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당선소감 /  윤 혁 로
표현의 욕구로 자주 오르던 신열, 세상으로 통로 마련 감사

“난 아버지처럼 살지는 않겠어”
수많은 우리 사내 아들들이 철들고 나서 꾸었던 오달진 꿈의 내용이었다. 그러나 외양뿐 아니라 뼈 속까지 아버지였던 우리들이 살아낸 삶은 아버지의 삶에서 한 치가 빠지질 않았다. 오히려 아버지보다 더 아버지 같은 삶들이었다. 한참 후에야 알았다. 우리들이 아무리 씨도둑질을 하려 해도 그것은 영원히 미수에 그치고 말 일이라는 것을.
이 땅의 사내 아들들은 역설만 넘쳐나는 이 이상한 꿈을 불경스러운 오이디푸스 콤플렉스와 짝하여 꾸고 또 꾸어왔다.
씨도적은 할 수 없어 사내아들의 아들들이 그 이상한 꿈을 대물림하여 아버지처럼 살지 않으려는 꿈을 지금 꾸고 있는지도 모른다.
교실 창문 너머 솔가지 사이로, 청설모가 유영하던 올 봄 초입부터 준비했던 작품이다.
데거친 비바람을 온 몸으로 막아 내며 우리를 키워낸 아버지를, 몸과 마음속에서 박리하려 했던 우리의 모습에 대해 글의 꼴을 갖추어 형상화하고 싶었다. 하여 조금은 식상한 듯 보이는 부자간의 진정한 의미에 대하여 함께 고민하고 싶었다.
시골의 고등학교에서 매일 매일, 언어의 밥상을 준비하는 주방장으로서의 소임은 즐거운 일이었다. 하지만 출구가 마련되어 있지 않은 표현의 욕구 때문에 몸에서는 자주 신열이 올랐다. 어느 때는 대숲을 향해 지르던 신라적 두건장이가 되고 싶기도 했다. 세상으로의 표현 통로를 마련해주신 심사위원님께 감사드린다. 초심의 자세로 쉬지 않고 쓰려 한다.
‘선생님 소설이 당선되면 네 반 전체에 자장면을 쏘겠다‘는 약속을 했다. 자장면을 살 수 있게 되어 기쁘다. 아이들도 기뻐해줄 것 같다.

  윤혁로
●1961년 충남 예산 출생
●경희대학교대학원 국어교육학과 졸업
●1983년 비사문학상 소설부문 당선
●현 충남 예산고등학교 교사


     소설 부문 심사평
당선작, 상식적인 소재를 거침없는 입담으로 극복
최종심에 오른 4편 모두가 일정수준에 올라 작가로서의 성장가능성이 충분하지만, 앞날을 기대하기로 하고, 규정상 당선작 1편만을 선정했다.  
다섯 봉지의 미소(허효남: 대구)는 출생과정부터 비정상적인 여주인공이 불우한 환경과 자의식을 극복하고 올곧게 성장해가는 과정을 그렸다.
흔한 소재임에도 탄탄한 구성과 정교한 직물처럼 치밀한 문장이 돋보이는 작품이다. 굳이 흠을 잡자면, 중반까지 잘 견지해 온 삶의 긴장이 결말부분에 가서 너무 쉽게 풀리고 선택과 믿음, 용서와 화해의 과정이 성급하고 안이하게 처리된 느낌이다.     
천국의 밤(김유현: 파주)은 가정파탄으로 외롭게 남은 자매, 플루트 연주자의 꿈이 좌절 된 언니가, 고도의 뇌성마비를 가진 동생의 성매매를 주선하며 살아가는 충격적인 이야기다.
언니가 주선한 남성들을 상대로, 몸을 파는 동생의 1인칭화법으로 전개되는 상황이, 참담한 현실과 자매의 심리갈등까지 잘 전달 될 만큼 구성이나 문장도 원만한 편이다. 그러나 소재자체가 갖는 도덕적 부담을, 이색적이라거나 문학이라는 명분으로 극복할 수 있을까하는 의문을 갖게 한다. 문학의 순수성과 책임성, 그리고 대중성에 대해 숙고할 필요가 있다.
두 개의 칼(류희병: 서울)은 적서(嫡庶)와 반상(班常)의 차별이 없는 이상향을 꿈꾸며 신분사회의 모순에 저항, 도술을 부리는 초인적인 홍길동의 인간상에 재해석을 시도한 작품이 아닌가 한다.
맹춘, 장기영 등과의 관계설정도 홍길동을 보는 다른 시각에 조명효과를 높여주는 구실을 한다. 상황을 압축하는 솜씨나 문장에도 별로 빈틈이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일종의 고정관념을 깨는 새로운 발상임에도, 단편이라는 작은 그릇에 담기에는 벅찬 소재다. 두 개의 칼을 의미하는 홍길동과 맹춘의 역할 비중이 맹춘 쪽으로 치우치고, 오히려 장영기가 홍길동 보다 돌출돼 보이는 것도 분량조절의 어려움 때문이 아닌가 한다. 필자의 역량을 충분히 발휘할 수 있는 장편으로 시도해 봄직한, 아까운 작품이다.
이상한 꿈(윤혁로:예산)은 궁핍한 과거를 되밟지 않으려는 아버지의 집념과 허황된 미래를 좇는 아들의 꿈 사이, 즉 세대 간 갈등이 소재다.
가족사의 단면을 통해, 자기중심적인 자식들의 항변, 그러나 어쩔 수없이 부모의 전철을 밟다가 뒤늦은 각성과 회한(悔恨)에 이르는 과정을 거침없이 쏟아 냈다.
상식적이고 흔한 소재임에도 독자의 시선을 당길 만큼, 이 작자의 입담은 세다. 인물의 개성이 묻어나는 대화, 고단한 세월의 흔적이 배어있는 아버지의 유서 같은 임종 전 일기도 작자의 입담, 상황에 맞는 어휘를 선택하고 구성하는 능력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당선작으로 밀며 축하와 함께, 참신한 소재 발굴에 관심을 가지고 더욱 정진할 것을 기대한다.                                

