인 극예술협회를 만들고 이듬해인 첫 희곡 작품 ‘김영일의 사’를 발표했습니다. 31세인 1924년에는 그 동안 습작, 발표한 시편들을 모아 ‘봄 잔디밭 위에’라는 시집을 낸데 이어 이듬해에는 ‘개벽’지에 소설 ‘땅 속으로’를 선보이고 1927년에는 문제적 단편 ‘낙동강’을 발표해 주목을 받기도 했습니다. 그리고는 1928년 여름에 그의 단행본 ‘낙동강’과 이기영의 창작집 ‘민촌 소설집’ 공동출판기념회를 가진 이후 칠석(七夕)날에 홀연 러시아 해삼위로 망명했습니다. 그 후 그곳 연해주에서 조선어 교사나 한글신문 ‘선봉’의 문예면 편집일 등을 도우며 소련 작가 동맹원으로서 작품 활동을 계속 했습니다. 하지만 1937년 가을, 당시 연해주에 살던 고려인들을 중앙아시아로 강제 이주시키기 직전에 그는 일본 첩자라는 죄목으로 소련 기관원에 체포되어 이듬해 5월 11일에 하바로브스크 감옥에서 남몰래 억울한 총살형을 당했습니다. 그는 전 장르에 걸친 선구적 문인이었습니다. 포석은 신문학 초기에 해당하는 1920년부터 문단 활동을 해온 선구적 문인입니다. 또 그는 일찍부터 시와 동시, 희곡, 소설 등의 창작 문학 전 장르에 걸쳐서 퍽 개척적이고 심도 짙은 문필 활동을 해온 대표적 작가입니다. 또한 문학에서의 선도적 이념을 도입하여 식민 체제에 항거하고 우리 문학의 무대를 러시아 지역까지 확산시키기도 했습니다. 이런 점에서 포석 조명희는 적어도 한국 초창기 문단에서 여느 유명 작가들에게도 변별성을 지닌 문제적 문인인 것입니다. 희곡 ‘김영일의 사’(1921)는 우리나라 최초의 창작 희곡집 제호(題號)가 되기도 했고, 1924년에 시집 ‘봄 잔듸밧 위에’도 펴냈습니다. 희곡에 비하면 그의 첫 시집은 그 무렵 조명희 자신이 타고르의 노벨상 수상 시 영향을 받아 어머니 이미지를 통한 퍽 아늑하고 낭만적인 면과 함께 객지의 고독과 저항성 내지 프로문학적인 혁명 의식 등을 드러낸 것들이어서 결코 일관된 내용은 아니었습니다. 아직 이상적인 낭만주의나 사회적인 현실주의의 중간에서 서성대고 있었던 때문입니다. 단편 ‘낙동강’은 서두 부분에서부터 투쟁적인 열기가 차분히 가라앉은 대신 한껏 서정적인 분위기를 자아내고 있습니다. 포석 조명희의 주요한 문학 및 문단사적 특성 하나는 일찍이 국외로 망명하여 한국 민족문학의 영역을 국외로 넓혔다는 점입니다. 포석은 1920년대 말엽부터 10여 년 동안 스스로 연해주에서 창작활동을 하면서 소련지역의 고려인들에게 모국어문학을 가르쳐서 문단을 개척한 국제 한인문학의 선도적 공로자입니다. 소련지역에서 ‘고려’라는 용어도 바로 조명희가 쓴 ‘짓밟힌 고려’라는 산문시로부터 비롯됐습니다. 끝으로 포석 조명희의 작가적 성격은 표면적으로 문단 초기의 카프를 통한 사회주의적 항일의식으로 나타나지만 심층면으로는 결국 민족주의로 귀결된다는 견해입니다. 유·소년기를 아늑하고 전통적인 집안에서 평탄하게 자라며 낭만적인 세계에 젖어서 살던 포석이 일본유학을 다녀와서 궁핍한 식민지 농촌의 현실에서 카프를 통한 사회주의의식으로 항일적인 소설의 길로 나섰습니다. 그러나 소련에 망명한 조명희에게는 일제의 강압 대신에 새롭게 다가온 소비에트 당국의 엄격한 검열의 규제에 살면서 회의하며 드디어 심정적으로는 민족주의로 돌아왔다는 견해입니다. 이를테면 일제강점 체제에 항거하기에는 민족주의보다 사회주의의 길 선택이 법률적으로나 응집력에서 효과적이기에 자연스런 헤겔식 정반합의 변증법에 해당한다고 봅니다. 지금까지 저는 이 고장 태생 문인으로서 신문학 초엽부터 시종 민족사적 수난기를 살아오면서 한반도- 일본열도, 소련 연해주 등을 넘나들며 국내외에서 전방위적으로 남다른 문단활동을 펴온 포석 조명희 문학의 위상과 특성 등을 총체적인 시각으로 살펴보았습니다. 