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 영 선 동양일보 상임이사

문화라는 말을 여기저기 쉽게 붙이는 데는 해석이 편리하고 그 뜻이 넓기 때문일 터.

사전적 의미로 삶을 풍요롭고 편리하고 아름답게 만들어 가고자 사회 구성원에 의해 습득, 공유, 전달이 되는 행동 양식. 또는 생활 양식을 문화라 한다면, 최근 유행하고 있는 풍속도들은 분명 문화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신세대 문화’, 도시 문화’, ‘결혼 문화식으로 문화라는 말을 붙인다면 화환 문화라는 것도 말이 될는지 어쩔는지. 어쨌거나 최근 유행하고 있는 화환 문화는 눈에 거슬리는 문화가 분명하다.

언제부터인지 유명인이 세상을 뜨면 큼직한 리본이 달린 근조화환들이 통로를 메울 정도로 앞다퉈 세워진다.

물론 결혼식장이나 행사장도 마찬가지다. 사람의 키보다 큰 화환들이 숲처럼 도열한 곳을 걸을 때면 이 화환들이 누구를 위한 화환인가 마음이 씁쓸해진다.

화환들이 마치 내방객들에게 내가 보냈소, 내 이름을 봐주시오하는 것 같아서 리본에 쓰인 이름을 읽기가 싫어진다.

고인이나 주인공에 대한 배려, 또는 가족들에 대한 마음씀에서 화환을 보내는 것이라면 보낸 이의 이름을 주먹만하게 쓸 필요가 있을까?

꼭 꽃을 보내고 싶다면 천편일률적인 화환이 아닌 좀더 성의있게 마음을 담아 보낼 일이다.

그런데 지금 유행하고 있는 화환 문화는 애도나 축하의 마음보다는 보낸 이의 이름이 중요한 듯 하다.

실제로 꽃은 치우고 리본만 걷어서 진열해 두는 집도 보았다.

몇 년 전인가, 정부가 허례허식을 줄이자고 화환 보내기 금지운동을 벌인 적이 있었다.

그러자 전국의 꽃가게들과 화훼농가들이 들고 일어나 그 운동은 시나브로 사라지고, 그 뒤로 화환 문화는 지금처럼 발전하면서 자리잡게 되었다.

며칠 전 한 행사장에서 재미있는 화환을 보았다.

여러 개 서있는 화환 중, 몇 개의 화환이 꽃대신 쌀을 꽃지게에 올려놓은 것이다.

그 화환에는 10kg, 또는 20kg의 쌀포대가 올려져 있었는데 아마 이웃에 대한 나눔으로 쓰라는 의도같았다. 그러고보니 최근들어 쌀 화환을 심심치 않게 본 것 같다.

쌀 화환을 파는 사회적기업까지 만들어진 것을 보면 새로운 트렌드요, 문화로 번질 기미도 느껴진다.

발상은 나쁘지 않다.

일회성으로 한번 쓰고 버리는 꽃보다는 쌀을 주면 좋은 의미로 쓰일 것이라는 생각에서 쌀 화환이 만들어졌을 것이다.

그런데 그 화환의 모양이 웃긴다. 화환은 꽃으로 만들어야 화환이지 쌀이 꽃이 될 수는 없다.

쌀을 주고 싶다면 선물처럼 기증하면 되잖는가.

전달하는 방법도 얼마든지 있을 것이다.

그 쌀을 억지로 꽃지게 화환처럼 만들어 쌀화환이라고 이름붙여 꽃화환 사이에 세워놓은 모습은 맞지 않은 옷을 입은 것처럼 어색하고 우스꽝스럽다.

이렇게 꽃지게 형태의 대형 화환으로 축하하고 위로하는 문화는 어디에서 생겨난 문화일까. 우리 전래 문화에는 분명 없었던 풍습들이다.

그렇다면 서양에서 들어온 것일까. 외국의 장례식이나 결혼식을 직접 지켜보지 못해서 잘 모르겠지만 영화나 드라마를 통해 본 모습으로는 외국엔 이런 풍조가 없는 것 같다.

꽃 한송이를 관 앞에 놓거나 무덤에 놓는 정도의 소박함, 작은 꽃다발이나 꽃바구니로 축하하는 결혼식 정도가 기억난다. 그럼에도 그들의 생활 속에는 늘 꽃이 있다. 그만큼 꽃을 사랑한다.

우리는 어떠한가. 생활 속에서 얼마나 꽃을 사랑하는가.

진정 화훼농가를 위하고 꽃가게를 배려한다면 생활 속에서 꽃을 사랑하는 문화를 키울 일이다.

고인을 애도하거나 축하하는 마음을 꽃으로 하지 말자는 것도 아니다.

지금처럼 변질된 화환 문화는 이제 버리자. 언제까지 남에게 보이고 겉으로 과시하려는 유아적인 문화 속에서 살 것인가.

향기좋은 꽃 몇 송이로도 내 마음은 충분히 전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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