●심사위원  안수길 (소설가) 



소설 당선작

이상한 꿈

역설의 집주인이 이승을 하직했다.
살아 생이별은 희나리조차 불이 붙을 만큼 애간장이 녹는다는데 아버지 가시는 날 삼형제의 목에서는 생목(生木)은커녕 바싹 거리는 가랑잎 하나 태울 만한 뜨거움도 느껴지지 않았다. 그나마 당신 막내딸의 깊고 기름진 곡소리마저 없었다면 가시는 날까지 아버지는 인간적 서운함마저 느끼실 일이었다.
하지만 큰 형이 지어 준 역설의 집에서 한평생 자식들에 서운한 마음으로 사셨을 아버지에게, 이승에서 느끼는 사흘 동안의 서운함은 당신이 느끼는 마지막 감정이기에 삭이고 가실만한 크기가 아니었을까?
역설의 집 - 아버지처럼 살지 않아야만 잘 살 수 있는, 아버지의 가치가 부정되어야만 진정한 가치가 정립되는 그곳은 반면교사(反面敎師)형 모델 하우스였다.
그리고 그 모델하우스 자체가 아버지였다. 반면교사가 됐든 어찌됐든 간에 아버지는 천 갈래 만 갈래 인생길에서, 큰형 자신이 좌표를 잡는데 아버지로서의 역할을 톡톡히 해주신 셈이었다.
모델처럼 되지 않도록 항상 자신을 잡죄고, 끊임없이 모델을 부정하며 큰형만의 새로운 모델을 추구하는 그곳은 역설의 공간이었다.
큰형은 역설의 집이 완공되자마자 아버지를 일방적으로 그 곳에 모셨고, 아버지는 평생 동안 역설의 집에서 지내셔야 했다. 그런데 오늘 그 모델하우스가 철거되었다.
모델하우스 철거는 이미 오래전부터 예정된 것이었다. 이태 전부터 아버지는 하루 밤 사이 당신의 의지와 관계없이 몸에서 흘러내린 오줌 똥 한 가득한 기저귀를 갈고 있는 큰 자식을, 고개 돌린 얼굴로 염치없이 지켜보고 있어야 했다.
아버지의 혈관에도 정말 따뜻한 피가 흐를까 의심이 갈 정도로 차가웠던 아버지. 거기에 산을 허물고 바다를 메울 것같이 위세 찼던 아버지였다. 그런 아버지가 다리힘살에 근력을 잃고 왼쪽 어깨에는 풍을 걸쳤다. 그제야 아버지는 침대 맡에 백기를 꽂고 큰 자식에게 온 몸을 맡겼다.
매일 아침 기저귀를 갈고 있는 큰형의 손에서 국립 요양원 남자 간호부의 기계적 손놀림 이상의 느낌은 찾을 수 없었다. 기저귀를 갈고 이제는 흔적만 남아 있는 아버지의 남근과 항문 주변을 물휴지로 닦을 때에는, 솟는 건구역질을 아버지가 볼까봐 큰형은 몇 번이고 입을 가리며 어깨를 들썩였다. 매일 아침 큰 형은 고통스러워했다.
“와! 예쁘게도 싸 놓았네. 여보 우리 애기 똥 색깔 좀 봐. “
어릴적 큰 조카 성혁이가 싸놓은 똥을 보고, 다용도실에서 빨래하고 있는 바쁜 아내를 일부러 불러, 내외가 아들 똥을 흐믓하게 바라보던 때가 있었다.
자식이 싸놓은 똥은 냄새도 없고 그 양이 많을수록 좋아 하면서, 비록 화학적 성분 차이는 있겠지만 자기를 낳아준 아버지의 것에서는 건구역질이 올라오는 이 모순. 동일한 현상을 두고도 자식이냐 부모이냐에 따라 판단과 느낌이 달라 지는 이 모순은 어쩌면 이 땅의 사내 자식놈들이 불경스러운 오이디프스 콤플렉스와 짝하여 생래적으로 지녀 왔던 것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큰형의 아버지에 대한 거부감은 생래적인 것보다 훨씬 깊고 깊었다.
큰형이 설계부터 공사까지 도맡았던 역설의 집은 형이 철들고 생애 처음으로 가졌던 꿈인 만큼 꽤 오래 전에 완공되었다.
평소 큰형이 지니고 다니던 대학 노트 곳곳에는 역설의 집 설계도와 그 집을 어려운 여건 속에서도 꼭 완공하고 싶은 갈망들이 촘촘히 자리하고 있었다.
삼나무가 되고 싶다. 한 나무이면서도 밑동의 열성 DNA와 완전히 결별하고 나무 꼭대기에서 전혀 다른 우성의 DNA를 생성하여 위대한 돌연변이를 실현한, 그 나무가 되고 싶다. 돌연변이, 돌연변이, 돌연변이, 돌연변이…
노트에는 큰형의 의지와 선택을 통해 해로운 변이를 걸러내고 큰형 당대에 유리한 돌연변이를 일으키고 싶은 형의 갈망이 동일어의 반복을 통해 명징하게 성문화되어 있었다. 
큰형이 특히 걸러내고 싶은 해로운 변이는 돈에 관한 것이었다. 형은 아버지의 돈에 대한 집착에 진저리를 쳤다.
쥐고 펼 줄 모르는 아버지는 평생 함부로 돈을 쓰지 않았다. 정확히는 꼭 필요한 곳에도 돈을 쓰지 않았기 때문에 딱히 절약이란 말로도 아버지의 경제관념을 설명해 낼 수가 없는 게 사실이었다.
“이제까지 단 한 번이라도 아버지가 선선한 눈빛으로 나에게 주신 돈을 받아본 적이 없어.”
아버지로부터 선선한 눈빛의 돈을 받아보지 못한 것으로 치자면 우리 육남매가 다 매한가지였다.
“아버지 호주머니에서 눈먼 돈이 나오길 바라느니 차라리 소금에서 곰팡이가 피기를 기대하는 게 낫다.”며 큰형은 아버지의 돈 씀씀이에 대해 자주 비아냥거렸다. 
