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 영 선 동양일보 상임이사

 

어느 자리에선가 꽃다발을 좋아하지 않는다는 말을 한 뒤, 종종 꽃을 싫어하는 메마른 사람으로 비쳐지는 것을 느낀다.

실제는 꽃을 싫어하는 것이 아닌데 말의 뜻에 숨은 역설을 이해하지 않아서이다.

꽃다발을 받으면 그 순간은 좋지만 예쁜 꽃들이 바로 시들고 그 시체를 치워야하는 것이 마음이 아프다.

그래서 꽃을 보고 싶을 땐 직접 숲으로 간다. 숲의 관문인 초입에는 무시로 꽃들이 핀다. 달걀프라이같은 개망초꽃, 자홍색의 깽깽이풀, 분홍빛 현호색, 키꺽다리 미국자리공의 흰색꽃, 마법사의 고깔모자 같은 물봉선, 백합과의 하늘말나리, 싸리꽃, 보랏빛 칡꽃… 봄내 여름내 소박하게 숲을 꾸미던 그 꽃들이 요즘 계절엔 저마다 겨울채비를 하느라 씨앗을 맺고 열매를 매달았다. 풀꽃들만이 아니다. 숲의 작은 관목들은 또 얼마나 아름다운 열매를 달고 있는가.

청아해 뵈는 보랏빛 작살나무 열매, 청미래덩굴의 까만 열매, 쥐똥나무 열매, 찔레와 비목나무의 빨간 열매, 댕댕이덩굴 열매. 이들은 사람을 꾀려는 것이 아니라 새들에게 잘 보이려고 온갖 호사를 다 부린다. 가을 숲은 이들 겨울을 준비하는 열매가 있어서 아름답다.

늦가을, 갑자기 들르게 된 충남 태안 천리포수목원의 풀과 나무들도 겨울채비는 예외가 아니었다. 차가운 물속에 뿌리를 박은 낙우송과 잎넓은 나무들은 떨켜를 만들어 잎과 이별할 준비를 하고 있고, 젊은이들이 사랑의 밀어를 나누기위해 좋아한다는 닛사는 이미 그 무성한 잎을 다 떨구고 명증하게 가지만 아래로 내려놓고 있고, 그 가운데 가을 벚꽃나무만은 그 이름값처럼 특이하게도 이 계절에 분홍 꽃송이를 달고 있다.

그러나 천리포수목원에서 이 계절 가장 아름다운 것은 빨간 열매를 닥지닥지 매단 호랑가시나무들이다. 호랑가시나무는 왁스를 바른 듯 윤기나는 육각형의 잎끝에 딱딱한 가시가 있는 상록수로 이곳 수목원에만 350여종이 있다.

이 나무를 서양에서는 ‘성스럽다’는 뜻의 ‘Holy’에서 나온 ‘Holly’로 부르는데, 그것에는 다음과 같은 유래가 전해진다. 예수가 골고다 언덕에서 가시관을 쓰고 이마에 피를 흘릴 때 로빈이라는 작은 새가 예수의 머리에 박힌 가시를 뽑아보려고 애를 쓰다가 가시에 찔려 죽고 만다. 그런데 그 새가 호랑가시나무 열매를 좋아했기 때문에 이 나무를 귀하게 여기고 성탄절 장식으로 쓰게 되었다고 한다. 크리스마스카드에 촛불과 함께 그려진 뾰족뾰족한 초록 잎새와 빨간 열매의 나무가 바로 호랑가시인 것이다.

누군가 왜 이 예쁜 나무에 ‘호랑가시나무’라는 무서운 이름을 붙였는가 물어왔는데, 우리나라 풀과 나무들의 이름이 대다수 생김새를 빗댄 이름이듯, 이 나무 역시 잎 끝에 달린 가시가 호랑이 발톱을 닮았기 때문이라고도 하고, 또 호랑이도 무서워 할 정도로 가시가 단단한 나무라는 뜻이라고도 한다.

또 일부 전북 지방에서는 호랑이가 등이 가려울 때 등 긁개로 썼던 나무라 해서 ‘호랑이등긁개나무’라는 이름으로 부르기도 한다.

호랑가시나무는 목련(400여종), 동백(300여종)과 함께 천리포수목원의 3대 수종으로, 설립자인 고 민병갈(Carl Ferris Miller)선생이 특별한 애정을 쏟았던 나무들인데, 그중에도 완도호랑가시나무는 자신의 생애에서 가장 자랑으로 여겼던 나무이다.

완도호랑가시나무는 민병갈 선생이 1979년 완도지역 수목채집 여행시 처음으로 발견하여 국제식물학회에 신종으로 발표하면서로 완도라는 지명을 갖게 됐다.

그러나 아쉬운 것은 그렇게 해서 우리지명 이름은 지켰지만, 그 유전자원은 현재 미국 하버드대학교 부속 아놀드수목원 한국식물소원에 있다는 점이다. 한때는 완도 군외면 삼두리 야산에 군락으로 자생하고 있었다하나 지금은 그 흔적을 찾아보기 힘들다하니 아쉬움이 크다.

그러나 천리포수목원에서 ‘겨울의 왕’처럼 그 녀석들이 초록잎 사이에 정열적인 빨간 열매를 매달고 위풍당당하게 버티고 있으면서, 완도호랑가시나무가 우리나무이며 우리 땅에서 늘 볼 수 있다는 자부심을 갖게 해주니 얼마나 다행한 일이 아닌가.

완도호랑가시나무는 우리가 가꾸고 사랑해야 할 우리나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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