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 희 팔 논설위원·소설가

12살 손녀딸이 할머니를 조른다. 무서운 귀신얘기를 해달란다. “할머니, ‘방죽거리귀신’하구 ‘곳집귀신’ 무서워? 그거 얘기해줘.” “방죽거리귀신, 곳집귀신?” 할머닌 의외라는 눈치다.

방죽이란 농사를 대비해 물을 막아 놓은 둑이다. 인근 몇 동네가 농사철에 물을 이용해야 하니 이 방죽 안에 저수되어 있는 물이 꽤 있어 가운데는 그 수심이 사람 키를 훌쩍 넘어 천렵 철엔 배까지 띄운다. 이게 또 그 특성상 위치가 인가에서 머리 떨어져 있는 후미진 곳으로 방죽 아래로는 읍내로 통하는 소로가 나 있다. 여기를 동네사람들은 방죽거리라 부른다. 이 방죽 물에서 익사사고가 최근까지도 일어났다. 3년 전엔 타동네 애들이 수영하다가 둘이 익사했고 작년엔 역시 타동네 장년들이 천렵하다 술 취한 이가 다리를 헛디뎌 방죽 아래로 미끄러져 익사했다. 이 일련의 일들을 놓고 사람들은, 먼저 익사한 물귀신이 끌어들인 것이라고 여기에 가까이 하기를 꺼려한다. 그런데 ‘방죽거리귀신’, ‘곳집귀신’이란 이런 최근의 물귀신들을 말하는 게 아니다. 그건 할머니의 처녀시절로 거슬러 올라간다. 할머닌 처녀 적에 아랫집 총각과 요샛말로 사귀었는데 둘이 다 부모들 몰래, 동네사람들 몰래 그러니까 비밀리에, 그러자니 한밤중에 후미져 인적이 드문 방죽기슭에서 밀회를 했다. 이때 이미 방죽거리귀신 이야기는 떠돌고 있었다. 그 사연인즉, 어떤 선남선녀가 부모들 몰래 사랑을 했는데 이걸 안 남자 쪽 부모의 반대에 떠밀려 남자가 다른 데로 장가를 갔단다. 이에 여자가 그만 방죽머리에 고무신을 나란히 벗어 놓고 치마폭을 뒤집어쓰고는 방죽 물속으로 뛰어들었다는 것이다. 이후 처녀물귀신이 방죽머리에 출몰한다는 소문이 나돌았다. 하루는 면에 다니는 동네사람이 읍내에서 회식이 있어 자정이 넘어 마을로 들어오는데 방죽거리쯤에 왔을 때 소복차림의 한 아낙이 자꾸 뒤를 따라오기에 취중에도 소름이 확 끼쳐 뒤를 홱 돌아다보니 그 아낙이 방죽 안쪽으로 바람처럼 순식간에 사라지더라는 것이다. 그는 귀신, 귀신을 본 것이다. 한을 품고 방죽 물에 빠져 죽은 그 여자의 귀신임에 틀림없을 거라고 믿은 그 사람은 이후 시름시름 앓다 1년 만에 죽었다는 전설을 남겼다. 이러한 아주 기분 나쁘고 무섬무섬한 귀신이야기의 근원지에서 처녀적 할머니와 아랫집 총각은 귀신이 한창 활동한다는 한밤중 자정이 넘게 밀회를 즐기는 거였다. 이들에게 그 무서운 귀신이야기는 아무런 걸림돌이 되지 않았고 오직 달콤한 사랑의 속삭임에만 취할 뿐이었다. 한데 그날도 둘이 밀회를 즐기고 있을 때였다. 방죽 아래 소로 길에서 인기척이 났다. 둘는 화들짝 놀라 얼른 방죽너머로 몸을 숨겼다. 그리고 길 쪽을 보았다. 한 사람이 마을 쪽으로 허둥지둥 걸어가고 있는 게 보였다. 둘은 무서웠다. 혹 들킨 건 아니가 하고. 이튿날 동네에 소문이 쫙 퍼졌다. 한 쌍의 귀신이 방죽 안쪽으로 들어가는 걸 본 사람이 있다는 것이다. 둘은 뜨끔했지만 자신들을 의심하지 않는 것에 안도했다. 이상의 이러한 줄거리가 방죽거리귀신이야기의 전말이다. 이 뒤 이들 처녀총각은 밀회장소를 곳집으로 옮겼다. 곳집이란 동네 상여를 두는 집이다. 상여 타고 간 죽은 사람들의 귀신들이 우글거린다 하여 사람들이 기피하는 곳으로 동네에서 한참 동떨어진 산 구렁에 자리하고 있고 한길에서 보면 보일락말락하는 곳이다. 그러니 밀회장소로는 안성맞춤이었다. 귀신들이 득실댄다는 것, 그래서 무섭다는 것 이런 것들은 이들 연인들에게는 아무런 장애가 되지 못했다. 이 역시 둘에게는 사랑의 즐거움만 있을 뿐이었다. 그런데 하루는 이들이 밀회를 마치고 곳집을 나오는데 저쪽 한길 쪽에 사람이 지나가고 있는 게 어렴풋이 보였다. 아차, 둘은 얼른 다시 곳집으로 들어갔다. 아니나 다를까 날이 샜는데, 곳집에 귀신들이 드나들더라는 소문이 동네에 퍼졌다. 둘은 자신들의 정체가 혹 드러났을까 봐 그게 무서워 은근히 마음을 졸였는데 귀신으로 치부하니 안도했다. 이게 곳집귀신이야기의 줄거리다.

할머닌 손녀딸의 얼굴을 물끄러미 보더니, “방죽거리귀신, 곳집귀신 그것들 하나도 무섭지 않아.” 하곤 빙긋이 웃는다. “왜, 귀신인데?” “그게…” 할머닌 얼른 말을 끊었다. 하마터면 ‘사랑 앞에선 그 어떤 귀신도 안 무섭더라.’ 할 뻔했다. 이제 겨우 12살짜리 아닌가. “그럼 뭐가 무서운겨 할머니?” “몰래몰래 숨기는 내 마음이, 내 행동이 남에게 들킬까 봐 그게 드러날까 봐 그게 무서운겨. 봐라, 그렇게 떵떵거리던 높은 사람들, 몰래몰래 숨겼던 것들이 하나하나 들통 나 풀죽어 있는 걸. 얼마나 무서우면 그러겠냐.”

손녀딸은 눈만 깜짝 깜짝거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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