심지어 ‘아버지는 구렁이알 같은 당신의 소중한 돈을 아끼려 하다가 여동생을 잃었을지도 모른다’며 법에서 금지되어 있는 소급 적용까지 하며 아버지를 욕했다. 큰형의 유추는 해마다 이어지는 엄마의 위연탄식에서 퍼 올린 것인 만큼 전혀 사실무근은 아니었다.
엄마는 해마다 죽은 딸의 생일날이 오면 아직도 당신의 젖꽃판 아래 깊은 곳에 묻어 놓은 딸 이야기를 했다.
“그래, 맹장이 병이더냐? 요즈음 같으면 어물 배 가르고 옷 바느질 코 잡듯이 하면 너끈히 끝날 그 짓거리를 못해서 생때같은 내 새끼를 이 가슴속에다 묻었단 말이다. 세상에 이렇게 용한 여편네가 어디 있것냐? 느 아버지도 그렇다. 새끼가 배 움켜쥐고 눈자위를 흰 사발처럼 뒤집고 있으면 앞 뒤 볼 것 없이 택시 대절해서 대전으로 빼야 하는게 경우 아니냐? 체해서 그럴 수 있다며 느루 재더니 애를 자기하고 내 가슴에 나눠 묻고 나서, 피오줌을 누어 봐야 뭐하냐 말이다. 죽은 아들 부랄만지는 격이지만, 얘는 만질 부랄이나 있기나 허구. 그게 다 네 아버지의 끔직한 돈 사랑 때문이다. 원수같은 돈. 느 아버지는 돈이면 지옥문이라도 열 수 있다고 믿는 양반이니까.”
엄마는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것 같았던 솜병아리를 잃은 것도 아끼다가 똥이 되어 버린 돈 때문이었다고 단정지어버리곤 했다. 
무성격한 엄마에 대한 연민의 정도 아버지처럼 살지 않겠다는 큰형의 각오를 다지게 하는 요인이었다. 아버지는 수시로 가난도 암가난과 수가난이 있다 하여, 여자가 살림을 잘 못하는 탓으로 오는 가난을 경계했다.
때문에 변변찮은 입성 한 가지를 장만할 때에도 엄마는 아버지의 불호령이 무서워 장에서 곽씨에게 외상으로 사온 옷을 장롱 속 은밀한 곳에 찔러 놓고 번번이 해를 넘겼다. 아버지의 부재를 틈타 좀약 기운 가득한 새 옷을 살얼음 밟듯이 펼쳐 보고 있는 엄마를 보고 있노라면, 쌀뒤주가 차고 쌀독이 넘어 나던 면장집 큰딸로 있이 살아 왔던 엄마에 대한 연민으로, 큰 형은 먹기만 하고 배설하지 않는 전설 속 동물을 떠올리며 아버지를 경멸했다.
그때마다 아버지처럼 살지 않겠다는 결의를 다지는 형의 눈매는 차갑고도 매서웠다.
아버지를 선산에 묻고 온 다음날인 초우제와 사흘 날인 삼우제가 끝나자마자, 딸들이 큰 오빠에게 날이 퍼렇게 선 말들을 쏟아 냈다. 마치 이 날을 기다리며 손을 꼽고 있었던 사람들 같았다.
“오빠! 다 지난 일이긴 하지만 우리 어릴적, 먹고 싶은 쌀밥도 못 먹고 딸들은 고등학교 문턱도 못 넘게 하면서 대학까지 가르친 오빤데, 오빤 뭐가 그렇게 돌아가신 아버지가 못마땅했던 거유? “
“오죽했으면 아버지가 반밖에 눈을 감지 못하셨을까.”
평소 올톡볼톡한 성격의 막내딸이 잘 모셨든 못 모셨든 3년 동안 아버지를 모시고 살아온 맏이의 위세에 눌려 못했던 말을 작심한 듯 뱉어 냈다.
면 통털어 다섯 밖에 되지 않는 대학생 속에 큰형이 있었고, 좀 여유 있게 목에 풀칠할 정도였던 국민학교 교장 월급으론 큰형의 대학 등록금과 하숙비 조달은 달팽이가 바다를 건너는 만큼이나 버거운 일이었다.
큰형의 대학 등록금이 나오는 8월과 2월은 福자가 선명하게 새겨진 사기 밥그릇에 그나마 보이지 않던 쌀의 개수가 눈에 띄게 줄어 갔다. 엄마는 보리밥을 안칠 때 밥 한 켠에 정확히 한 사발 분량의 쌀밥을 따로 준비하셨다. 아버지를 위해 엄마가 준비한 특식이었던 셈이다. 간혹 엄마가 장님 막대질하듯 해서 쌀밥이 한 사발을 넘겼으면 하는 간간한 바램을 수도 없이 가졌지만 엄마의 눈대중은 남달랐다. 정확히 쌀밥 한 사발이었다.
솥 한가득 깡보리 천지에서 누나들의 젓가슴처럼 봉긋하게 솟아 있는 아버지의 쌀밥에는 범접할 수 없이 서슬 퍼런 가장의 권위가 빛났다. 하지만 당신 쌀밥 그릇에 어른거리는 막내아들의 시선을 끝내 물리칠 수 없었던 아버지는 쌀밥 그릇에 바닥이 희끗희끗 들어날 때쯤이면 몇 숟가락의 쌀밥을 막둥이의 밥사발에 옮겨 놓으시곤 하였다.
진갈색 보리밥 위로 자리를 옮긴 쌀밥이 희고 기름질수록 두 살 터울 막내 누이의 눈자위는 더욱 희번득거렸고 나머지 3남매의 눈동자에도 쌀밥알들이 춤을 추었다.
딱 1년만 먼저 피임약이 나왔다면 이 세상 구경을 하지 못했을 막둥이가 누릴 수 있는 특권이자 59년에 최초로, 한 입이라도 줄여보기 위해 이 사회 구석구석에 쳐진 피임의 사선을 용케도 피한, 막둥이를 위한 위로의 쌀밥이었다. 비록 몇 숟가락이었지만-
별식으로 보리밥 먹으로 가자는 아내의 말에 손사래를 크게 치는 것은 아직도 보리밥에 대한 뒤끝이 성성하게 남아 있기 때문이다.
