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 영 자 수필가

 

 

 

깃털처럼 가벼운 눈이 한 송이 두 송이 떨어지기 시작한다. 가늠 할 수 없이 가물가물 먼 곳으로부터 축복처럼 사분사분 춤추며 오는 눈송이가 반갑다. 하늘, 저 멀리 구만리장천에서 누가 저리도 많은 눈송이를 불어내리는 걸까. 천사의 손길이 보일 것만 같다.

눈송이가 점점 더 굵어진다. 세상은 온통 눈으로 덮인다. 모든 더러움을 덮어주기라도 하듯 골고루 내린다. 순백의 새하얀 세상이 되었다. 뿌연 하늘에서 문득 낭랑한 시가 들려온다.

 

가난한 내가 / 아름다운 나타샤를 사랑해서 / 오늘밤은 푹푹 눈이 나린다 //

나탸샤를 사랑은 하고/ 눈은 푹푹 날리고 / 나는 혼자 쓸쓸히 앉아 소주를 마신다/ 소주를 마시며 생각한다 / 나타샤와 나는 / 눈이 푹푹 쌓이는 밤 흰 당나귀 타고 /산골로 가자 / 출출이 우는 깊은 산골로 가 마가리에 살자 //

눈은 푹푹 나리고 / 나는 나타샤를 생각하고 / 나타샤가 아니 올 리 없다/ 언제 벌써 내 속에 고조곤히 와 이야기한다 / 산골로 가는 것은 세상한테 지는 것이 아니다 / 세상 같은 건 더러워 버리는 것이다//

눈은 푹푹 나리고 / 아름다운 나타샤는 나를 사랑하고 어데서 흰 당나귀도 오늘밤이 좋아서 응앙응앙 울을 것이다 //

 

시인 백석의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 가 환청으로 들린다. 그가 이 시를 써내려간 날도 오늘처럼 눈이 푹푹 빠지도록 내렸을 것이다. 모든 시인들을 무릎 꿇게 하는 마력이 있는 감칠맛 나는 시다.

눈이 많이 내릴 것이라는 일기예보를 듣고 일찌감치 지하 주차장으로 차를 옮겨놓은 일은 참 잘 한 일이라고 스스로 칭찬하면서 나는 하염없이 눈 오는 하늘만 바라보고 있었다. 하지만 그게 아니었다. 눈 때문에 교통이 마비되는가하면 교통사고가 이어지고 시민들의 발이 묶여 꼼짝 못한다는 뉴스에 나는 꿈에서 깨어나듯 화들짝 놀라 아들 집으로 전화를 돌린다.

하나는 집에서 숙제를 하고 있고 하나는 학원에 갔단다. ‘이 눈 속에 학원이라니….’ 혀를 끌끌 차는 일 외에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다. 아들, 며느리에게 조심해서 무사히 집으로 돌아가라는 당부 뒤에 따라오는 것은

“엄마 제발 밖에 나가시지 말고 집에만 계셔요.”

그래 바로 그거다. 이 나이에 밖으로 나돌다 얼음판에 넘어지기라도 하면 큰 낭패가 아닌가. 겨울이 되면 나이든 사람들은 곰이나 다람쥐처럼 동면하는 방법은 없을까. 모든 걱정 근심 접어두고 저 눈 속에 푹 파묻혀 겨울잠을 잤으면 싶다.

눈은 두 가지 얼굴을 가졌다. 한없이 깨끗하고 순박하며 순진무구한 영혼을 지녔지만 그것을 잘 다스리지 못하면 생명도 앗아가는 칼날을 지녔다. 눈으로 인한 교통사고가 2만여 건이라는 보도다. 병원에는 골절환자가 줄을 잇는다니 나는 이때다 하고 한 이틀 꼼짝 않고 집안을 서성거리며 쉴 수 있는 절호의 기회다. 눈부신 이 고립을 스스로 즐기고 사랑하리라.

집에서 내려다보면 공원의 경치는 크리스마스카드처럼 아름답다. 흰 눈을 이고 서 있는 소나무의 기개가 그 어느 때보다도 장엄하다. 아무도 밟지 않은 순백의 저 공간에 하얀 내발자국을 남기고 싶지만 마음뿐이다. 눈을 이고 있는 나무 밑동을 툭 치면 와르르 눈이 쏟아져 내 머리위로 나비물처럼 흩어져 내리고 누군가 내 모습을 본 사람이 까르르 웃어 제칠 것을 생각하니 객쩍게 웃음이 나온다.

눈꽃열차를 타고 강원도 산골 눈 쌓인 마을 추전역으로 마냥 달려가고도 싶다. 사랑 하는 이가 함께 동행 한다면 더 없이 좋은 일이지만 혼자서 차창 밖 풍경을 하염없이 내다본다 해도 눈이 있어 외롭지 않으리.

그러나 이런 풍경뿐이랴. 사랑하는 이와의 이별로 가슴앓이 하는 사람들은 이청준의 소설 ‘눈길’ 처럼 사랑하는 이가, 아니 사랑하는 아들이 밟고 지나간 발자국을 되밟으며 집으로 돌아오는 길, 가슴에는 천근만근 납덩이를 달고 오는 이도 없지 않으리.

올 한해도 노루 꼬리만큼 남았다. 흰 눈이 세상의 낙서들을 깨끗하게 지웠듯이 우리 안에 자라고 있는 교만도, 원망도, 질투도, 다툼도, 모두 눈 속에 꼭꼭 묻어버리시라고 눈의 신(神)에게 두 손 모아 비는 마음이다.

동양일보TV

저작권자 © 동양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