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보 김기창 화백 탄생 100주년

 
 
올해는 운보 김기창(1913218~2001123) 화백 탄신 100주년이 되는 해다.
말 대신 붓으로 세상과의 소통을 시도한 운보는 열정적인 작품 활동으로 한국화단의 거목으로 성장, 87세의 일기로 세상을 떠날 때까지 삶을 오롯이 화가의 이름을 살아냈다. 동양일보는 운보 탄신 100주년을 맞아 그의 생애와 작품 활동, 청주와의 인연 등을 짚어보고 10년을 운보의 24시간 수행비서로, 3년을 운보미술관장으로 일해 온 김형태 국제장애인문화교류 충북협회장을 만나 운보와의 소소한 추억담을 담는다.
운보의 생애
운보는 1913년 서울 운니동에서 당시 총독부 토지관리국 직원이던 아버지 김승환씨와 어머니 한윤명씨 사이에서 8남매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서울 승동보통학교에 입학한 7세 때 장티푸스로 인한 고열로 청각을 잃은 후 언어 장애를 얻었다. 청각을 잃은 아들에게 아버지는 비교적 말을 할 필요가 적은 목수가 되길 바랐지만 아들의 재능을 알아본 어머니의 소개로 이당(以堂) 김은호 화백에게 동양화를 배울 수 있도록 했다. 이후 운보는 장애를 극복하고 1931년 조선미술대전에 출품해 1940년까지 6회 입선, 특선 3회를 기록해 한국 화단의 주목을 받았다. 이후 1942년 동경여자미술전문학교 본과에서 동양화를 공부하던 우향 박래현 화백이 선전에 출품, 당시 화단에서 주목받던 운보에게 인사를 온 이후 3년간의 필담연애 끝에 1946년 결혼했다.
1957년 미국 뉴욕 월드하우스 화랑 주최 교 한국 현대작가전에 초대 출품했다. 1960년 국전 초대작가가 돼 국전 심사위원을 역임하고, 타이베이(台北)와 홍콩에서 열린 한국미술전에 출품했고 이어 도쿄(東京마닐라에서 열린 한국미술전에도 출품했다. 1962년 수도여자사범대학(현 세종대)으로 교직을 옮겼고 문화자유전에 출품했다. 1963년에 5월문예상 미술본상을 수상했고, 7회 상파울로 비엔날레에도 한국 대표로 출품했다. 1964년 미국무성의 초청으로 도미(渡美), 1969년에 재차 도미하여 뉴욕에서 개인전을 가졌다. 홍익대와 세종대에서 강의를 한 적이 있다. 1979년 한국농아복지회를 창설하여 초대회장에 취임했고, 1984년에는 서울 역삼동에 청각장애인을 위한 복지센터인 청음회관을 설립했다.
운보 작품의 특징
운보의 화풍은 자유롭고 활달한 필력으로 힘차고 동적인 작품세계를 구축해 고시적인 풍속화에서부터, 형태의 대담한 왜곡을 거쳐 극단적인 추상에 이르기까지 구상, 추상의 전 영역을 망라하는 폭넓은 작가적 역량을 구사했다.
또 복음서의 예수 전승(傳承)을 한국적으로 해석, 예수를 한복을 입은 한국인으로 묘사한 동양화를 그렸는데 이는 예수를 한국적으로 묘사함으로써 기독교를 토착화하기 위한 신학적인 시도로 보인다.
한국화단의 거목이었으면서도 운보는 용 한 마리를 그리기 위해 수개월에 걸쳐 세계 각국의 용을, 용맹하고 근엄하며 또 친근한 민화 속의 용과 어리석은 용 등 모든 용들을 수집하고 선별해 이미지를 정리한 후 작품에 임하는 노력하는 화가였다. 덕분에 폭넓고 깊이 있는 작품 활동을 할 수 있었다.
대표작으로 세종대왕 초상’ ‘군마도’ ‘청산도’ ‘’ ‘산수화’ ‘예수의 생애’ ‘신선도등이 있다.
운보와 청주와의 인연
청주는 운보의 외할머니가 살고 계시던 곳으로 지세 검토 후 2000여평을 매입하면서 운보의집 터를 잡게 됐다. 운보의 집은 운보가 최순우 국립박물관장과 문화재연구소 김동현씨의 자문과 협조를 받고 청주의 설계사무소에서 설계해 안채를 구성했다.
처음 낙향하게 된 동기는 크게 문화공간과 장애인 재활 공간 마련 때문이었다. 서울대에 합격한 한 청각장애인이 장애를 가졌다는 이유로 서울미대에 불합격 처리되자 장애학생 100명이 한국구화학교에 모여 우리들 가슴에 박힌 못을 제발 뽑아주세요라고 호소하며 베토벤! 피카소! 김기창!’이라고 쓴 피켓을 들고 무언을 농성을 벌인 일화가 있었다.
이에 격려편지를 보낸 운보는 얼마 후에 절대 굴하지 않고 운보 선생님과 같은 화가가 되겠다고 몇 번을 다짐하는 학생의 답장을 받았는데 이편지가 멍에가 돼 농아복지사업을 시작하게 됐다.
외할머니의 고향이고 어머니가 묻힌 청주에 공부하고 싶어도 할 수 없는 젊은이들을 모아 농사지으면서 공부하는, 학비가 필요 없는 순수한 5년제 한국화(전통회화) 전문 미술대학을 설립하려는 소망을 갖고 농아와 장애인들의 자활터전 기능을 하는 기구로써의 운보의 집을 구상했다. 또 학생기숙사와 성북동 운향미술관 보다 10배 큰 미술관, 만화영화제작소(운보의 아들이 미국에서 애니메이션 전공) 시설을 계획하고 미술관에 운보와 우향의 작품을 비롯해 고화, 민화, 골동품, 기타 수집품을 진열해 국내 예술인들이 모여들 수 있는 문화공간을 갖추려 했던 것이현재 운보의 집이다. <김재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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