“바늘로 찔러도 피 한 방울 비치지 않을 아버지가 국보급 자존심을 꺾고 학교 소사에게 까지 돈을 융통해서 오빠를 가르치지 않았수? 이제라도 돌아가신 아버지와 제발 좀 친하게 지내슈. 우리 딸들의 소원이우.”
“사실 아버지에 대한 서운함으로 치자면 지독한 성차별까지 겪은 우리 딸들이 오빠보다 컸으면 컸지 못하지는 않을 거유.”
불만이 많은 큰오빠에게 건네는 말이지만 큰 누나의 말에는 맏딸답게 독기가 많이 빠져 있었다.
이 땅에 대학생 아들을 둔 부모들이 대학 등록금을 대기 위해 소를 팔아 대학에 우골탑을 쌓아 갈 때, 팔아넘길 소가 없던 아버지는 엄마가 건네는 베갯밑 송사를 좇아 학교 소사 조 씨에게 어려운 말을 해야만 했다. 학교 소사 조 씨는 학교 일 외에, 야무진 손끝으로 다듬어 놓은 농사철의 소출이 오달졌다.
교장보다 살림살이가 훨씬 기름졌던 조 씨에게 번번이 돈을 빌려 아버지는 큰형의 등록금을 막았다. 이런 아버지처럼 살지 않는 것이 큰형의 옹골진 꿈이었다. 
“큰오빠 말야. 생전의 아버지가 제 털 뽑아 제 구멍외에는 심을 줄 모르는 분이었고, 거기에다 땅고집에, 꼿꼿하기가 서서 똥을 눌 정도의 대단한 분이셨다는 것을 우리 딸들도 잘 알지. 먹고 있는 자식새끼 숟가락을 빼앗았던 아버지셨으니까.”
“대단한 분”
예쁜 도둑인 딸에게도 아버지는 대단한 분이셨다.
아버지는 당신이 한 번 그어 놓은 직선을 절대로 지우거나 곡선으로 바꾸지 않으셨다.
매양 도그마의 양 축을 잇는 직선을 그으면서 당신의 결정과 판단을 윷짝 가르듯이 하였고 한 번 내린 결정을 거두는 적이 없었다.
아버지가 세워 놓은 원칙은 쥐코밥상 앞에서도 예외가 아니었다.
우리 여덟 식구는 항상 어두운 방에서 쥐죽은 듯 조용히 식사를 했다. 밥상머리에서 잔소리를 하면 복이 달아난다는 아버지의 믿음은 그대로 묵언식사 규칙으로 자리 잡았다.
그런데 번번이 막둥이가 그 규칙을 어겼다. 밥상머리에서 쪼잘거리기 일쑤였다. 흉 각각 정 각각이었던 아버지는 그때마다 막내의 숟가락과 젓가락을 상 밑으로 내려놓았고 밥상 주변에는 찬바람이 일었다. 복 달아나는 짓 하는 녀석은 밥 먹을 자격이 없기 때문에 녀석의 숟가락질을 거두었던 것이다.
밥상머리에서 형, 누나의 미주알과 고주알을 캐고 파다, 허전하다 싶어 앞을 보면 숟가락과 젓가락이 놓였던 자리가 휑뎅그렁하여 졌음을 알고 울상을 짓다, 급기야 울음을 터뜨렸지만 아버지의 헛기침 소리 두어 번이면 막둥이의 울음은 끝이 났다. 그렇게 막내는 밥상머리에서 수다를 떨다 알량한 보리밥 식사 마저 걸러야 했던 적이 여러 번이었다.
한 번은 물을 말아 먹기 위해 밥그릇에서 숟가락을 내려놓았던 적이 있었다. 요즈음은 보통 젓가락으로 밥을 먹지만 우리 집은 오랫동안 숟가락으로 밥을 떠서 먹었고 식사 중에 숟가락은 밥그릇 위에 올려놓았다.
그런데 숟가락을 상위에 내려놓자 아버지는 “왜 그만 먹냐”고 물었다. 당연히 물을 말기 위해서 숟가락을 내려놓았다고 말을 하면 될 일을, 아버지가 어려워서 “그만 먹을려고요”라고 말하고 식사를 그만 둔적도 있었다. 아버지는 무서운 존재였다. 
“하지만 오빠. 가죽 없이 난 털 본 적 있어?”
큰형과 네 살 터울이 지지만 어느새 세상살이 미립이 트여, 중학교 문턱만 넘은 둘째 누나가 사람살이 인간학을 전공한 박사 수준의 물음을 큰 형에게 건넸다. 큰형은 부정도 긍정도 하지 않았다. 사람 사는 이치로 따지자면 여동생의 말이 백 번 천 번 맞지만 지금까지 가죽 없이 자신의 털을 키워 낼 심사였던 큰형으로서는 유구무언일 수밖에 없었다.
옷에 붙은 장례식장의 향내가 채 가시지도 않은 상태에서, 세 딸들은 그렇게 지금까지 아버지에 대한 서운함으로 살아왔던 큰오빠에 대한 서운함을 줄줄이 풀어 놓았다.
“큰오빠!진짜 나 돌아가신 아버지가 고등학교 문턱만 넘게 해주셨어도 교원양성소 과정을 거쳐서 충분히 국민학교 선생이라도 했었을 거야. 그때 고등학교 졸업한 내 친구들 중에서, 나보다 못했던 애들이 양성소 나와서 지금 교편 버젓이 들고 선생질 하고 있잖아.”
“근데 우리 아버지 큰오빠 빼고 지차와 딸은 자식이 아니었잖아. 고등학교 보내달라고 사흘 밤낮 울고불고 했어도 우리 아버지 헛기침 두어 번에 딸들의 가방끈 길이가 정해졌어. 그런데 정작 우리 큰오빠는 그 어렵게 가르친 대학 나와서 좋은 직장 마다하고 생일꾼하며 부모들 경원시한 것 밖에는 우리 기억에 없어.”
