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 형 일 극동대 교수

방송에 대한 강의를 하다 학생들에게 최근 SBS에서 방송을 시작한 드라마의 제왕을 보라고 했다. 다른 이유는 없고 방송사 수익구조에 상당한 영향을 미치는 드라마의 제작과정을 소재로 하고 있어 수업내용을 이해하는데 도움이 될 듯 싶었다.

이 드라마는 우리나라의 드라마 제작현장의 문제점을 예상보다 더 적나라하게 보여주고 있다. 방송 첫 회부터 극의 맥락과 관계없는 간접광고(PPL)를 집어넣기 위해 대본을 억지로 수정해야 하는 상황을 꼬집었다. 3억원의 협찬을 받은 오렌지주스가 노출돼야 하는데 시간에 쫓겨 가며 겨우 대본을 마무리한 작가는 제작자의 대본수정 요청을 거부하고 잠적하고 만다. 마음이 급한 제작자는 작가의 작업실에서 뒷정리를 하던 보조작가를 속여 대본을 수정하게 한다. 마지막 회가 방송되는 당일까지도 생방송처럼 진행되는 촬영현장에 쪽대본이 도착한다.

한 물류센터에서 악당들과 한바탕 싸움을 치르고 나오던 주인공은 어질러진 창고 바닥에 떨어져 있는 주스 한 팩을 집어 든다. 우아한 복수를 마친 주인공은 다소 추워 보이는 바닷가에서 뜬금없이 오렌지주스를 벌컥벌컥 들이마시더니 스스로 목숨을 끊는다. 감독의 !’ 소리와 함께 끝난 마지막 장면을 담은 비디오테이프는 우여곡절 끝에 방송 종료 15분 전에야 겨우 방송국에 도착한다.

타 방송사의 드라마가 모두 끝난 130초 동안 드라마는 시청률 30%를 넘기면서 막을 내린다. 피말리는 시청률 경쟁, 생방송 같은 촬영현장과 쪽대본의 남발, 극의 흐름조차 끊어버리는 과도한 PPL. ‘드라마의 제왕은 이렇게 드라마 같은 드라마제작 현장의 이면을 보여주며 시청자들의 눈길을 끌었다.

재미있는 것은 과도한 PPL의 폐해를 풍자하는데 사용된 문제의 오렌지주스가 사실은 이 드라마의 진짜 PPL 제품이었다는 사실이다. 물론 드라마의 전개과정에서 자연스럽게 특정 제품이나 브랜드를 노출시키는 PPL20101월 방송법 시행령이 개정되면서 합법적인 광고수단이 되었다. 보도와 어린이 프로그램이 아니면 브랜드 노출장면이 전체 방송시간의 5%, 전체 화면크기의 4분의 1 이내면 된다.

하지만 극의 흐름과 상관없이 등장하는 갑툭튀’(갑자기 툭 튀어나오는 광고)는 극의 완성도를 떨어뜨리고 시청자의 몰입을 방해한다. MBC ‘더킹 투하츠에서는 주인공이 시도 때도 없이 특정 제품의 도너츠를 먹는 장면이 반복되었다. SBS ‘유령에서는 여자 수사요원이 다른 남자요원으로부터 화장품을 선물 받는 장면이 나온다. 선물을 건네주며 말하는 더 아름다워지세요는 이 제품의 광고 카피이고, 여배우는 지금도 이 제품의 광고모델로 활동하고 있다. 지난 주 종영한 KBS ‘착한 남자의 주인공은 이름이 협찬사 상호명과 같아서 구설수에 올랐고, 여주인공은 툭하면 최신형 카메라와 스마트폰으로 각종 기능의 사용법을 상세하게 재연했다. 이쯤 되면 PPL은 몰입을 방해하는 수준을 넘어 시청자들의 짜증을 불러일으킨다.

그럼에도 부족한 제작비를 충당하기 위해서 어쩔 수 없이 PPL을 집어넣어야 하는 불합리한 외주제작 시스템 외에도 드라마의 제왕은 앞으로도 드라마 제작현실의 온갖 부조리를 계속 드러내기로 작정한 듯 같다. 후배의 배신으로 한 순간에 모든 것을 잃은 드라마 제작자인 주인공은 새로운 드라마로 재기하기 위해 극중에서 한류스타로 나오는 톱스타에게 회당 1억원 씩 총 20억 원의 출연료를 주겠다고 제안한다. 안 그래도 얼마 전 한 드라마에 출연한 배우의 출연료가 회당 1억원이었다는 사실이 알려지며 많은 시청자들이 씁쓸해한 적이 있었다.

드라마에서는 급기야 방송편성권을 미끼로 외주제작사들로부터 접대와 뇌물을 받은 방송사 드라마국장이 체포되는 장면까지 등장한다.

극적인 재미를 위해 지어낸 허구이지만 개연성이 없지 않다보니 혹시라도 좋은 드라마 제작을 위해 고군분투하는 많은 제작진과 배우들까지 도매금으로 넘어가는 것은 아닌가 하는 걱정이 든다. 다음 강의 때 학생들에게 말해야겠다. 드라마는 드라마일 뿐이라고.

동양일보TV

저작권자 © 동양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