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형일 (극동대학교 언론홍보학과 교수)

설이면 온가족이 모처럼 고향집에 모여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는 맛이 있다. 하지만 그것도 잠깐, 근황 몇 마디 주고받으면 더 이상 할 말이 없다. 괜한 소리해서 걱정 듣느니 아무 말 안하는 것이 속편하다. 이렇게 서로 머쓱해질 때는 TV를 켜는 것이 상책이다. 명절 때면 볼 수 있는 각종 방송프로그램이라도 보면서 같이 웃다가 헤어지는 것이 설을 즐겁게 보내는 지혜인 셈이다.

설특집 프로그램은 그래서 모든 가족 구성원들이 편하게 볼 수 있는 내용으로 꾸미는 것이 좋다. 그만큼 방송 내용에서부터 출연진 섭외까지 공을 많이 들여야 한다. 억지웃음을 끌어내려는 과도한 설정이나 행여 가족들이 함께 보기 민망한 장면이라도 불쑥 튀어나오면 곤란하다. 예전에도 명절 때면 여러 연예인들이 몰려 나와 왁자지껄하는 소위 ‘막 버라이어티’ 프로그램이 빠지지 않았다. 그래도 그때는 시청자의 연령대를 고려하여 출연진의 구성을 다양하게 하려는 성의라도 보였다.

헌데 이번 설은 주말이 끼어 연휴가 짧았던 탓도 있겠지만 시청자의 눈길을 끌만한 특집 프로그램을 찾기가 어려웠다. 이른바 ‘아이돌’이라고 하는 젊은 가수들이 출연하는 프로그램이 점점 늘어나는 추세다. ‘대결 아이돌 가요무대’(KBS2)에서는 아이돌 가수들이 트로트를 불렀고, ‘최고의 커플 미녀와 야수’(KBS2)는 걸그룹 멤버들이 남자 개그맨들과 커플 대결을 하는 내용이었다.

압권은 150여 명의 아이돌이 한꺼번에 출연한 ‘아이돌 육상·양궁선수권대회’(MBC)이다. 벌써 몇 년 째 방송하다보니 어느새 MBC 명절특집의 간판 프로그램으로 자리 잡은 듯하다. 평상시 온갖 스케줄과 행사출연으로 바쁜 아이돌 스타들이 함께 모여 운동하면서 건강도 챙기고 친목도 도모하겠다는 것이야 누가 뭐랄 수 있겠는가. 하지만 이 프로그램이 과연 설날 온가족 시청자들의 호응과 공감을 얻을 수 있는가 하는 의문이 든다.

사실 이 프로그램의 묘미는 스포츠 경기를 통해 벌이는 경쟁의 박진감과 짜릿함, 그리고 그동안 숨겨왔던 아이돌 스타의 새로운 매력을 발견하는데 있다. 그러나 몇몇 예외를 제외하면 방송에 출연한 아이돌 대부분 경기에는 별반 관심이 없어 보인다. 솔직히 말하면 그 많은 아이돌 가운데 젊은 아이들조차 낯설어하는 얼굴이 태반이다. 그러니 이번 기회에 어떻게든 튀어서 얼굴을 알리려는 이들의 고군분투가 측은하기까지 하다.

방송사 입장에서는 구태여 섭외하지 않아도 출연을 원하는 아이돌이 줄을 서는 상황이니 고민할 필요가 없다. 더 쉬운 방법으로 정규 프로그램 가운데 재미있었던 내용만 재편집하여 특집으로 내보내기도 한다. 작년 파업 여파로 제작여건이 좋지 않은 MBC는 ‘아빠 어디가? 아빠 총출동’, ‘세바퀴 종합선물세트’, ‘이것이 마술이다. 레전드 오브 레전드’로 방송시간을 때웠다. KBS는 녹화는 했지만 방송을 타지 못한 내용을 재활용하는 알뜰함(?)도 보였다(‘당신이 한 번도 보지 못한 개그콘서트’ KBS2).

포맷은 그대로 유지하되 출연진에 변화를 준다던가 하는 식으로 기존 프로그램의 인기에 편승하는 ‘스핀오프’ 전략도 많이 활용된다. ‘스타애정촌’(SBS)은 일반인 대상 짝짓기 프로그램인 ‘짝’의 연예인 버전이고, ‘정글의 법칙K’(SBS) 역시 달인 김병만이 이끄는 ‘정글의 법칙’에 또 다른 인기 프로그램인 ‘붕어빵’에 출연하는 스타의 자녀들을 출연시켜 만들었다.

안 그래도 다양한 경쟁매체와 채널의 등장으로 어려운 상황에서 이처럼 별다른 공을 들이지 않고도 일정한 시청률과 광고수익이 보장되니 방송사 입장에서는 다른 선택을 할 이유가 없다. 하지만 마트에서 사온 음식으로 차린 밥상 같이 무성의한 설특집 편성에 물린 시청자들이 TV를 꺼버릴 수도 있음을 알아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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