포석은 실로 전 장르에 걸친 선구적 문인이었고 ‘낙동강’ 등을 빚어낸 프로문학의 대부로서 신랄한 항일비판도 서슴지 않은 민족주의적 저항 작가였습니다. 특히 그는 일찍이 러시아로 건너가서 고려인을 비롯한 세계에 번진 한글문학을 맨 처음으로 씨 뿌려서 일으킨 국제화시대의 민족문학사적인 인물입니다. 조명희 작품에 번번하게 등장하는 예의 혁명투사, 노동자, 농민, 고학생, 실업자, 거지, 범죄인 등과 같은 작중인물들과도 상관됩니다. 가난과 돈, 굶주림과 밥, 아내와의 역정과 탈가(脫家) 및 범죄, 옥살이 모티프 등은 그대로 포석 문학의 주요한 작품 코드입니다. 이런 사실들을 고려할 때, 우리는 여기에서 새롭게 논의해 둘 과제가 남아 있음을 외면할 수 없습니다. 그것은 우선 일제강점의 상황에서 선택한 포석의 노선에 대한 재래의 근시안적이고 폐쇄적인 시각으로 소외시키고 터부시해 오던 고정관념에서 벗어나야 마땅합니다. 일찍이 소련 지역에서 형성된 한글 문학을 개척하고 손수 씨 뿌려서 키운 포석 조명희의 위상과 문학사적인 업적을 새롭게 평가해서 문학사에 정립시켜야 할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포석 조명희의 44년에 걸친 변증법적인 삶과 세계적인 한겨레문학의 궤적은 앞으로 통일민족문학의 한 모델로서 활용할 가치가 있다고 파악됩니다. 조명희 선생은 훌륭한 선각자로 여러 문학을 아우른 작가라고 할 수 있습니다. 남북한 통일문학사를 쓸 때는 러시아에 있는 고려인문학과 일본과 미국 교포문학 등을 함께 써야 하는데 그 모델이 조명희 선생이 안성맞춤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조명희 선생과 그의 업적을 연구하는 학자들이 많이 나오길 바랍니다.”

 

    /주제 발표/

포석 조명희 문학의 혁명적 낭만주의

김승환 충북대 국어교육과 교수

 “한국작가회(민족문학작가회의)와 민예총의 충북지회가 그간 포석 조명희 선생에 대해 관심을 갖지 못한 점을 송구스럽게 생각합니다. 작가회의와 민예총은 조명희 선생의 예술운동과 지향점이 같고 선생의 작가적 진정성을 높이 평가해왔으므로 여러 가지 노력을 해야 했으나 그렇지 못했습니다. 그간 많은 정성을 기울인 동양일보, 진천군, 집안의 후손 여러분들, 연변의 작가들, 연구자들, 연해주와 우즈베키스탄의 고려인(高麗人)을 비롯한 여러분들께 경의를 표하면서 발표를 시작하겠습니다. 작가와 작품을 분리해서 봐도 그렇고 함께 놓고 생각해 봐도 포석 조명희 선생처럼 중요한 분이 없다는 생각을 합니다. 조명희 선생님의 평가가 과소평가됐던 것은 해금 전까지 연구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이 분의 작품만 보면 형상성이나 예술성이 떨어진다는 관점도 있으나 한 작가를 볼 때 예술성만 갖고 평가할 것인가 작품과 작가, 시대를 함께 평가해야 할 것인가를 놓고 보면 일제강점기의 작가는 함께 놓고 평가해야 한다는 관점이 있습니다. 그런 면에서 포석 선생은 높이 평가받아 마땅하다고 생각합니다. 1928년 2월, 동아일보에 발표된 단편소설 ‘이쁜이와 룡이’는 비슷한 시기에 창작된 ‘낙동강’과는 상당히 다른 면모를 가진 작품입니다. ‘낙동강’이 문제적 인물의 역사적 전망이라는 프로문학의 창작방법론을 구현하면서 구조적으로 완결성을 가진 작품이라고 한다면, ‘이쁜이와 룡이’는 식민지 시대 농촌출신 두 인물의 반생(半生)을 통해 조선의 가혹한 현실과 식민지민의 비애를 표현한 작품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 작품에는 세 가지 텍스트가 존재합니다. 