큰형은 대학을 졸업하자마자 기다렸다는 듯이 ‘아버지처럼 살지 않겠다’는 자신의 꿈을 노골적으로 실현해 갔다. 큰형은 동생들이 먹고 싶은 쌀밥도 못 먹고, 가고 싶은 고등학교 문턱도 못 넘게 하고 어렵게 가르친 대학을 졸업하고, 힘겹게 잡은 4급 공무원직을 이태만에 그만 두었다. 아름다움을 생업으로, 자신의 꿈을 꽃으로 피워내 보고 싶다는 것이 큰형이 내린 용단의 근거였다. 평소 안개낀 파리의 하늘 밑이나 튜울립 흐드러진 암스텔담을 동경하던 낭만적 센티멘털리스트다운 결정이었다. 
“생일 할려면 용천지랄한다고 대학을 다녔느냐, 그 잘난 농투산이 하기 위해 동생들 중학교밖에 못 가르치게 했느냐”는 엄마의 눈물바람에도 큰 형의 꿈은 조금도 굽이 잘리지 않았다.
“저 대학 졸업하면 내 손에 물 묻히지 않게 하겠다고 까치 뱃가죽 같은 흰 소리를 할 때 알아봤어야 했어”
엄마는 장탄식을 쏟아 내었다.
엄마의 한숨이 채 꺼지기도 전에 큰형은 납덩이를 주렁주렁 늘어뜨린 편지를 보내왔다. 꽃을 통해 당신의 꿈을 피워내겠다고 한지 반 년 만에.
편지 안에는 당신이 짓고 있는 꽃 소식은 커녕, 금방이라도 주저앉을 것 같은 낡디 낡은 진회색 빛 하우스 동이 철근 조각을 나부끼며 흉한 아가리를 벌리고 있었다. 반면교사의 모델인 아버지에게 집문서를 저당 잡혀 농사자금을 마련해 달라는 내용이었다. 이제까지 아버지는 큰형이 일방적으로 모셨던 역설의 집에 머무셨는데 아버지가 계신 역설의 집도 은행에서 저당을 잡아 줄 것이며, 역설의 집은 공시지가가 얼마일까 궁금했다.
“용한 놈. 개똥참외도 가꿀 탓인데, 영민한 지 동생들 저 땜에 고등학교 문턱도 못 넘어, 제대로 된 밥술도 못 뜨게 해 놓구선… “
“자고로 아이 못 낳는 년이 용꿈만 꾼다더니…”
편지 끝물에 가서 아버지는 맏이 가르치려 중학교 먹물 밖에 적시지 못했던 5남매에 대한 연민을 큰 자식에 대한 미움으로 치환시켜 놓고 있었다.
아버지는 큰형의 부탁을 거절했다. 접장질 삼십년에 가진 거라곤 달랑 달팽이집 한 채인데, 도깨비 살림꾼한테 맡겨 잘못 되면 두 늙은 삭신 맘 편히 누일 자리조차 없어 질 수 있다는 것이 거절의 이유였다.
이 달팽이 집은 당신들이 이 세상을 하직했을 때, 제사 모시는 대신으로 그 때 떠가든지 말든지 큰형 의향대로 하라는 것이 아버지의 생각이었다.
하느님과 동업하지 않으면 지을 수 없는 것이 농사인데 큰형은 여러 해 동안 하느님과 동업하지 못했다. 진짜 농사꾼을 이 땅에 세우기 위해 몇 해 동안 하늘이 형에게 부과한 통과의례는 혹독했다.
붉은 대추 한 알이 여무는데도 몇 십 개의 벼락과 천둥, 거친 비바람을 받아내야 된다는데 선농사꾼인 큰형의 힘으로 받아내기에는 턱없었다.
장미와 카네이션 묘목을 꽂던 자리는 연꽃을 피워 올리면 꼭 맞을 곤죽으로 변했다. 큰형은 진창 바닥에 철푸덕 앉아, 퍼올린 진흙으로 세수를 할 것처럼 얼굴을 감싸 안았다. 형은 오열했다. 이따금 큰형 스스로 진짜 농사꾼은 어느 경우에도 하늘을 원망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그러나 큰형은 하늘을 원망했다. 그리고 아버지도 원망했다.
선농사꾼의 두 번째 편지는 태풍에 주저앉은 큰아들을 나몰라라 하는 아버지에 대한 원망으로 벌겋게 불이 붙어 있었다.
부자(父子)의 의미에 대한 원초적 질문으로 시작된 큰형의 편지는 금방이라도 父子의 끈이 끊어질 지도 모를 아슬아슬함마저 느껴졌다. 따뜻한 피가 흐르는 아버지라면 제상 올릴 큰 자식에게 이럴 수는 없다는 것이 큰형이 하고 싶은 말이었다.
“삶은 호박에 이빨도 안 들어갈 소리 하지도 말어. 지 애비처럼 안 산다고 큰소리쳤으면 그 말에 대한 책임을 어깨에 지든 머리에 이든 할 일이지, 지 밑으로 줄줄이 사탕인 악마구리지 동생들은 어떡하란 심사야?”
“용한 놈, 지가 말아 놓은 진흙창만 보이지.”
“애비가 달아준 눈구녕은 어디다 팔아먹은 거야 “
한데에 나 앉더라도 코가 쉰 댓자나 빠진 눈앞의 큰 자식부터 어떻게 해보자는 엄마의 애원에 아버지는 미동도 없었다. 아버지다웠다.
“이번 승진에서도 미역국 제대로 먹었습니다. 인사팀에서는 제가 대졸 경력만 갖추었어도 차장자리는 떼어 놓은 당상이라고 합디다. 송 과장처럼 유능한 사람이 무엇하느라 대학을 나오지 않았나 이해할 수가 없답니다. 제가 그래서 전에 아버지한테 통사정했잖아요. 대학 입학은 물 건너 간거니까, 돈 삼백만 해 주시면 청강생 자리를 사서 대학 졸업장을 만들 수 있다구요. 그런데 아버지는 그 잘난 돈 삼백이 아까워 끝까지 나몰라라 하셨죠. 흙 파먹고 살겠다는 큰 형은 말 약먹이듯이 억지로 대학물을 먹이드만, 대학입학만이라도 시켜달라는 지차의 말은 귓등으로도 듣지 않으셨죠? 큰 아들만 자식이고 지차는 자식 축에도 들지 않나요? 축에도 들지 않는 자식을 무엇에 쓸려고 나셨어요? “
꼭 일주일 전, 둘째 형이 아버지 어머니와 내가 한 귀퉁이씩 쓰고 있는 달팽이집을 큰형만큼 들었다 놓고 갔을 때에도 아버지는 조그만 흔들림도 없었다.
