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 수 길 논설위원·소설가

빅토르 위고의 장편소설 레 미제라블의 주인공 장 발장은, 굶주리는 조카들을 위해 빵 한 조각을 훔친 죄로 19년이란 긴 옥살이 끝에, 사회에 대한 분노와 증오를 품고 출옥한다. 그러나 갈 곳이 없어 들어갔던 성당에서 은접시를 훔쳤으나, 밀리에르 신부의 자비에 감화되어 사랑에 눈 뜨게 된 후, 가난하고 소외된 사람들을 위한 인류애의 실현에 헌신한다.

냉혹한 원칙주의자 자베르 경감이 장발장의 뒤를 끊임없이 추적하지만, 장발장은 가명으로 계속 불행한 사람들을 위한 자비를 베풀며, 곱게 키운 양녀 코제트를, 공화주의자로 혁명대열에서 부상한 귀족청년 마리우스를 구해, 행복한 부부로 맺어 준 뒤 생을 마감한다.

레 미제레블은 초고 완성에 1845년부터 3, 출간까지 17년이 걸렸단다. 소설의 배경은 17897, 굶주린 파리시민들의 바스티유감옥 습격으로 시작 된 프랑스혁명, 그 이후다. 당시 국왕 루이16세는 사냥이나 즐기고, 왕비 앙트와넷은 굶주린 민중이 베르사이유 궁전에 몰려 와 빵을 달라고 외치자, ‘빵이 없으면 과자를 먹으면 될 텐데 왜들 저러지?’라고 할 만큼 민중의 고통을 몰랐다. 4년 후, 왕과 왕비는 단두대의 이슬로 사라지고, 1830년대 초반까지 체제변화와 함께 통치자가 거듭 바뀌었으나, 민중봉기가 연이을 만큼 서민의 고통은 계속됐다. 위고는, 이 시기에 민중을 구원할 인류애실현의 표상으로 장 발장을 내세웠다. ‘레 미제라블에서 기독교적 인류애로 상생의 삶을 구현하려는 장 발장의 생애가 위고의 사상을 대변하는 것이라면, 자베르는 냉혹한 기득권자요 혁명의 대상인 지배층을 상징한다. 출옥 당시의 분노와 증오를 따뜻한 인간애로 승화시킨 장 발장의 상생하는 삶과, 냉혹한 자베르가 장발장의 자비로 혁명군의 처형을 모면한 후, 장 발장의 체포를 포기하고 회의 끝에 세느강에 몸을 던지는 불행한 삶의 대비는, 진보주의자 위고가 꿈꾸는, 탄압 없는 평등사회, 포용과 자비로 만인이 평등하고 행복한 상생사회의 조감도인 셈이다.

국내관객 700만을 바라보는 영화 레 미제라블은 장 발장과 자베르의 숨바꼭질 같은 사건 전개보다, 대립하는 두 사람의 자기정체성에 대한 심리적 갈등과 민중의 고통에 앵글을 맞춰 관객을 뭉클하게 한다. 작가가 인물의 행동과 심리저변에 깔아놓은, 인간애의 실천을 통한 사회개혁의 절실성을, 예술성 높은 영상으로 담아냈기 때문이다. 영화를 보노라면, 국정사안마다 무시로 충돌하는 우리현실이 떠오른다. 근래 20여년, 보수와 진보가 정권을 바꿔가며 국정을 이끌어 왔지만, 구호만 화려할 뿐 권력부패와 빈부격차, 이념과 세대갈등은 여전하고 그 후유증으로 국민 힐링의 길은 묘연했다. 작가가 레 미제라블에서 보여준 보수와 진보의 행로는 확연하다. 통치, 기득권층은 자베르처럼 자아성찰을 통한 각성을, 개혁론자는 증오의 승화를 통한 희생과 자비를 실천하라는 암시다.

우리는 지금, 당시의 프랑스민중이나 북한주민처럼 세습권력에 탄압받고 굶주리는 처지는 아니다. 인권을 박탈당하는 것도 아니다. 그러나 개혁과 쇄신에는 누구나 공감한다. 국태민안의 소망은 같아도 각기 다른 이념에 함몰 된 이들, 내편이 아니면 비난과 증오의 대상으로 몰아붙이며 수용과 포용을 거부하는 이들, 거친 팔뚝질에 살벌한 언어를 쏟아내는 이들이 레 미제라블을 보면, 갈등 치유의 길이 무엇인지 가슴에 닿는 것이 있을 것이다. 장 발장은 민중이 노예적 고통으로부터 해방되기를 원하지만 분노와 증오의 발산을 거부한다. 폭력적 저항에도 회의한다. 사랑과 자비, 곧 용서와 포용, 희생이 구원의 길이라 믿는다.

코제트와 마리우스, 에포닌이 들려주는 애절한 삼각사랑의 윤창, ‘저를 데려가시고 그(마리우스)를 살아 돌아가게(코제트에게)하소서라는 장발장의 기도, ‘총과 칼을 버리고 괭이로 농사를 지으며 살자는 혁명군과 민중이 하나가 되어 부르는 바리케이트 위의 대합창은 청순한 사랑과 숭고한 희생, 인류공통의 소망을 담은 서사시요, 위고가 바라는 상생의 길이다. 이는 곧 관객의 가슴을 흔드는 큰 울림인 동시에, 갈등과 대결로 분노와 증오를 발산, 의사당에서조차 폭력이 난무하는 팍팍한 우리 현실에 힐링의 길을 모색케 하는 처방전이다.

우연하게도 영화 레 미제라블을 감상한 뒤에, 뮤지컬 레 미제라블을 비교 감상할 수 있는 행운이 청주시민들에게 주어졌다. 암울한 시대, 민중의 아픔을 치유하는 인류애, 상생을 추구하는 삶의 길을 볼 수 있을 것이다. 아울러 연출자에 따른 작품해석의 차이와 함께, 영화와 무대극이 주는 각기 다른 감흥과 여운도 느끼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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