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 연 기 한국교통대 교수

대선이 끝난 지난달 21, 정리해고 후 복직한 한진중공업 노동자가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그는 가족에 대한 미안함, 생활고, 그리고 가진 자들에 대한 원망을 유서로 남겼다.

같은 달 31일에는 예천의 한 야산에서 연고지가 다른 남녀 3명이 승용차 안에서 유서와 함께 연탄을 피워놓고 숨지는 사고가 있었다. 올해 16일에는 유명 야구선수가 스스로 세상을 떠났으며 7일에는 경북 문경의 선관위 주차장 앞에서, 12일에는 경북안동에서 자살 사건이 발생하였다. 휴일인 13일 하루 동안 부산지역에서는 7명이 스스로 목숨을 끊는 사건이 잇따라 벌어졌다. 안타까운 마음을 진정시킬 사이도 없이 자살사건이 이어지고 있어 이제는 뉴스 보기가 겁이 날 지경이다.

14일 통계청에 따르면 지난 19913151명이던 한 해 자살자는 10년이 지난 20016991명으로 두 배 이상 불어났으며 2007년에는 12174명으로 곱절이 되었고 2011년에는 15096명에 이르게 되었다. OECD(경제협력개발기구)의 자료에 따르면 2003년부터 2010년까지 OECD회원국 중 우리나라가 자살률 1위를 유지하고 있으며 2010년 기준 인구 10만명 당 33.5명으로 이는 OECD 국가 평균에 비해 3배가 높은 수치이다. 보건복지부의 2011년 전국정신질환실태 역학조사에 따르면 2011년 한해 동안 자살을 시도한 사람이 108000여명, 전 국민의 3.2%가 평생 1번 이상의 자실기도를 한 적이 있다고 한다. 문제가 심각해도 여간 심각한 것이 아니다.

자살 사건이 벌어질 때마다, 특히 유명인이 스스로 목숨을 끊을 때마다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말이 베르테르 효과(Werther effect)이다. 이는 독일의 문호 괴테가 1774년 출간한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이 란 작품이 유명해짐에 따라 당시 시대와의 단절로 고민하는 베르테르의 모습에 공감한 젊은 세대의 자살이 급증하는 사태에서 유래한 것이다.

그런데 작금의 우리나라 상황을 베르테르 효과에 의한 모방 자살로 해석하는 것에 대해서는 결코 동의할 수 없다. 그것이 여러 원인 중의 하나인지는 모르나 정리해고 된 노동자가, 생활고에 시달리는 우리의 이웃들이, 성적을 비관한 어린 학생들의 죽음에 베르테르 효과란 말을 붙이기에는 그들의 어려움을 너무 쉽게 여기지는 않는가 하는 생각이 든다. 굳이 베르테르 효과를 적용하기 위해서는 당시 인습과 통념이 강한 서구사회의 억압적 분위기가 젊은 베르테르를 죽음에 이르게 했다는 근본적인 원인을 고려가 필요할 것이다.

또 다른 시각에서는 우울증에서 그 원인을 찾기도 한다. 통계에 따르면 국내 우울증 환자가 200749만명에서 지난해 57만명으로 13.9%가 증가했다고 하는데 이는 세계보건기구의 통계 5%의 두 배가 넘는 수치이다. 우울증의 극복이 자살률 감소에 크게 기여할 수 있을지는 모르나 이것이 의학적인 차원에서만 접근되어서는 안 될 것이다. 사는 게 고행인지라 사람이라면 누구나 불행해질 수 있고 때로는 그러한 불행이 자연스러운 현상일진데 문제는 불행 자체가 아니라 불행을 동감하고 해결하기 위한 사회적인 장치가 전혀 없다는 것이다. 직장에서 실직하면 돌아갈 곳이 없고, 대학에 진학하지 않으면 대책이 없고, 돈이 없어 사랑도 떠나고, 게다가 늙어서 병이라도 걸리면 늘어가는 의료비에 삶에 대한 의지마저 경제적인 손익에 따라 판단해야 하는 상황은 의학적으로 해결 불가능하다.

세상에서 가장 지적이고 귀한 존재가 사람이라고 하면서 정작 자기 집이 없고 종족 내 빈부의 차가 극심하고 종족간의 죽음과 죽임이 발생하는 존재는 사람 밖에 없다는 것은 결국 사람의 이기심으로부터 비롯되는 것이다. 그러나 다행히 사람에게는 이타심에 대한 DNA가 있고 고도의 지적 행위를 수행할 수 있어서 개인의 이기심들을 집단적 지성에 의해 통제할 수 있게 되는데 그것이 바로 정치가 아닐까 한다.

우리나라 헌법 제10조에는 모든 국민은 인간으로서의 존엄과 가치를 가지며, 행복을 추구할 권리를 가진다고 규정하고 있다. 이와 같은 행복 추구권에 대한 여러 가지 해석이 있을 수 있으나 적어도 행복이란 말이 최소한 인간적인 고통이 없는 상태 내지 만족감을 느낄 수 있는 상태라는 말에는 동의할 것이다. 당장에 이상적인 사회를 바라지는 못하지만 지금 보다는 조금 더 살만할 수 있는 사회적인 장치와 시스템을 더 견고히 마련하기를 바란다. 그래서 앞으로는 우리의 이웃들이 스스로 세상을 등지는 일을 지면에서 보는 일이 줄어들기를 바랄 뿐 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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