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 희 팔 논설위원·소설가

승용차 한 대가 장등할머니네 집 앞에 선다. 운전석에서 내린 약간 늙고 점잖아 보이는 한 남정네가 차 앞으로 돌아와 뒷좌석 문을 여니 머리 파뿌리할머니가 엉금엉금 내린다. “그려, 예가 맞네. 사람을 불러봐!” “, 어머니하지만 아들이 안을 들여다보며 계십니까, 계십니까?”를 몇 번이나 해도 아무런 기척이 없다. 그때 웬 차가 내 집 앞에 서 있누. 뉘요?” 하는 소리가 들린다. 장등할머니다. 손에 호미가 들려 있는 것으로 보아 밭일하다 온 모양이다. 파뿌리할머니가 뒤로 돌아 한참을 상대방 얼굴을 빤히 들여다본다. “맞네, 맞네, 장등성님일세!” 손을 덥석 잡는다. “글씨 내도 아슴푸레하긴 한데 뉘더라?” “나 발써 예전에 성님한테 신세진 떠돌댁이우. 성님이 이름 붙여준 떠돌댁. 그래도 모르슈?” “그려? 이제 본께 참 그렇구만. 이게 웬 일이랴. 어여 어여 들어갑세.”

하루는 장등댁네에 한 나그네가 찾아들었다. 중년쯤 된 아낙이다. 장등댁 또래로 보이는데 하룻밤 묵어가기를 청한다. 생면부지의 외지사람이다. 그간 장등댁네에서 묵어간 사람은 많다. 하지만 그들 모두는 일가붙이들이었다. 시골에 농사일이 끝나고 김장을 마친 겨울을 맞으면 이들은 하나하나 철새처럼 찾아들었다. 그리곤 한 마디씩 했다. “우리 종가아줌니, 인제 한가하시쥬. 말벗이라도 해드릴려구 또 왔어유.”, “큰집성님, 뵙고 싶어 왔어유 여전하시네. 올해두 곡석 많이 끄들이셨쥬.”, “조카님네가 젤루 편햐. 온다구 막기를 하나 가라구 눈치를 주나.”, “신세지러 또 았어유. 속으루 너무 미워하지 말어유. 그래두 여기밖에 기댈 데가 없는 걸 어떡해유.” 그리곤 이레를 자고 가고, 열흘을 지내고, 어떤 이는 한 달을 묵고, 누구는 겨울 삼동을 뭉개다가 해동이 돼 농사철이 돼서야 돌아가기도 했다. 그래도 장등댁은 이들이 갈 때는 다만 시래기 한 꼭지라도 꼭 들려 보냈다.

이러했는데 이번엔 일가붙이도 아닌 아낙 나그네다. 장등댁은 남편과 상의했다. 그러나 남편은 일언지하에 거절했다 그러는 걸 장등댁이 나섰다. “여보 애들 아버지, 생판 모르는 남이긴 하나 아낙의 몸으로 이 밤에 어찌하란 말이우. 내가 건너방에서 같이 잘 테니 그리 아시우.” 해서 반강제허락을 받았다. ‘나그네 귀는 석 자라 주인들이 소곤거리는 이러한 실랑이를 아낙은 귀를 바짝 세우고 듣고 있었다. 그런데 이튿날 아낙은 떠날 생각은 않고 오히려 장등댁의 허리를 꼭 붙잡고 애원한다. 더 있게 해 달라고. 그 표정이며 태도가 어찌나 절실하고 간절한지 장등댁은 허락하고 말았다. 이렇게 해서 아낙은 주인댁의 허드렛일을 도맡아하고 농사일도 주인댁과 똑같이 하면서 우애롭게 지냈다. 그러다가 하루는 장등댁이, 밤이면 시무룩이 무슨 생각에 잠겨 있곤 하는 아낙에게 가정이며 가족 상황에 대해 물었더니 가정, 가족이 있긴 있는데 그냥 떠돌아다니고 싶어 그런다는 말만 했다. 이때부터 장등댁은 아낙을 떠돌댁이라고 부르면서 더는 아낙의 신상에 대해 묻지도 알려 하지도 않았다. 이제 이렇게 정이 흠뻑 들어 자매처럼 지내는데 석 달쯤 되는 날 떠돌댁이 갑자기 가봐야겠다며 작별의 눈물을 흘리곤 훌쩍 떠나갔다. 그리고 이튿날 장등댁은 경대 위에 놓인 돼지저금통의 밑바닥이 뻥 뚫려 가벼워진 걸 알았다. 장등댁은 힘없이 중얼거렸다. ‘, 돈이 한 푼도 없었을 텐데 챙겨주질 못했구나!’

이후 장등댁이 떠돌댁의 소식을 궁금해 하며 그리워하면 다 큰 손자손녀 녀석들이 쓴 반응을 보인다. “할머니 다 소용없어요. 할머니만 짝사랑하는 거예요. 보세요, 그 많이도 드나들며 묵어갔던 그 일가친척 분들 어디 하나 소식 있어요. 그 떠돌댁할머니도 마찬가지예요.” 그러면 아니다. 그래도 그때가 좋았어. 찾아오는 사람 있고 사람 북적대고 말이다. 지금같이 이렇게 썰렁한 세상은 아녔어.” 이렇게 힘없는 방어를 했다.

이제 영감도 가고 애들도 제각각 살림나가 시골집에 홀로 있는 지금, 그 떠돌댁이 찾아온 것이다. “성님, 같이 늙바탕이 된 내 자식입니다. 오늘은 나그네가 하나 더 늘었지요. 그래도 여전히 안 쫓아내네요.” 그리곤 방안을 두루두루 둘러본다. 장등할머닌 얼른 경대 위의 돼지저금통을 수건으로 가렸다. 행여 보면 난감해할 것 같아서였다. 두 나그네는 가지고 온 선물을 한 아름 장등할머니의 가슴에 안겨주고 이번엔 하룻밤만 묵고 이튿날 떠났는데, 장등할머니가 돼지저금통 아래에 돈뭉치가 깔려 있는 걸 발견한 건 그들을 배웅하고 돌아와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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