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 종 호 논설위원·청주대 명예교수

신이 세상에서 처음으로 만들었다는 꽃, 분홍·자주· 흰 빛깔 등이 조화의 극치를 이루어 더 없이 아름답게 보이는 꽃, 의리와 사랑의 꽃말을 가진 코스모스(일명 살살이 꽃)가 길가는 나그네의 발걸음을 멈추게 하는 만추의 계절이다.

온 누리에는 산중미인이라 불리는 빨강, 노랑, 갈색 등의 단풍이 산홍(山紅:붉게 타들어 가는 산자락), 수홍(水紅:물을 붉게 물들임), 인홍(人紅;사람의 얼굴을 붉게함) 등 삼홍의 물결로 출렁이고 있다.

산하가 온통 불타고 있다.

사람들은 관풍(觀楓) 하려고 유산(遊山), 등고(登高)하고 있다. 이런 단풍들이 바람을 타고 화무(火舞)를 연출하다가 낙엽 되어 땅위에 쌓인다. “오동잎 하나가 떨어지면 가을인 것을 천하가 안다(梧桐一葉落 卽天下知秋)”라 읊은 이황의 한시(漢詩)처럼 가장 먼저 이목(離木)한다는 오동잎은 이미 낙엽이 되었다.

달빛 깔린 뜰에는 오동잎지고 서리 속에 들국화는 시들어 가네(月下庭梧盡 霜中野菊黃)라는 황진이의 시구(詩句)가 가슴을 저리게 한다. 위로는 무한대의 천평선(天平線)과 아래로는 끝이 보이지 않는 지평선(地平線) 위에 낙엽이 하염없이 휘날리고 있다.

어느 시인의 말처럼 가을은 혼자를 허락하는계절이다. 가을은 사색과 명상의 계절이다. 봄에 새싹으로 태어난 나뭇잎은 여름을 만나 녹음이 되고 가을을 맞아 단풍으로 살다가 낙엽으로 조락한 뒤 나신(裸身)으로 한 주기를 마친다.

이러한 자연의 순환을 보면서 인생의 의미를 성찰하게 하는 계절이다. ‘인생은 잠깐 있다 없어지는 안개(기독교)’, ‘한 조각 뜬구름(불교)’, ‘낯선 여인숙에서의 하룻밤(테라사 수녀)’, “살아 있는 게 무엇인가 숨 한번 들여 마시고 마신 숨 내 뱉지 못하면 그게 바로 죽는 것이지. 삶이란 한 조각 뜬구름 일어남이오. 죽음이란 한 조각 뜬구름 스러짐이라. 구름은 본시 실체가 없는 것 죽고 살고 오고 감이 그와 같은 것이다(서산대사·生也一片浮雲起 死也一片浮雲滅 浮雲自體本無實 生死去來亦如然).” 사람들이 자주 입에 올리는 말처럼 가을은 인생이란 한바탕의 봄꿈(一場春夢)이고, 이슬과 같고 또한 번개 불과 같은 것이며(如露亦如電), 꿈같고 환상 같고 물거품 같고 그림자 같은 것(如夢幻泡影)이라는 말들이 뇌리에 맴돌면서 무상과 허무에 대한 의미를 되새기게 한다.

인간의 존재나 인생의 의미에 대한 사색이나 명상을 하는데 있어서 빼 놓을 수 없는 구절이 있다.

명심보감의 순명편에 나오는 죽고 사는 것은 명에 있는 것이요 부자가 되는 것이나 귀히 되는 것은 하늘에 있는 것이다. 모든 일이 나누어 이미 정해졌거늘 세상 사람들이 부질없이 바뻐 하는구나(死生有命 富貴在天 萬事分已定 浮生空自忙)”는 공자의 말씀이다.

이 중에서도 모든 일이 나누어(각기) 이미 정해졌다는 만사분이정이란 구절이 마음을 사로잡는다.

이 구절을 인간의 일생에 대입하면 인간은 태어날 때부터 이미 정해진 삶을 살게 마련이라고 풀이할 수 있다.

이는 신분, 재력, 건강, 수명, 성격, 능력 등을 천성적인 것으로 받아들이는 시각이다. 소위 숙명론의 관점이다.

대개의 경우 인생을 숙명론의 시각에서 받아들여야 한다고 말하면 부정적인 사람으로 본다.

그러나 필자는 이 용어를 철학의 출발점으로 이해한다. 인간은 말과 사고력을 가지고 있어서 만물의 영장이라고 칭하지만 한없이 나약한 존재이다.

광활하고 무한대인 우주 속에서 찰라의 시간에 머물다 가는 한시적 존재이다. 공수래공수거의 허무한 존재이다.

어디서 왔다가 어디로 가는지도 모르는(生從何處來 死向何處去) 무지의 삶이다. 그렇기에 숙명론을 부정적인 시각보다는 소명과 사명의 시각에서 받아들일 필요가 있다. 나에게 주어진 모든 것을 하늘의 뜻(소명)으로 수용하고 그렇다면 사명감을 가지고 그 뜻에 맞게 최선을 다하는 삶을 영위하는 것이다.

신분, 지위, 능력 등에 대하여 타와 비교하거나 자기비하를 하지 말고 그 자체에 충실한 삶을 사는 것이다. 입신양명에 급급하지 말고 하늘이 맡겨진 뜻에 진력하는 삶을 사는 것이다.

그렇게 하면 세상이 제대로 보이고 철학의 경지로 진입할 수 있을 것이다. 본질과 진리를 볼 수 있는 것이다. 숙명을 하늘의 뜻으로 보고 긍정적인 시각에서 수용하는 것이야말로 인간이 아름답고 가치 있는 존재가 될 수 있는 길인 것이다. 운명(발전을 의미하는)으로 가는 길인 것이다.

산야는 자연의 여왕인 단풍으로 물들어 있다. 소슬한 바람이 불고 끝없는 서정의 세계가 펼쳐져 있다. 사색과 명상에 돌입해 보자.

이정의 일기장을 펼쳐들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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