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장없는 정부 부처, 예산집행·정책수립 지연 등 행정공백

박근혜 정부가 5일로 출범 9일째를 맞았지만 국회의 정부조직법 개정안 처리 지연으로 국정이 사실상 마비 상태에 놓였다.

'정치 실종' 속에 정부조직개편안이 35일간 국회에서 표류하면서 결국 2월 임시국회 처리는 물건너감에 따라 새 정부가 언제 정상가동될지도 기약이 없는 상황이 이어지고 있다.

국회 인사청문을 거친 장관 내정자들도 임명장을 받지 못함에 따라 주요 정책 수립은 커녕 예산집행도 하지 못하는 행정공백 사태가 심각한 지경이다. 그야말로 '식물 정부'가 현실이 된 것이다.

리더십 부재로 인해 가장 타격을 받고있는 부처는 거대한 국가경제를 책임진 기획재정부다.

현오석 부총리 겸 장관 내정자는 국회 인사청문회가 13일로 예정돼 있어 그때까지는 전면에 나설 수 없고, 현 박재완 장관은 전(前) 정권 인사여서 사실상 업무에서 손을 놓고 있다.

신제윤 1차관이 금융위원장으로 내정된데다 김동연 2차관은 국무총리실장으로 임명되면서 리더십 공백이 가중되고 있다. 여기에 주형환 차관보가 청와대 경제금융비서관으로, 홍남기 정책조정국장은 기획비서관으로 각각 내정돼 자리를 옮겼다.

부처 내 '컨트롤타워'가 없다보니 정책 불확실성이 커지고 있다. 신제윤 차관은 이날 직원들에게 서신을 보내 "그나마 있던 차관 둘은 장관급으로 옮겨가니 '도대체 경제는 누가 챙기나'라는 불안한 마음일 것"이라며 "더욱 긴장하자"고 당부하기도 했다.

신설되는 산업통상자원부로 통째로 옮기게 될 통상기능도 마비 상태다.

한미 자유무역협정(FTA)내 투자자국가소송제(ISD) 개선 작업은 멈춰진 상태이고, 한 두달 앞으로 다가온 한ㆍ중ㆍ일 FTA와 아세안+6개국 간의 역내포괄적 경제동반자협정(RCEP)의 본협상 준비를 비롯해 베트남, 인도네시아, 캐나다 등 우리나라와 FTA를 희망하는 국가들과의 논의도 가닥을 못잡고 있다.

국토교통부와 해양수산부로 분리될 국토해양부도 행정공백이 가시화하고 있다. 한 관계자는 "부동산 공약이나 주택시장활성화 대책 등 현안은 새 장관이 와야 본격적으로 드라이브를 걸어 추진할 수 있는데 구심점이 없다"고 토로했다.

예산 집행이 중단된 것은 더욱 심각하다. 국토부는 해수부가 분리돼 나가는 것을 대비해 올해 예산을 국토교통부와 해수부로 분리했지만 법 통과가 늦어지면서 예산집행을 전혀 못하고 있다.

연안정비사업의 경우 지자체 예산배정도 덩달아 늦어지고 있으며, 도로·철도 등 주요 관급공사 공사비도 이달들어 집행이 끊겼다.

국토부 관계자는 "3월에 집행할 예산이 13조8천억원인데 이번 달에 한푼도 못 나가고 있다"며 "경기활성화를 위해 조기집행하기로 했는데 손발이 묶여 답답한 노릇"이라고 털어놓았다.

공무원 사회의 분위기는 어수선하다. 자신이 어느 부처로 옮겨가게 될지 몰라 사실상 일손을 놓은 공무원이 상당수다.

교육과학기술부 전체 730명 가운데 미래창조과학부로 가는 인원은 220명 정도로 정리됐지만 실제 정부조직법 개정안이 어떻게 통과되느냐에 따라 업무분장이 달라져 불확실한 상황이 이어지고 있다.

업무를 중단한 것은 방송통신위원회도 마찬가지다. 방통위는 지난달 20일 이후 매주 1∼2차례 열리던 전체회의를 이날까지 열지 않았다. 사무국에서 의결이 필요한 안건을 올리지 않은 까닭이다.

업무가 없는 것이 아니라 당장 '주파수 경매', 지상파방송과 종합유선방송국(SO) 간의 재송신 대가 관련 '교통정리', 위성방송사업자인 KT스카이라이프가 요구하는 '안테나 없는 위성방송'의 법적ㆍ제도적 허용방안 마련 등 현안이 산적해 있지만 방통위 실국이 사실상 일손을 놓은 것이다.

방통위 기능 이관을 놓고 여야가 한치의 양보 없이 대치해 미래창조과학부가 출범도 못 한데다 김종훈 장관 내정자가 사퇴하고 미국으로 떠나는 등 직원들이 업무를 제대로 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라는 것이 방송위 측의 설명이다.

대표적 사정기관인 검찰도 수장의 장기 공백이 이어지고 있다. 검찰총장추천위원회에서 후보자 3명을 한 달 전부터 뽑아놓고도 장관에 의한 후보자 임명 제청이 안 되고 있다.

4일 황교안 법무부장관 내정자의 국회 인사청문 경과보고서가 채택됐지만 언제 장관 임명장을 받아 검찰총장 후보를 제청할 수 있을지 미지수다.

정부조직법 개정에 영향을 받지 않는 부처들의 경우 특별한 업무 공백이 발생하지 않고 있지만 조직을 책임질 수장이 없어 박근혜 대통령의 대표적인 공약 추진의 지연을 우려하고 있다.

고용노동부 관계자는 "새 장관이 대통령에게 보고할 국정과제 로드맵에 대한 검토ㆍ완료 작업이 늦어져 '고용률 70% 달성' 등 새 정부 핵심정책 추진이 늦어질 수 있다"고 말했다.

경제민주화 주무부처인 공정거래위원회도 지난달 25일 김동수 전 위원장 퇴임 이후 '리더십 공백'이 이어지고 있고, 무엇보다 '일감 몰아주기' 제재 근거를 강화하는 공정거래법 23조 등 경제민주화 추진을 위해 필요한 법 개정 작업이 늦어지는 데 따른 불안감이 커지고 있다.

공정위 관계자는 "차기 위원장이 임명되고 국회에서 경제민주화 법안들을 서둘러 처리해야만 우리도 적극적으로 관련 정책을 집행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청와대도 실무를 담당하고 책임질 비서관(1급) 5∼6명의 인선이 여전히 안된 것으로 알려져 '스스로 발목을 잡는 것 아니냐'는 비판에 직면해 있다.

특히 홍보기획비서관 내정자가 계속 출근하지 않아 다시 새 인물을 물색하고, 민정비서관의 경우 내정됐다 취소된 것으로 알려졌던 인사가 다시 근무하는 것으로 알려지는 등 인선 과정에서 잡음도 터져 나오고 있다.

내각을 총괄하는 부처인 국무총리실도 국정운영 차질을 최소화하기 위해 잇따라 차관회의를 개최하며 주요 현안을 챙기고 있고, 정책분석평가실을 중심으로 박 대통령의 국정과제를 주도적으로 추진하기로 했지만 부처 간 협의가 수월하지 않아 일정기간 공전이 불가피할 전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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