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 유 경 세명대 교수

어느새 수확 철이다. 집 앞의 황금빛 들녘에 가을걷이가 한창이다. 갈색의 볏단이 곳곳에 세워지고 까치와 참새가 떨어진 낟알을 찾아다니고 노부부가 말없이 들깨를 털고 있다.

짙은 보랏빛 탐스러운 열매가 매달려 있던 가지와 붉은 열매가 주렁주렁 열리던 토마토, 큼직한 둥근 열매를 자랑하던 호박 넝쿨, 키가 큰 옥수숫대 등은 이제 수명을 다해 낫으로 쳐내지고 있다.

한 시간 정도 걸리던 아침 산책길이 요즘은 십 여분 더 걸린다. 노랗게 물들어가는 콩잎이랑 햇빛에 반짝이는 억새풀, 키만 삐쭉한 도깨비 풀, 이름 모를 풀들, 그 사이에 고개를 내밀고 있는 연보랏빛의 쑥부쟁이, 고추잠자리.

정겨운 가을 풍경을 눈에 잔뜩 담아두려고 하지만 그걸로 부족하다. 그래서 요즘 나는 마주치는 장면마다 휴대폰을 들이대면서, 겨울이 오기 전에 총천연색의 가을 들녘을 사진으로 담아두는 중이다. 곧 겨울이 되면 온통 세상은 단조로운 잿빛과 갈색으로 변하고 몇 달 동안 아름다운 색채를 감상할 수가 없게 되기 때문이다. 한동안 더위가 계속되고 태풍이 불더니, 이제 정말 가을에 푹 접어들었다. 며칠 전에 이웃에 사는 분이 상자 하나를 털썩 내려놓더니 문을 빼꼼 열고 상자 하나를 안으로 쓱 밀어놓았다.

뭔가 싶어 들여다보니 갓 캐낸 고구마가 가득 담겨있었다. 허리도 구부정한 분이 이리 무거운 걸 어떻게 들고 왔을까 싶었다. 크고 작고 길고 동그랗고 다양한 모양을 한 불그스레한 고구마가 무척이나 귀엽게 보였다. 이 많은 걸 어떻게 다 먹을까? 학생들과도 나눠 먹고 싹을 틔워 책상 위도 장식도 하고 또 따뜻한 데 두고 한 겨울 실컷 먹어야지. 이런 생각을 하자 절로 배가 불렀다.

지난해에는 이웃에게서 땅콩을 선물 받았었다. 어느 곳에서도 그렇게 맛있는 땅콩을 먹어본 적이 없을 정도로 고소하고 씹는 맛이 풍성했다. 이웃들이 농사를 짓고 수확을 하느라 허리도 아프고 손톱도 망가지고 피부도 검게 그을리는데 학교에 편하게 머물다가 공짜로 얻어먹기만 하니 그저 미안하고 고마운 마음뿐이었다. 그뿐인가. 초겨울에 접어들면 집집마다 직접 가꾼 배추를 뽑아다가 다듬고 절이고 양념하여 겨우내 먹을 김치를 담근다. 나이 드신 친정어머니가 김장에서 손을 떼신 이후 김치를 사서 먹고 있는데, 배추가 풍작이었던 지난해 겨울에는 이웃들이 나누어준 김장김치에 한동안 행복했다. 이집 저집에서 한 통씩 건네 준 김치를 큰 통에 모으다 보니 여러 집 김치가 마구 뒤섞였는데 그 맛이 독특하고 일품이었다. 그 후 사다 먹는 김치는 그 맛을 내지를 못했다. 이웃의 훈훈한 인심에 마음도 몸도 통통해지는 기분이었다.

제천에 이사 온 지도 20년이 다되어 간다. 처음 이사 왔을 때 아침마다 엘리베이터에서 이웃을 만나면 영락없이 일 나가세요?”라는 인사말을 듣곤 했다. “학교 가세요?”라는 익숙한 말 대신 일 나가세요?”라는 낯선 말에 당황하기도 했지만, 나는 이웃사람들의 투박하면서도 푸근한 인사말에 익숙해져 . 일 나갑니다라고 대답하며 재밌어 하곤 했다.

세월이 흐르면서 이곳에도 아파트가 많이 세워지고 집집마다 이사 나가고 이사 들어오고 하면서 계속 이웃이 바뀌고 있지만, 동네 인심은 크게 변하지 않았다. 다만 나 자신이 나이가 들어가고 젊은 층이 이사 들어오는 일이 늘어나서, 이제 이웃이 내게 일 나가세요?”라고 말을 건네는 것보다 내 쪽에서 이웃에게 먼저 인사말을 건네는 것이 달라진 일이라 하겠다. 하지만 여전히 다정한 이웃들이 남아 있어 여전히 김치와 떡을 나누어 먹으며, 나는 정겨운 자연 속에서 느리지만 여유로운 삶을 누리고 있다. 이제 이곳은 또 하나의 고향이 되었다. 일이 있고, 가족이 있고, 이웃이 있고, 자연이 있으니, 나는 참으로 운이 좋다는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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