우꾼우꾼 두 아들이 뱉어낸 악다구니에도 흔들림이 없는 아버지는 전투사단의 대대장을 닮아 있었다. 그러나 중대장들의 신뢰를 받지 못하고 있는 대대장의 얼굴에는 큰 비를 한 가득 품은 먹장 름으로 뒤덮여 있었다.
“근데 큰 오빠! 오빠가 그토록 오매불망하던 그 꿈은 이루어지긴 했수? “
그렇잖아도 경황없는 상황에 뜬금없는 둘째 누이의 물음이었다.
누이들은 마치 아버지를 큰 형이 도맡아서 돌아가게 하신 죄를 묻는, 청문회의 패널로 변해 있었다. 큰형의 꿈은 아버지도 직감으로 익히 알고 있었고, 나머지 오남매도 소상히 알고 있었던 바였다.
어린 여동생들을 상대로 대거리를 한다는 것이 우세스럽다고 느꼈는지 큰 형은 일절 말이 없었지만 얼굴에서는 연신 팥죽땀이 흘렀다.
그런데 아버지처럼 살지 않겠다던 큰형의 꿈은 이미 자신의 외양에서부터 어긋나 있었다. 둥글바위 같이 큰 두상에 넓고 훤한 이마, 선선하지 못한 눈매에 죽어 있는 콧마루, 짧은 인중에 윗입술이 짧고 활처럼 휘어진 고양이 입술은 영락없이 아버지를 빼어 닮았다.
 아버지에서 한 치가 빠지질 않았다. 생각이나 마음 씀씀이에 있어 큰형은 어쩌면 아버지보다도 더 아버지같은 사람이었다. 쥐고 펼 줄 모르며 도무지 곡선을 모르는 무양무양한 아버지의 성격을 큰형은 마음속으로부터 싫어 했지만, 뼛 속까지 아버지인 큰형이 아무리 씨도둑질을 하려고 해도 형은 영원히 미수에 그치고 말 일이었다.
선산의 아버지 무덤에 입힌 뗏장이 보기 좋게 자리를 잡아갈 무렵, 큰 형수에게서 전화 한 통을 받았다.
큰 조카 성혁이가 아버지와는 한 지붕을 이고 살 수 없다며 집을 나간지가 한 달이 넘었고, 아들 새끼로부터 헌신짝이 되어 버린 남편이 꽃쟁이들 사이에서 망신살이 무지갯살처럼 뻗쳤다며 온종일 술에 먹혀 살고 있노라고, 큰 형수는 수화기 속에서 울먹였다.
“작은 서방님 우리 어떡해요? 성혁이 아빠 요새 폐인이 따로 없어요. 세상 폐인이 어떻게 생겼나 궁금하면 우리 성혁 아빠 몰골하고 하는 짓 보면 금방 알 수 있을 거예요. 그런 씨없는 자식이 어디서 솟았느냐며 농장에는 아예 발걸음도 안해요. 그리고 달포째 집지키는 성주 귀신이 되어서 쳐야 할 농약은 안치고 하루 종일 술잔에 술을 치고 있어요. 이틀만 발걸음을 끊어도 묵정밭이 되어 버리는 것이 꽃농산데 도대체 어쪄려구 그러는지 모르겠어요.??
씨없는 자식의 원조가 당신인데 원조의 아류가 등장했다. 꼭 성혁이 나이 또래였을 때, 큰형 당신이 역설의 집을 지어서 아버지를 모셨는데 이제는 성혁이가 지어준 역설의 집 문턱을 넘어 큰형이 그 집으로 들어가야만 한다. 큰형이 아버지를 일방적으로 역설의 집에 모셨을 때, 아버지가 그랬던 것처럼.
그토록 아버지처럼 살고 싶어 하지 않았던 큰형의 꿈이 큰 조카에게 대물림된 것이다. 큰형처럼 절대 살고 싶지 않은 조카의 꿈은 형의 것보다 조금도 무르지 않았다.
이미 조카들은 오래 전부터 음험한 자신들의 속내 한 자락을 버젓이 들어 내놓고 있었다.
“난 아빠 같이는 절대 살지 않을 거야. 아빠처럼 평생 지지리 궁상떨 바엔 차라리 내 삶을 반납하고 말지.”
“나도 아빠처럼 살 수 밖에 없다면, 오빠 반납할 때 나도 럭셔리하게 반납할거야.”   
남매간에 죽과 장이 척척이었다. 천하에 못된 것들. 지난 봄 큰형 집을 찾았을 때, 작은아빠 들어 보라는 듯이 남매가 거실 소파에 앉아 횡담하던 기억이 선연하다.
“작은 아빠!민주군대에서 고참한테도 안 맞아 봤는데 성격이 불인 아버지하고 같이 농사일 하다가 숱하게 맞았습니다. 융통성이라고는 담배씨만큼도 없는 외골수에 황소고집, 거기에다 짠돌이, 아버지는 생긴 거나 하는 게 할아버지 판밖이 같습니다. 아니. 할아버지보다 더 한 사람이에요.”
“세상에. 침대 위에 할아버지한테는 연금이 명줄이고 믿는 하늘인데, 아빠는 할아버지 명줄마저 거두실 요량인가봐요.”
그동안 아버지 연금의 용처를 두고 부자간의 생각이 달랐다. 왼쪽 어깨에 풍을 걸치고 오른쪽 입술은 아래로 흘러 내려 반넘어 말이 새고 있는 아버지의 말은 유추의 의해서만 그 해독이 가능했다.