그것은 첫째, 농촌을 배경으로 하는 남녀의 아름다운 사랑이야기에 드러나는 서정성(抒情性) 둘째, 이쁜이와 룡이의 만남으로 시작하여 야반도주를 하고 도시 노동자로 살다가 파국을 맞는 이야기의 서사성(敍事性) 셋째, 이런 소설 미학의 예술성과 부조화를 이루면서 가장 강렬하게 표현된 프롤레타리아적 혁명의 사상성(思想性)입니다. 이 중 서정성과 서사성은 소설의 기본원리로 당연히 결합해야 하고, 또 결합할 수 있는 미학적 요소로 볼 수 있습니다. 하지만 서정성과 가장 먼 거리에 있으면서 서사성도 파괴하는 프롤레타리아 혁명의 사상성은 이 작품의 예술성을 현저하게 떨어뜨린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이 세 요소의 부조화는 조명희 자신이 서정성의 계보인 낭만주의 의식과 서사성의 계보인 마르크스적 계급혁명을 분리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이 소설의 앞부분은 대체로 이런 서정적 정조가 주류를 이루는데, 이 서정적 정조는 작중 인물의 서성성과 작가 그리고 독자의 서정성을 말합니다. 조명희 문학에서 서정성은 ‘낙동강’ 서두부터 ‘서정적인 분위기’로 시작해 마지막인 장례식 장면에서 ‘낙동강의 노래’와 어울리면서 빼어나게 서정적으로 묘사된 바 있습니다. 모든 작가는 서정성을 바탕으로 하므로 조명희도 예외는 아니지만 서사성의 우위로 인하여 서정성이 현저하게 약화되는 현상을 보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서정성이야말로 조명희 문학의 가장 큰 특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서정은 인간의 정이 끌리거나 울리는 것을 말합니다. 서방에서는 감성적인 음악을 의미하는 시의 특징으로 보는 서정(lyric)을 위주로 하지만 이런 서정성과 아울러 동방에서는 정경교융(情景交融) 감성적마음으로 보고 있습니다. 따라서 작중인물들이 서로 정에 끌리고 마음이 움직이는 묘사와 함께 작가와 독자의 정(情)이 발하는 것을 서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서정성은 감상과 감흥을 전제로 하며 희노애락애구욕(喜怒哀樂愛懼慾)과 같은 인간의 심성을 발하게 하는 것입니다. 조명희 작품 전반을 관류하는 분노, 폭력, 울분, 비애, 절망, 불안 등의 원형적 감성이 서정이라고 생각합니다. 다음으로 서사의 텍스트를 살펴보겠습니다. ‘이쁜이와 룡이’는 두 사람의 주인공인 이쁜이의 반생(半生)과 룡이의 반생이 빠른 속도의 서사로 서술되어 있습니다. 이쁜이와 룡이, 두 인물의 서사는 정확하게 대칭구조를 이룹니다. 그래서 서사단락의 분절 역시 똑같이 진행되며 사랑 - 배신 - 파국의 서사구조를 위해 인물이 복무하는 것과 같은 형식을 취하게 됩니다. 이 작품 역시 다른 조명희 소설과 유사하게 비극적 파국으로 결말을 맺고 있습니다. 모든 소설은 시간의 진행이고 이것을 헤겔은 역사의 행정(行程)이라고 했거니와, 어떠한 상황에서 다른 상황으로 진행하는 사건이 소설이므로 조명희 소설의 파국적 결말의 서사 역시 시간의 진행이고 그것이 서사의 전개입니다. 따라서 파국적 결말구조는 파국을 통한 전망으로 보아야 할 것입니다. 다음으로 포석 작품의 사상의 텍스트를 살펴보겠습니다. 조명희 문학은 혁명의 열정, 실패한 혁명, 실패한 혁명가, 거칠게 드러난 혁명의식이라는 일관된 특징이 있습니다. 그의 대표작으로 꼽히는 ‘낙동강’도 이런 특징이 그대로 드러나지만, 대표작으로 꼽는 것은 서술자가 내용과 형식의 균형을 취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의 문학이 그렇듯 그의 생애 역시 혁명의식으로 일관되어 있으며, 죽는 날까지 항일반제투쟁과 프롤레타리아 세계혁명을 실천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의 희곡, 시, 소설, 수필 그리고 여러 형식의 글은 선명한 사상성이 명확하게 드러나 있습니다. ‘이쁜이와 룡이’에서도 볼 수 있는 사상성은 앞에서 분석한 서정성과 서사성이라는 두 축의 변증법적 통합인 동시에 텍스트의 질서를 파괴하는 생경한 요소입니다. 