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형태 전 김기창 화백 비서관

철학자 니체는 짜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에서 인간이 초인간이 되기 위해서는 낙타와 사자, 어린아이의 단계를 거쳐야 한다고 말했다. 아이는 언제나 해맑고 기발하며 한없이 자유롭고 가치창조가 가능한 존재다.
운보 김기창 화백의 24시간 수행비서로 1989년부터 그가 타계한 2001년까지 함께 생활한 김형태(53·청주시 상당구 용정동 405-5 2) 국제장애인문화교류 충북협회장은 그를 어린아이 같던 할아버지로 기억한다.
운보 선생님을 모시기 시작한지 얼마 지나지 않아 선생님께 뺨을 세게 맞은 적이 있었어요. 선생님은 혼자계실 때 급격히 두려움을 느끼는 편이셨는데 제가 잠시 자리를 비운 틈에 잠에서 깨셨거든요. 영문도 모른 채 맞았는데 비디오를 보면서 제 눈치 보는 선생님의 모습이 참으로 어린아이 같아 함께 웃었던 기억이 납니다.”
김 화백이 어린아이 같던 할아버지라고 느낀 것은 비단 이 일뿐만은 아니었다.
들리지 않는 답답함으로 화를 내시는 일이 잦았지만 이후 꼭 행동으로 마음을 보듬어 주셨던 일, 운보의 집에 놀러오던 많은 어린아이들을 예뻐하셨던 마음, 불쌍하고 소외된 이웃을 위해 기꺼이 자신의 지갑의 여셨던 행동, 자신이 숨이 멎었을 때 멀리까지 왕진을 와 준 석영관 박사에게 지켰던 의리 등 여러 일화들이 김 화백을 어린아이, 초인간의 모습으로 그의 마음에 담겼다.
김 회장에게 김 화백은 정이 많았던 아버지 같은 분이었다. 명절 휴가차 본가에 갈 때는 따로 선물이 될 만한 것을 챙겨주기도 했고, 훗날 값지게 사용될 거라며 수행하면서 느낀 것들과 자신의 거취를 기록할 것을 권유하기도 했다.
또 그 기록방식까지 예문을 들어 세세하게 알려주던 자상함을 보이기도 했다.
운보 선생님과의 인연을 더듬다보면 가슴이 먹먹해질 때가 많습니다. 그 때 이해하지 못했던 선생님의 말씀이 이제야 이해가 될 때 더욱 그렇습니다. 선생님이 이 지역과 이 나라의 예술복지를 위해 기획하고 펼치셨던 것들이 퇴색되지 않길 바랍니다. 그 분의 횃불 같았던 삶의 여정이 아직도 생생합니다.”
서울에서 프리랜서 전시기획자로 일하던 김 회장은 19896월 국립현대미술관에서 열린 김 화백의 전시 기획·진행을 맡게 되면서 운보와 인연을 맺었다. 이후 청원군 운보의 집에서 김 화백이 타계할 때까지 함께 살았다.
그는 1961년 공주출생으로 운향미술관 학예실장과 운보미술관장, 충북도박물관협회 창립이사 등을 역임하고 현재 ()한국미협 서초지부 전시·행정분과 위원장과 대한장애인신문사 편집위원 등으로 활동하고 있다. 산업미술상과 정부기금지원 기획부문 우수상, 충북문화발전 공로상 등을 수상했다.
<김재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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