말씀인 즉슨 당신의 병수발 비용과 생활비를 실비로 계산하여 형에게 지급하고 나머지 돈은 당신의 통장에 알뜰히 모으고 싶다는 것이었다. 당신이 침대에서 일어나 두 발 걸음을 하게 될 때, 원하는 용처에 사용하기 위함이라는 것이었다.
큰형은 펄쩍 뛰었다. 한 마디로 남는게 없다는 것이었다.
“내가 가진 연금이 없었다면 니네들은 그럼 어떡할 뻔 했냐”며 아버지는 입술을 크게 실룩 거렸다.
하지만 그 옛날 산을 무너뜨리고 바다를 메울 기세였던 아버지 때와는 상황이 판이했다. 옥신각신이랄 것도 없이 아버지는 또 하나의 백기를 침대 맡에 꽂았고 아직도 목구멍이 큰, 아버지를 탓하며 형은 조용하면서도 야무지게 아버지의 전대를 거두었다. 그렇게 아버지의 생각은 재가 되었다.
“겨 뭍은 개가 뭐 뭍은 개 나무란다고 하데요.”
과일을 쟁반에 받쳐 오면서 ‘어머 얘들 버릇없는 소리하는 거 봐’라고 말하는 큰 형수는 말 그대로 보기만 하지, 아이들을 크게 나무랄 생각이 없는 듯 보였다. 남편이 오죽하면 애들이 이러겠느냐는 표정으로 아이들 역성을 들고 있었다.
집안 대소사에서 만난 동서들을 붙잡고, 같이 꽃농사를 지어 오면서 겪었던 그간의 벙어리 냉가슴을 쏟아 내다, 맵고 차고 쓴 남편이 너무 힘들다며 눈물바람을 하던 형수였다.
동생 입장에서든 시동생의 입장에서든 어떻게 해야 할지 궁리가 서질 않아 너무 상심하지 말라는, 잘 될거라는 등속의 지극히 문 밖에서 돌고 있는 형식적인 인사만 큰 형수에게 건넸다.
부자간에 누가 더 씨 없는 짓을 잘하는가를 놓고 벌이는 기싸움에 아내와 엄마인 큰 형수의 입장에서나 동생과 작은 아빠인 나의 입장에서나 어떤 역할도 할 수 없다는 것에서는 똑 같았다. 
큰형이 부잣집 가운데 자식처럼 무위도식을 밥먹듯이 하며 어디서 솟은 지 모를 당신의 씨없는 자식에 대한 장태탄식으로 방구들을 꺼지게 한지도 일 년을 넘기고 있었다. 큰형의 눈확도 방구들 만큼이나 꺼져 있어 깊고 짙은 그늘 속에서 눈동자만 희번덕대고 있었고, 큰 형수도 언제 걷힐지 모를 그 그늘 속에서 하염없이 지쳐 가고 있었다. 성혁이 놈은 그때까지 깡통 소식으로 자기 엄마의 꼽은 손을 무색하게 만들며 큰형 내외의 진을 빼고 있었고, 큰 오빠에 대한 서운함으로 날을 세웠던 딸들도 아들에게 버림받은 아버지를 위로하기에 바빴다.
두 번째 아버지 제사를 모시기 위해 형집에 갔을 때 형수는 뜻밖의 말을 전했다.
“허구헌날 언 수탉같이 쭈그리고 앉아 먼 산바라기를 하던 그이가 며칠 전부터 마음이 조금은 돌아선 것 같애요. 아버님이 누워 계셨던 돌침대에 누워 제사 때 쓰는 영정 사진을 자신의 소맷자락으로 닦으며, 아버님을 눈자리가 나도록 쳐다보곤 하는데 그 눈빛이 그윽하기까지 하다니까요. 그리고 요사이는 자주 아버님 누워 계신 산소를 찾아요. 지극 정성으로 잡풀을 일일이 뽑아내는데 모르는 사람의 눈에는 그런 효자가 없을 거예요. 불효 끝에 효자난다는 말을 들어 보긴 했어도 사람이 저렇게 회심할 수 있나 싶어요.”
역설의 집 주인을 잃고 난 큰형은 철나자 망령이라도 든 것일까? 죽은 사람에 대한 정은 하루에도 천리를 달아난다는데 어찌된 영문으로 큰형은 하루에 천리씩, 죽은 사람에 대한 정을 되가져오고 있는 것일까? 살아있는 아버지와는 화해할 수 없었던 큰형은 돌아가신 아버지와는 화동할 수 있었던 것일까? 씨없는 짓거리를 하는 아들 새끼한테서 똑같이 당해보고 나서야 살아생전 아버지의 마음에 한 자락이라도 닿을 수 있었던 것일까?
“한 이불을 덮고 잤어도 지금 눈앞에서 국이 끓고 있는 것인지, 장이 끓고 있는지 한동안은 몰랐어요. 그러다가 한참 뒤, 어느 날 성혁 아빠가 아버님이 쓰시던 돌침대 위에 누워서 보고 있던 어떤 종이쪽지를 보고나서야, 애 아빠가 조금이나마 회심한 이유를 알게 됐어요” 
아버지는 평생동안 일기를 쓰셨고, 왼쪽 어깨에 풍을 걸친 후에도 계속하여 쓰셨던 일기의 분량이 어림잡아도 오십권을 넘었다.
“그 종이 쪽지는 아버님의 일기장에서 애 아빠가 찢어낸 것이었어요.”
큰 형수가 건네준 두 장의 일기장 안에는 아버지가 사려 놓은 82년 분량의 고단한 삶이 있었다.
……
난 이렇게 생각한다. 지금까지 큰 애하고 나하고 편치 않게 살아온 것이나, 그것을 보고 있는 에미한테 시아버지 무릎에 앉아 있는 것처럼 늘 불편함을 느끼게 했던 것도 실은 어릴 적부터 북두끈으로 내 몸에 매어져 있는 가난이 우리 부자에게 붙인 싸움 때문이었노라고.
내 어릴적부터 우리 집에 파고 들어와 있던 궁핍은 한시도 집 밖을 나간 적이 없었다.
