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 희 팔 논설위원·소설가

 

동네에선 종구와 지한이만 알고 있다. 그래서 이들은 부득부득 겨울이 다가오는 게 그렇게 야속할 수가 없다. 아니 안타깝다. 겨울이 되면 그 청청하던 나뭇잎도 떨어져 나가고, 추워서 몸이 자꾸 움츠러들어 그래서 마음이 울적해지고 썰렁해져서가 아니라 한 생명에 기한(期限)이 다가오고 있기 때문이다. 물론 모든 생명엔 기한이 있다. 하여 그 기한을 마치고 훌쩍 떠나간다 해서 지나치게 슬퍼하지 말고 담담하게 받아들이라고 한다. 하지만 둘의 마음이 그렇게 담담해지질 않는다. 아무려면 선형이만이야 할까마는.

서울 가 사는 선형이가 여름에 내려와서 제 아버지를 서울의 병원에 모시고 갔다 오더니 둘에게 이런 말을 했다. “너희들만 알고 있어 우리 아버지 겨울나기 힘드시데. 위에 종양이 너무 많이 퍼져서 손을 댈 수 없다는 거야. 이렇게 되기까지 고통이 심하셨을 텐데 그걸 눈치 채지 못했냐고 의사가 나무라는 투더라. 부끄러운 얘기지만 난 까맣게 몰랐지. 당신이 아직 젊었을 적부터 담()이 어깨로, 등허리로, 가슴으로 돌아다닌다며 가끔 고통스러워하다가도 이내 괜찮아졌다며 별 걱정을 안 보이셨거든. 그리고 노라에 들면서부터는 그 담이 아랫배로 내려왔는지 뱃속에서 꿈틀거린다며 가끔 배를 움켜쥐곤 하시다가 또 이내 그냥 지나치시기에 그때도 뭐 그냥 그러신가보다 했지. 그러다 근년에 와서는 부쩍 수척해지고 배의 고통을 잦게 보이는 눈치가 있으셔서 이번에 병원 모시고 갔더니 글쎄 그러시다는 거야. 애가 끊어지는 심정일세.”

그래서 종구가, “요즘 위암은 아무것도 아니라던데.” 했고, 지한이가, “그 어르신 성미가 워낙 깐깐하시니.” 했다.

선형이가 또 말을 이었다. “아버진 당신이 그러시다는 걸 모르고 계셔 차마 말씀 못 드리겠더라구. 어머니도 모르셔 아시면 아버지보다 먼저 쓰러지실 거거든. 그래서 부탁인데 우리 아버지 니들이 좀 보살펴 드려. 당신 그런 줄도 모르고 곧 쓰러져도 힘 부친 농사일 보나마나 계속하실껴 그러시는 걸 니들이 좀 브레이크를 걸어달란 말여 눈치 채시지 않게. 나도 인제 자주 내려와야지 아주 내려왔으면 좋겠지만 어떡하냐 당장 직장 그만 둘 수도 없구.”

그리고는 선형인 거의 주말마다 내려와 제 아버지가 벌여 놓은 농사일을 돕고는 부랴부랴 올라가곤 했다.

그러니 환자 본인은 물론 멋도 모르는 어머니 불쌍하고 부모 땜에 노심초사하는 친구 선형이 여간 딱한 게 아니다.

선형인 여기서 태어났으니 여기가 고향이지만 선형이 아버진 신혼 때 살 곳 찾아 이리로 들어온 이주민이다. 그러니 땅 한 뙈기 없어 머슴살이며 소작농으로 살림을 꾸려오면서 선형이 남매 벌고 근근덕신 논 마지도 마련했다. 선형이 공부시켜 서울서 살게 한 지금도 70불구하고 남의 땅 더 빌려 일벌레생활을 한다.

저 저 저 저 사람, 아무래도 죽기 전에 오장부터 폭삭 상할 것이고, 죽으면 가죽보다 뻬다구가 먼저 썩을 것이여.” 소소한 것에도 온통 마음을 쓰고 잠시도 삭신을 놀리지 않는 그를 보고 동네어른들이 하는 소리다. 그렇다고 해서 세상 돌아가는 일에 무관심한 건 아니다. 특히 선거 때가 되면 그는 한가하질 못하다. 각 정당의 특색이며 입후보자들의 자질, 투표방식이며 절차, 투표자들의 마음가짐이며 각오 이런 것들에 대해 차근차근 일러주고 일일이 응답해 주느라 그렇다. 이러하니 여러 선거캠프로부터 유혹의 손길도 들어오지만 이에 한 번도 응한 일이 없다.

이러한 그가 시한부인생이란다. 그것도 모르고 그는 피골이 상접해진 몰골로 여름 가을까지 농사일에만 올인 했고 겨울로 접어든 지금에 와서는 한창 시끄러운 대선 때문에 마음이 무겁다고 한다. 종구와 지한인 이러한 친구 선형의 아버지를 날마다 그냥 지켜만 볼 뿐 무슨 뾰족한 도움을 줄 수 없었다. 하여 애만 태우고 있는데 바야흐로 겨울이 문턱에서 서성이는 것이다. 이제 둘은 선형일 위로해 줄 수밖에 없다. 마침 선형이가 또 내려왔다. “겨울이라는 게 말이야, 내년에도 후년에도 있는 것 아닌가?” “그야 그렇지만 의사의 겨울은 올겨울을 말하는 것이겠지. 내년겨울이라면 내년자를 넣었을 것 아닌가?” “그런 말이라면, 올겨울이라고 자도 넣지 않았잖은가?” 이때 지한이가 그 틈새를 얼른 치고 들어온다. “그러니께 종구 말은, 좋은 쪽으로 생각하자 즉 긍정적인 쪽이 좋지 않으냐 이거제.” “그렇다면야 얼마나 좋겠는가!”

어르신, 이번 대선투표는 하실 수 있지요?’

이러는 이들에게 부득부득 겨울은 더 바짝 다가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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