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 수 애 충북대 교수

 

일에 쫓겨 바쁜 나날을 보내던 지난 연말, 모처럼 집에서 휴식을 취할 시간이 생겼다. TV를 켜니 연말 시상식에 참석한 연예인들의 화려한 옷차림이 눈이 들어온다. 화면으로라도 보신각 종소리를 들을 양으로 이리저리 채널을 돌려가며 자정이 되기를 기다렸다.

시린 손을 호호 불며 광화문 광장 인파 속에 섞여 새해를 맞이했던 시절을 회상하면서. 무박 해돋이 여행을 떠났던 때 아침상의 노릇하게 구인 푸짐한 생선구이를 떠올리니 군침이 돈다. 지난 일 년 동안 내게 주어졌던 시간들은 밀린 숙제를 하느라 허덕이는 생활이었다. 하루하루 바쁘게 보냈지만 돌이켜보면 무어라 내세울 만큼 성과 없이 시간을 그저 흘려보낸 느낌이 든다. 새 달력을 꺼내어 기억해야 할 집안 대소사 날을 표시하면서 이렇게 또 한 해가 지나갔음에 허무할 따름이다.

날짜를 적어 넣는 문서에 199*자 대신 2*으로 시작하는 숫자에 익숙해진 것을 빼고는 강산도 변한다는 10여년의 세월동안 내게 어떤 변화가 있었을까? 얼굴에 주름살 늘어난 것만 확인할 뿐 스스로에게 만족할 시간을 보내지 못하였음에 후회가 밀려온다.

임진년은 내가 태어난 해와 육갑이 같은 해였다. 이제부터는 또 다른 의미의 시간을 보내야겠다는 생각을 한다. 바람처럼 자유롭기 위해 내려놓을 것은 편안하게 놓을 줄 아는 비움의 여유를 가져보기로 한다. 꽃처럼 아름답게 살기 위해 베풀 줄 아는 도리도 지켜야겠다. 일상은 반복되어도 오늘의 시간은 다시 되돌릴 수 없다는 진리를 다시 새기며, 매일을 더 열심히 알차게 지내야겠다는 다짐도 해본다.

2013년 새해를 맞이한 지도 열흘이 지났다. 해맞이 여행을 갔다는 제자가 해돋이 풍경을 담은 사진을 전송했다. 어둡던 수평선 너머로 붉은 기운이 돌기 시작하더니 서서히 떠올라 이내 세상을 밝음으로 바꾸는 연속된 사진이었다. 새해 벽두 빨갛게 떠오르는 둥근 해를 보며 그는 무슨 소원을 빌었을까? 아마 빨리 취직할 수 있게 해달라는 소원을 빌었을 게다. 졸업을 앞둔 청년들에게 가장 절박한 문제가 취업일 테니까. 나의 새해 소원도 그와 크게 다르지 않다. 요즘 대학은 온통 취업 전쟁터이다. 대학등록금보다 더 많은 돈을 취업 스팩 쌓기에 들이는 학생도 많다. 결혼자금을 미리 대출해달라고 부모를 졸라 어학연수를 가기도 하고, 휴학이 필수가 되다시피 해 8학기에 졸업하는 학생이 드물어졌다. 교수들은 취업 가능한 곳을 찾아다니며 우수 학생이라는 상품을 파는 영업사원이 되기도 한다.

부푼 꿈을 안고 공부하며 사회가 원하는 스팩 쌓기에 한시도 쉴 새 없이 달려온 학생들에게 졸업은 영광스러운 즐거움이기보다 불안한 미래를 알리는 두려움의 시작이 되기도 한다. 성실하게 열심히 공부한 만큼 보상을 받아야 마땅한데, 그렇지 못한 안타까운 현실을 보며 선생이자 사회의 선배로써 너무 가슴이 아프다. 절망하지 말고 희망을 가지라는 위로의 말 밖에 할 수 없을 때는 자괴감마저 들어 대학이 취업학원은 아니라고 애써 나 자신을 위로해 보지만 무거운 마음이 풀리지는 않는다.

지금 청년들에게 절실한 것은 위로하는 희망의 메시지보다도 원하는 일자리를 만들어 주는 것이 최상의 선물이다. 독립할 수 있는 경제력을 갖는 것이 청춘의 아픔을 치유할 최선책일 것이다. 그들의 부모세대인 중년도 일자리 걱정은 마찬가지다. 한창 쓰임새 클 시기에 언제 직장을 잃게 될지 불안하고, 새로운 직업 찾기도 하늘의 별따기다. 고령사회가 되면서 일자리가 필요한 노인인구도 증가하고 있어 정년 연장도 검토되고 있다.

청년취업도 어려운데 중장년의 취업은 더더욱 바늘구멍이다. 일이 필요하고, 일하고 싶은 모든 이들이 새해에는 원하는 일자리를 찾아 희망의 나래를 활짝 펼 수 있기를 기원한다.

잦은 눈과 계속되는 한파에 하늘 높이 치솟는 식탁물가, 늘어가는 세금에 얇아져가는 지갑을 생각하면 몸과 마음이 움츠러든다. 올 겨울 난방비를 감당하지 못하는 시설재배농가의 시름은 한층 깊다. 정성스레 가꿔 수확을 눈앞에 두었던 채소와 과일이 추위에 스러진 모습에 넋을 잃고 말았다. 출하량이 적어져 금값이 된 신선식품은 살 엄두가 나지 않는다.

이제 옛날처럼 여러 저장식품들을 준비해 겨울을 대비해야할 것 같다. 가계 소비지출이 줄어들면 고객을 잃은 영세 상인들도 생계가 걱정이다. 작년보다 바깥 기온은 더 내려갔지만 실내 난방온도는 더 낮추어 추위를 이겨내야 한다. 검소하고 바르게 살아가는 모든 사람들이 건강하게 웃으며 살 수 있는 행복한 새해가 되길 소망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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