도시로 이주한 농민 룡이가 인과적 개연성 없이 혁명의 투사가 되어 설교하기도 합니다. 이것에 나타난 신념에 찬 계급의식과 투쟁정신은 순박한 농촌 머슴 룡이의 목소리라기보다 작가 조명희 자신의 목소리라고 보아야 합니다. 그런데 작가가 텍스트 안으로 직접 들어가게 되면 조명희 자신이 가진 식민지 현실에 대한 분노, 민족해방에 대한 열망, 계급투쟁의식, 사회주의 사상이 강렬하기 때문에 서사구조의 층위를 파괴시킨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작가 조명희 자신이 내포작가와 서술자의 텍스트내의 기능을 제어하고 직접 이야기 서술에 개입하게 됩니다. 물론 룡이와 같은 농민일지라도 투철한 혁명의식을 가질 수 있습니다. 문제는 그런 의식변화를 형상성을 갖추어 서술하지 않았다는 점입니다. 또 검열을 의식해 생략과 암유(暗喩)로 처리해야 했겠지만 그럴 경우에도 소설 전편의 형상성만은 유지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이 사상의 텍스트야말로 조명희 문학을 규정하는 원리이면서 서정성이나 서사성을 훼손하거나 간섭하는 요인이었고, 항일민족해방운동가이자 프롤레타리아 혁명가 조명희 그 자체를 상징하는 핵심 텍스트 구조입니다. 조명희 문학의 최종 기착지는 사회주의 리얼리즘입니다. 하지만 조명희 문학의 최초 출발점은 감상적 낭만주의였습니다. 초기 낭만적 감성은 ‘내 영혼(英魂)의 한쪽 기행(紀行)’이라는 시에서 잘 드러납니다. 1920년대 초, 박영희, 박종화, 이상화 등 백조파 동인들은 낭만주의적 패배감을 극단적인 저항으로 역전시키고, 프로문학운동으로 투신하여 카프의 맹원이 됩니다. 조명희 문학에는 서정적 정조라고 해야 하는 감상성과 낭만성이 흐르고 있습니다. 조명희의 세계관과 창작방법론의 근저에 혁명적 낭만주의 의식이 있고 작품 전편에 혁명적 낭만성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혁명적 낭만주의는 사회주의적 사실주의의 창작방법론이면서 프로문학과 소련 작가동맹의 공식 창작방법론인데 반하여, 혁명적 낭만성은 ‘랑만적색체’라고 할 수 있는 정조(情調)이고 또 ‘사회주의적 사실주의의 중요한 구성부분’을 말합니다. 조명희 작품 전편에서 격정, 울분, 신념 등이 끊임없이 표출되는 것은 조명희의 내면에 질풍노도(疾風怒濤)의 격정이 낭만성으로 내재하기 때문입니다. ‘이쁜이와 룡이’에서 드러난 것처럼 작가가 직접 작품 속으로 이입하여 자기 목소리를 냄으로써 작가, 내포작가, 서술자가 일체가 되는 부자연스러운 현상이 발생합니다. 이것은 작가 조명희의 정신이 그만큼 절박했고 격정적이었다는 것을 의미하며 그 절박성은 반제항일의 분노와 조선의 비극적 현실에 대한 의식적 응전의 결과입니다. 그 의식과잉은 작품의 구조를 훼손하거나 왜곡하지만 그런 순정한 작가의식이야말로 조명희 문학의 가치일 것입니다. 포석 조명희의 결곡한 심성이 작품 속에 투영되어 혁명적 낭만성의 정조를 보여주며 창작방법론으로써 혁명적 낭만주의를 형성하고, 비판적 사실주의를 완전히 극복하지 못한 사회주의적 사실주의로 드러납니다. 의식이 과도해서 이러한 서사구조를 택했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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