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 묘 순 수필가·옥천문인협회장

 

 

가을이, 봄을 준비하는 겨울바람에게 손을 들었다.

해가 뜨고 비가 내리고 또 밤이 오고 바람이 불었다. 정처 없는 계절은 초대되지 않은 손님으로 머물다 다음 계절에게 자리를 내주고 만다.

마음이 심란하거나 주변 정리가 안 될 때에는 정지용 생가에 들러 본다. 마당을 한 바퀴 휘휘 둘러서 문학관으로 들어가면 언제나 같은 모습으로 지용 선생님은 그곳에 계신다. 지용 선생님을 꿈꾸며 문학인인 수필가로 옥천에 머무른 지 스무 해가 지났다.

지용 선생님 옆에 가만히 앉아본다. 항상 과묵하다. 유독 내게만 침묵으로 일관하시는가. 지용 생가의 초가와 그 옆의 감나무에 걸린 까치밥에서 소재를 얻어 등단 작품을 내고 수필가라는 거창한 꼬리표를 단지도 십 년을 넘고 또 수년이 지났다.

지용 선생님 옆에서 수필가로 사는 건 나에게 어떤 의미를 부여하는가.

지용 생가 옆의 가죽나무가 잎을 돋아낼 때도, 문학관 앞의 소나무가 여름 땡볕을 머리에 이고 인고의 세월을 견디고 있을 때도, 세상의 모든 사물들이 흰 눈을 이불처럼 덮고 잠들 때도 난 서성였다. 목마른 강아지마냥 풀리지 않는 갈증 앞에서 울어도 보고 소리도 질러 보았다. 그러나 그것은 메아리도 만들지 못하는 이명 상태의 좌절을 안겨주고 촘촘히 사라져 갔다.

이명처럼 다가온 나의 갈증은 정지용의 산문에서 해결의 실마리가 보이기 시작했다. 정지용은 1919년 처녀작 삼인이라는 소설을 발표한 이후 1930년대 후반부터 120여 편이 넘는 수필을 발표한다. 한편, 그는 행적이 불분명할 때인 1950628일까지도 국도신문남해 오월 점철이라는 기행 수필을 18편 발표한다.

이렇게 많은 산문인 소설과 수필을 내놓은 문학가 정지용은 시인 정지용으로만 알려져 있었다. 정지용의 생애와 관련하여 지금까지 연구되어 온 논문도 또한 시 중심으로 연구되어져 온 것도 사실이다. 산문 중 수필이라는 갈래적 특성으로 볼 때 정지용에 관한 정신적 세계관과 문학관, 그리고 일제하에서 시로 표출할 수 없었던 이야기들도 또한 그의 산문에 오롯이 나타날 수 있기 때문이다.

정지용의 고향에 거주하는 수필가인 나는 그것에 대한 궁금증과 어지럼증이 일기 시작했다. 시인 정지용과 문학가 정지용 사이에서 풀릴 것 같지 않은 고민을 해결하려 그의 작품에 가까이 가 보았다. 아지랑이가 피어오를 무렵부터 시작된 나의 정지용 산문 읽기는 겨울을 몰고 오는 바람이 불어올 쯤에야 윤곽이 드러났다. 정지용의 생애와 관련된 흥미롭고 새로운 사실들도 덤으로 이 과정에서 몇 가지 발견하게 되었다.

첫째, 정지용의 작가론이나 작품론에서 연보나 본문에 나타나는 어느 해 여름 갑자기 밀어닥친 홍수 피해로 집과 재산을 모두 잃고 말았다.” 또는 어느 해 여름 두 차례의 홍수로.” 부분이다.

충북의 독지가(篤志家)’(매일신보, 1912. 01. 13.) 라는 기사를 보면 그 문제의 어느 해작년 7월에 대우(大雨)의 제()에 읍내의 하천에 홍수가 나서 하안이 붕괴함을 발견하고 연장 약 120간의 제방을 개축할 새 비에서 보여주듯 1911년임을 알 수 있다.

또 한 차례는 1917년이다. ‘옥천 전멸, 전부 침수” - 참혹한 홍수의 피해, 익사자 5’(매일신보, 1917. 8. 11), ‘옥천의 수재민에게, 독지가의 따뜻한 동정’(매일신보, 1917. 8. 15.) .

이와 같은 근거 자료로 보아 옥천에는 1911년과 1917년에 큰 홍수가 지나갔고, 이 홍수는 특히 한약상을 운영하는 정지용 집의 가세가 기울게 되는 직접적인 원인 제공을 했음에 틀림없다.

둘째, 정지용의 가정이 초기에는 부유하였다고 한다. 그와 관련한 자료는 동락원 기부금 방명록, 1918. 8. 15에 나타나 있다. 옥주사마계 후신인 동락원에 경술국치 이후(1911년으로 추정-오상규가 옥천에 이때 이사왔기 때문) 오상규(탁지부 전 출납국장) 40, 신현구(전 옥천군수) 5, 정태국(정지용 부친) 20전을 기부했다고 적혀있다. 기부금을 낼 정도의 형편으로 보아 정지용의 초기 가세는 부유하였음을 짐작하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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