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 수 길 논설위원·소설가

 

 

일상에서 우리는 무수한 선택과 마주친다. 때로는 사소한 사안을, 때로는 국가나 개인의 운명을 좌우할 엄중한 사안을 놓고, 다수 중 하나를, 혹은 양자택일을 해야 할 경우가 있다.

그 선택은 선택권자의 자유의사가 보장 돼야하고 어떤 방해나 강압도 배제 돼야한다. 그러나 우리의 근세사는 그렇지 못했다. 국민 개개인의 선택권이 보장되지 못했던 건 물론, 국가나 정권 차원에서도 역시 그랬다. 자유의사를 박탈당하거나 외압에 휘둘렸기 때문이다.

조금 멀게는 친명(親明)과 친청(親淸), 친일(親日)과 친러(親露)의 선택을 놓고 파벌싸움에 휘말려 국가와 국민이 시련을 겪었고, 좀 더 가까이는 민족자존의 선택권을 박탈당하는 바람에 ‘한일합방’이라는 국권피탈(國權被奪)의 비운을 맞았다. 그 후 36년간, 우리와 마주하게 된 ‘선택’이란 명제는 ‘강요’의 다른 말일뿐, ‘권리’는 천리 밖 환상의 어휘였다.

광복 후, 한반도 38선 이북은 소련이, 이남은 미국이 시정권(施政權)을 행사하는 신탁통치를 놓고도, 우리의 선택권은 묵살되었다. 반탁과 찬탁 중, 우리의 선택을 묻는 과정조차 없었다.

2차 대전 전승국거두회담에서 일방적으로 결정, 우리는 수용만을 강요당했다. 결국 한반도에 두 개의 정부가 대립, 국토분단과 민족분열의 비극에 이어, 6.25라는 참상을 겪었다. 북녘의 주민에게는 ‘선택’이란 단어자체가 불필요할 만큼, 모든 권리가 박탈 된 상황이다. 한반도 유일한 합법정부인 대한민국에서도, 한때 국민의 선택권 일부가 침해받거나, 억압받는 일이 없지 않았다. 자유당말기의 선거가 그렇고, 5.16 후 유신정부의 탄생이 그랬다.

결국 우리는 역사의 전환기에 ‘선택’을 잘 못하거나 혹은 그 권리를 박탈당하는 바람에 숱한 고난을 겪었고, 그 후유증으로 아직도 삭신을 앓고 있다. 그런데도 동포끼리 총을 겨누는, 분단(分斷)과 이산(離散)의 한(恨)을 치유할 마땅한 처방을 찾지 못하고 있다.

통일달성이 우리 독자적 힘만으로는 아직 어렵더라도, 남쪽 땅에서만이라도 일치(一致)를 이뤄야 하겠건만, 그마저 안 된다. 궁극의 목표는 같지만, 보수와 진보가 서로 등을 보이며, 손잡기를 거부하고 있다. 자신들의 선택만이 옳다며 분열과 갈등을 낳고 있다. ‘선택의 권리’는 보장 돼 있지만, 자유가 오도되고 지역과 파벌의 이기집착이 지나치기 때문이다.

굴곡 많은 우리현대사의 방향을 좌우할 또 한 번의 ‘선택’기회가 내일(12.19)로 닥쳤다.

지금은 선택권을 간섭하거나 억압할 어떤 요인도 없다. 그만큼 현명한 유권자의 판단이 요구되고 책임 또한 커졌다. 그러나 선거철 마다 닥치는 매타도어가 문제다.

2002년 대선 때의 이회창 후보 아들의 병역비리설과 10억 원 수수설, 2007년 대선 때 이명박 후보의 BBK 주가조작설, 2011년 서울시장 보선 때 나경원 후보의 연회비 1억 원 피부관리설. 그 밖에 크고 작은 ‘설’의 대부분이 비겁한 매타도어였음이 드러났지만, 결과는 원님행차 뒤의 나발이 됐다. 병역비리설 유포당사자 김대업의 ‘나는 이용당했다’는 폭로는 폭소대신 탄식을 자아내게 한 ‘허무개그’였다, 역사의 방향은 이미 틀어져 버렸고, 그를 이용한 무리는 누릴 것 다 누린 뒤에, 징벌은커녕 한 마디 회개조차 없이 꼬리를 감췄다.

지금도 여전히 설(說)은 난무한다. 유포당사자야 ‘아니면 말고’겠지만, 유권자의 선택을 혼란케 한 책임은 면할 길이 없다. ‘어쨌든 당선되면 그만’이라는 몰염치한 세력이 정권을 잡으면, 유권자는 그들의 노리개가 되고, 정치는 또 ‘그들만의 잔치’가 될지도 모른다.

때문에 정권을 한풀이 수단으로 생각하고 사술을 쓰는 이들에게 국정을 맡기는 건 위험천만이다.

선거를 ‘돈 따먹기’기회로 삼아 종북이념 선전과 ‘먹튀’본심을 드러내고 꼬리를 내린 세력이나, 노인세대 폄하를 반복하며 투표불참을 선동, 득을 보려는 세력에 동조하는 것도 ‘선택권’의 엄중한 가치를 절하하고 역사의 방향을 그르치는, 역시 위험천만한 일이다.

내일 행사하는 유권자의 한 표는, 차기 대통령 선택과 함께 향후 5년, 아니 미래의 국운을 선택하는 엄중한 일이다. 자질과 경험, 능력에 비추어 공약실천 가능성이 얼마나 높은가는 물론, 타 후보지지 유권자와 경쟁세력도 함께 끌어안을 아량이 있는 후보를 선택해야 한다.

저간에는 ‘설’이 망친 선거가 많았다. ‘매타도어’나 ‘네거티브’는 원 뜻이야 다른 꼬부랑말이지만 우리에겐 이음동의어요, 둘 다 유권자의 올바른 선택을 망치는 함정이다. 현명한 유권자는 거기 빠지지 말고 포기하지도 말고, 현명하게 선택권을 행사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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