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조 스님 속리산 법주사 주지

희망찬 새해가 떠올랐다. 새해 첫날부터 법주사 수정봉에는 해맞이를 위해 많은 인파들이 몰렸다.

그 새벽부터 장엄한 일출을 보면서 각자의 소원을 비는 사람들의 모습은 종교를 떠나 진지하고 엄숙하였다.

어떤 대상을 향해 염원하는 것은 가장 순수한 신앙의 본질일 것이다. 모두의 소원이 이루어지는 한 해가 되기를 나 또한 기원하였다.

나는, 인도 바라나시의 갠지스강에서 맞이했던 일출을 잊을 수 없다. 이곳에는 일출을 보기위해 수많은 사람들이 모여든다. 그리고 아침부터 이 성수에 목욕을 하는 힌두교 사람들의 의식도 장관이다.

그리고 이 강가의 주변에는 화장터가 마련되어 있는데 그곳에서는 ‘카트‘라고 부른다. 그런데 유독 줄지어 서 서 화장을 기다리는 인기 있는 카트가 있다. 그 이유가 궁금했다. 현지에서는 그 카트를 ‘마니카르니까’라 했고, 그 이름이 지닌 뜻은 ‘계산하는 곳’이란다. 여기서 내 궁금증이 해소되었다.

그들은 망자가 유리한 조건에서 신에게 계산 받게 하기 위한 염원을 담아 그 카트에서 화장의식을 치루는 것이었다. 그러다보니 다른 카트보다 유명한 건 당연한 일이었다. 그렇다면 무엇을 계산한다는 것일까?

대부분의 인도 사람들은 자신이 죽고 나면 힌두 신이 선과 악을 계산한다고 믿는다. 생전에 지은 선악의 무게에 따라 자신을 심판하고 구원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힌두 신이 아무리 구원해준다 한들 자신이 지은 죄를 속일 수는 없다. 그래서 사후의 심판은 종교의 신을 떠나서 그 죄과가 공평한 것인지도 모른다. 어쨌거나 죽고 나면 누구나 생전의 업적을 평가받는다.

우리에게 죽음이 다가오고 있다는 것은 그 계산할 날이 다가오고 있다는 뜻도 된다. 그렇다면 지난 한 해 우리들의 삶은 어떠했는가? 선과 악의 무게 중심이 어디로 향해 있었는지 돌아보아야 한다.

모든 종교에서는 봉사와 베품의 삶이 값지다고 강조한다.

이웃을 위해 얼마나 봉사하는 삶을 살았는가의 질문은 선악을 평가하는 기준이 될 수도 있다.

프랑스의 철학자 알베르 카뮈는 ‘우리는 생의 마지막 순간에 이르렀을 때 얼마나 사랑했는가를 심판받을 것이다’라고 말했다. 이는 이웃의 위한 사랑의 실천을 따져 물은 것이다. 즉, 악행을 했는가? 선행을 했는가? 이것으로 자신의 생애를 평가받는다는 뜻이다.

한 해를 시작하는 이 시점에서 이렇게 물어야 한다.

빚지고 살았는가? 빚 갚고 살았는가?

이 질문을 다시 바꾸면 봉사와 베품의 삶을 살았는가 하는 부분이다. 탐욕과 집착의 삶을 살았다면 이 사람은 빚지고 사는 인생이었다고 정의할 수 있다.

새해에는 더 이상의 빚은 만들지 말고 살기를 축원해 본다.

그리고 새해에는 특별한 일을 기대하지 말고 평범한 일상이 계속되기를 발원하는 것도 좋을 것이다.

사소한 일상의 질서가 무너지면 집안의 불행은 시작된다. 행복은 이런 것이다. 어떤 질서에 변수가 생기면 행복이 흔들린다. 자신의 집안에 사고나 사건이 생겼다고 생각해보라. 이는 아무 일 없는 것보다 못하다. 그러므로 아무 일 없는 것이 좋은 일인 것이다. 올해에는 소원성취나 사업대박을 빌기 보다는 ‘한결 같아라!’라고 발원하면 어떨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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