본시 가난은 소의 아들이라, 어릴적부터 호리를 다투며 손톱이 빠지도록 일을 해도 면궁(免窮)은 요원했다. 하고 많은 날들을 삼순구식하며 지냈다.
찢어지게 가난했던 우리 살림살이에서도 아버지께서 큰 아들인 나를 봄에 쓸 씨앗을 팔아 보통학교 먹물을 적셔 주었다. 까막눈만 면하게 해줄 요량으로 보냈던 보통학교인데 참새 그물에 기러기 걸리는 행운이 나에게 왔다.
보통학교 요시다 교장이 나를 미립이 트인 놈이라 생각했던지 자비를 들여 전주사범학교 심상과에 입학시켜 주고 당신이 본토로 돌아가는 날까지 거둬 주었다. 일본사람 덕에 나는 칼을 차고 고작 팔년간 배운 글을 밑천삼아 선생을 할 수가 있었다. 주위에서는 개똥밭에서 인물났다며 왜정시대 선생질을 부러워했다.
하지만 우리집 속내를 모르는 생각들이었다. 나를 보통학교에 보내기 위해 봄에 쓸 씨앗을 팔아야 했던 우리집 식구들은 죄다 나만 바라다보았다. 가난한 집에 입은 많아서 조부모, 부모, 여섯 동생들과 처자식 모두 열 세 개의 입들이 보리쌀 몇 말 사면 없어질 내 월급에 목을 뺐다.
스무 살 가장으로 살 구멍을 뚫어야 했던 나로서는 변소에 기와올리고 살아 보려 한 것도 아니었고, 열 손가락으로도 가리킬 수 없는 내 집 식구들이 밥술을 쥐고 사는 것이 삶의 목표였다. 그 외에 어떤 생각도 나에게는 사치였다. 어떤 일이 있더라도 열 세 개의 목구멍에 거미줄을 치게 하지 않으려고 골을 싸매고 노력했다.
명색이 좋아 선생이지, 아침 학교에 들어서기 전까지의 행색이나 하는 일은 선머슴이나 진배없었다. 학교에 출근하기 전, 새벽녁 똥지개에 얹은 두세 통을 밭에 내거나 집짐승 먹거리로 풀 두어짐 하고 나면 애들 가르치기도 전에 발이 후들거렸다.
면궁(免窮)을 화두로 살아온 내 삶에서 배고픈 설움은 어찌어찌 면했지만 지내고 보니 인생에서 정작 중요한 것은 잃고 말았다. 지네발 같이 많은 자식들의 신을 마련하는 일의 무게에 짓눌려 새끼들하고 마음과 피가 통하며 살지를 못했으니 말이다.
후회막급이지만, 풀끝에 앉아 있는 새몸과 같이 위태위태하였던 내 삶 속에서도 새끼들은 너럭바위에 앉아 있는 편안함을 주었어야 했다.
하지만 나는 평생 삶의 질곡을 핑계하여 가장의 위세를 더 톡톡히 부렸는지도 모른다. 차치고 포치듯이 하며 안식구와 아이들에게 멍에를 씌우고 죽지를 부러트린 내 잘못이 크다.
많은 애비들이 그런 식이었지만 나는 그러지 말았어야 했다. 자식키우려면 어사도 되야 하고 무당도 되어야 하거늘 나는 평생 자식들에게 어사 노릇만 하고 살아 왔다.
한 뼘도 안되는 좁디좁은 애비의 뜨락에 골을 치고 육남매를 머물게 했다. 귓문도 앞자락도 넓지 않은 내가 내 손으로 아이들 눈에 풀칠은 하지 말았어야 했다. 애비 때문에 평생 힘이 들었을 육남매, 특히 마음 고생이 심했던 큰 애야 미안하다. 
자식들 입장에서는 부모가 반 팔자라는데 허위허위 살아 놓고 보니 자식들의 눈에 차게 키우기에는 이 에비의 구석이 비는 데가 너무 많았다. 자식 살리는 게 부모 구실에서 제일 큰 구실일 터인데, 새끼들이 삶의 전환점에 서있을 때에도 선떡같은 도움밖에는 주지 못했다. 평생 땀 흘려 농사를 짓는다 했지만 내 깜냥으로는 풀농사만 진 것 같아 마음이 허허롭다.
죽기 살기는 시왕전에 매어 있긴 하다마는 이마에 사자밥을 붙이고 하루하루를 보내는 에비의 입장에서 저승 걸음을 하기 전, 살아 있을 때 실심으로 큰 애 너와 뒤를 풀고 싶다. 엉클어진 실뭉치를 솜빗질하듯이라도 하여 정갈하게 풀어 놓고 떠나고 싶다.
……
어깨에 풍을 걸친 손으로 82년간의 삶을 정리하기에는 힘에 부쳤던지 써내려간 글씨들은 오른쪽이나 왼쪽으로 죄다 누웠고, 반쯤 고장난 지퍼 입술에서 흘러 내렸을 당신의 타액이 일기장 곳곳에 누렁버짐처럼 퍼져 있었다.
생일하며 땅위에서 환갑을 넘긴 큰형에게 힘의 동력이 밥심이었다면 반은 아버지에 대한 미움심이었을 것이다. 그런데 이제는 미워할 대상이 사라졌고 동시에 삶의 동력도 반은 잃게 되었다.
꿈에 담겨 있어야 할 그 흔한 미래 긍정의 기술은 조금도 없고 특정인의 삶을 철저히 배척하여 도달하려는, 역설만 넘쳐나는 이상한 꿈을 평생 동안 꾸어 왔던 큰 형.
당신의 몸과 마음 속에 번득히 살아있는 아버지를 속속들이 박리하던 큰형은 마음속에 부처님이 나타날 때 마다, 부처님을 속속들이 죽여 버렸다는 그 옛날 고려의 어느 선승을 닮으려 했다.
그런데 역설의 집 주인이 자신의 잘못을 시인했으니 평생 동안 꾸어 왔던 큰형의 꿈은 지금부터 어떤 모습을 하게 될까? 씨도적은 할 수 없어 그 이상한 꿈을 대물림하여 꾸고 있는 아들 앞에 형은 또 어떤 아버지의 모습을 보이게 될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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