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화정 청주시사회복지협의회 사무처장

 

학창시절, 부모님이 주는 용돈에는 서러운 아부와 애교 섞인 투정이 섞여있었다.

그 한 푼의 간절함이란 대선자금만큼이나 소중하고 보조금만큼이나 절실했었다.

세 살 버릇 여든까지 간다는 옛 속담처럼 직업인으로 사는 지금까지도 학창시절 용돈에서 얻은 화폐의 위대함은 절약정신에 지대한 영향을 미치고 있다.

용돈으로 어찌나 하고 싶은 게 많던지 이리 쪼개고 저리 쪼개도 한없이 더 나눠야 했다. 마치 유전자 정보를 활용한 바이오약품의 복잡하고 치밀함을 닮은 듯 했다.

돌이켜보면 학창시절 용돈의 대부분은 친구와의 주전부리에 거의 탕진(?)했었다. 내가 받은 피 같은 용돈이 친구와 함께 먹는 떡볶이와 어묵, 그리고 소시지가 힘차게 들어앉은 핫도그를 위해 아낌없이 쓴다 해도 아까움이 없었다.

그런 귀한 용돈을 쓰는데 아까움이 없다니 그 이유가 뭘까?

이유는 명쾌하다.

친구니까 !

단발머리가 촌스러웠던 그 시절은 여학생 교실에서도 남학생 교실과 별반 다를 게 없었다. 눈에 보이거나 구리 구리한 냄새가 어디에선가 스멀거리면 왁자지껄해지면서 도시락도 빼앗아 먹고 매점에 외상도 거침이 없었다.

먹고 돌아서면 배가 고프고, 먹고 돌아서면 배가 고프던 혈기왕성한 사춘기였으니 먹는 것을 함께 한다는 것은 먹는 것 그 이상의 의미였던 것 같다.

하물며 화장실도 손에 손을 잡고 갔다.

왜냐구 물으신다면 당연 친구니까 라고 말할 것이다.

화장실 문 밖에서 철통같은 인간안보, 물 샐 틈 없는 친구안보로 서로가 가장 친한 친구임을 은근 과시하던 아이들도 많았다.

친구를 위해 가기 싫은 화장실 문밖에서 보초 서는 기본기 정도는 당연지사였다. 친구라는 이유만으로 못갈 곳이 없고 못할 일이 없기도 했던 시절이었다.

그런 이유로 고되고 삭막한 중고등학교 학창시절은 충분히 견딜 만 했고, 친구와 함께 나누는 우정은 돈으로 살 수 없는 행복감을 가져다 줬다.

돌이켜보면 친구와 경제를 나누고 웃음도 나누며 추억을 돌담 삼아 인생을 쌓았던 것 같다.

청소년기에 친구라는 존재는 정책과 법으로도 그를 대신할 순 없을 것이다.

그런 이유로 학창시절이 그리워지고 사람이 그리워지게 된다.

이렇듯 사람과 사람과의 관계가 유지되려면 친구와의 친밀함을 전략적 도구로 상품화해서는 안 된다는 사회적 교양이 있어야 한다.

나는 반복해서 말한다.

나의 유일하고 확고한 진리는 사람에 대한 믿음이라고 말이다.

학창시절 친구에 대한 믿음은 행복한 추억이고 행복한 인간복지라는 것이 나의 지론이다.

물론 나이가 들어 꼬부랑 할머니가 되어도 그 생각은 불변할 것이다.

가끔은 친구라고 믿었던 사람들에게 배신감을 느끼기도 한다.

아마도 인간관계에서 절대 변하지 않을 것이라는 헛된 믿음으로 상대방에게 그에 걸맞은 행동을 일방적으로 기대하기 때문일 것이다.

어쨌든 간에 그런 심리적 퍽치기 배신은 사람에 대한 트라우마를 남기고 불신과 의심으로 사람과의 거리를 멀게 하지만 여전히 불변의 법칙은 사람에게 위로 받는다는 것이다.

지구에 사는 사람은 70억여명이다. 그 많은 사람들 중에 서로를 추억하고 기억해줄 이 없다면 그 또한 인생이 헛되다 할 수 있지 않을까?

춥고 황량한 이 겨울에 주전부리 함께 했던 친구, 화장실 문 앞에서 무서움을 함께 나누던 친구가 더욱 그리워진다.

더불어 가까이 있는 이웃이 친구가 되도록 서로를 염려해주고 안위를 챙겨주길 간절히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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